못된 장난 마음이 자라는 나무 22
브리기테 블로벨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교실에 들어갔을 때, 나에게 말을 건네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자아이들이 내 새 옷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놀라워하는 아이들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부러움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시선이었다. 캘빈 클라인 티셔츠는 페리키타스의 시시한 블라우스나 에르메스 스카프보다 훨씬 더 세련되었다.
그날 나는 용기를 내어 운동장에 나갔다.
캘빈 클라인, 고마워. 반짝이 허리띠, 고마워…….

 

 

어젠가 읽은 인터넷 기사엔 같은 반에 있는 정신지체 학생의 사진을 맘대로 찍어 인터넷에 올린 어느 여학생이 등장했다. 상대의 밉게 나온 사진을 올린 후 친한 친구들끼리 비웃고 욕하고 뭐 그렇게 낄낄 깔깔 즐겁게 놀았던 모양이다. 이걸 본 어느 네티즌이 폐륜女 어쩌고 하면서 다른 사이트에 올려 일파만파, 학교는 사과를 하고 어쩌고 저쩌고. 딱 이 책이 떠올랐다, 『못된 장난』.

 

스베트라나 엄마의 조상은 예전에 러시아로 이주한 독일인이다. 이들은 '흑해 독일인'이라 불렸는데, 스베트라나와 엄마 그리고 새아빠는 최근 우크라이나에서 독일로 이주했다. 스베트라나의 엄마는 늘 조국을 그리워했지만 독일에서 그들은 '흑해 독일인'도 못되는 그냥 '러시아인' 혹은 '이방인'이라 불리며 사실상 '도둑'이나 '쓰레기'취급을 받는다. 그래도 스베트라나는 특유의 호기심과 노력으로 독일 명문 사립 에를렌호프 김나지움의 유일한 통학 장학생이 된다. 꿈꾸던 학교로 전학하며 품었던 스베트라나의 희망은 아이들의 지독한 따돌림으로 누더기가 된다. 노력이 필요없는, 아니 노력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가진 자'의 세상에 '노력'으로 입성한 소녀를 김나지움의 학생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저 기사에 등장하는 너무도 어리석은 여학생처럼 스베트라나의 우스꽝스러운 사진이나 지저분하게 합성한 사진을 그들만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려두고 깔깔 낄낄 즐겁게 놀았다. 물론 스베트라나에게 커뮤니티의 주소를 알려주되 읽는 것 외에 그 어떤 참여도 하지 못하도록 막아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 휴대전화 문자로 스베트라나를 모욕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래서 스베트라나는 망가진다. 서서히.

 

스베트라나 그리고 그녀가 속한 세계의 모습이 어째 좀 '사립학교 아이들'이나 '꽃보다 남자'스럽지 않은가. 책을 읽으면서 사립학교 아이들의 그 여자애랑 꽃보다 남자의 금잔디가 문득 문득 문득 떠올랐다. 앞서 애기한 작품에서 왕자님이 등장하셨던 것처럼 학교의 왕자님이 여기에도 등장하는데, 아빠가 헐리우드의 유명 영화감독인 인도소년 라비가 바로 그런 동경의 대상이자 흠모의 대상이다. 라비가 학생 식당에서 따돌려져 밥을 못 먹고 난처해하는 스베트라나를 도와주면서 둘은 친구가 된다. 어째 진행도 점점 비슷해지는 거 같지? 그러나 이건 사립이나 꽃남같은 달콤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눈앞에 들이미는 좀 서글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다.

 

희망을 품었고 기대했고 노력한 스베트라나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을 거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보는 사람이 화가 날만큼 끝까지 노력한다. 그들 중 하나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외면하는 애들한테 말을 걸고, 생일 파티에 초대받기 위해 자신에게 소중한 물건을 선물로 준비하고, 심지어 친구들이 비웃었던 옷차림을 바꾸기 위해 도둑질까지 하게 된다. 스베트라나는 노력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망가지는 과정이었다. 마지막 보루였던 라비의 믿음에 답해줄 수 없는 상황까지 몰리자 그녀는 다 놓아버린다. 스베트라나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철로 위에 누워 편해질 순간을 기다리던 그녀는 천운처럼 구조된다. 『못된 장난』은 스베트라나의 자살기사로부터 시작한다. 거봐, 달콤한 이야기가 아니랬잖아.

 

물론 김나지움 아이들의 비뚤어짐에 대해 이유를 찾는 장면도 나온다. 붕괴된 가정에서 부모들이 갖다 버리듯 비싼 사립에 내팽개친 아이들은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상처받지 않으려고 갑옷을 두르고 괴물이 된다. 그들이 바라는 부모의 관심과 사랑 같은 걸 지닌 스베트라나에게 질투하기도 했고, 학업 성적이 좋은 노력파 스베트라나 때문에 초조하고 화가 나기도 했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스베트라나를 향한 그들의 행동이 이해받을 수는 없다. 살아가면서 더 절감하는 거지만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은 진짜 천하다. 노력을 비웃고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전혀 다른 '것'으로 나눈다. 못 가진 자는 가진 자들 사이에서 더이상 인간일 수가 없다. 이건 아이들 사이의 왕따 문제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돈'을 섬기는 우리를 문제삼고 있다. 김나지움 아이들의 부모는 돈만 쳐다보고 사는 상류층이다. 가정을 지키지 못했고 자기 자식까지 돈으로 해결을 본다. 돈 주고 학교에 애를 완전히 맡겨버렸으니. 그런 부모를 비난하는 아이들도 결국 마찬가지다. 돈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하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거기서 인정받으려고 한다. 결국엔 자신들과 다른 가치를 지닌 친구를 모욕하고 망가뜨린다. 

 

이 작품에서 김나지움의 부잣집 아이들이 스베트라나를 괴롭히는 수단은 웹커뮤니티와 휴대전화 문자다. 이를 '사이버 스토킹'이라고 한단다. 앞서 언급한 기사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우리의 학교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컴퓨터와 휴대전화는 아이들에게도 필수품이며 사이버 세상은 비밀스럽게 유지될 수 있으니 사이버 스토킹은 앞으로 더 심해지고 잔인해질 것이다.

 

스베트라나의 우직한 고군분투에 짜증이 날 지경이었지만 뭐 괜찮지 않겠는가. 그렇게 싸워가야 이노무 세상에 지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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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오래 생각해보게 되는 이야기...

 

아부지가 변호사라면 중산층쯤으로 보면 되는가? 그런 가정에서 잘 나가는 투수로 활약하는, 뭐하나 모지란 것 없는 제프가 어느 날 납치당한다. 제프식으로 말하자면(굳이 제프식으로 말할 필요가 없구나, 이 놈은 변태가 맞으니) 변태한테 납치당한다. 그리고 몇 년 후(2년인가 3년인가 그렇다, 읽은 지 좀 됐다구우~~ 도서관 책이라 한 번밖에 못 읽었공) 집으로 돌아온다. 제프는 살아남기 위해 변태를 사랑하는 '척'해야 했다. 이야기는 제프 가족이 방학 끄트머리에 집으로 돌아오는 데서 시작하여 '곧' 제프가 납치되고 '바로' 제프가 돌아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돌아오는 장면, 그니까 그 변태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제프는 불안하고 조급한 맘을 감추며 같이 사랑한다고 장단 맞춰주고 너무 서두르는 티가 안 나게 느릿느릿 집을 향해 걸어가는 일련의 그림은 제프의 지난 시간을 조금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제프, 그의 지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새로운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첨엔 기리노나쓰오의 '잔학기'가 생각났다. 읽고 나서도 큰 줄기나 말하려는 바의 어떤 부분은 꽤 닮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건 혼란스럽다. 아마도 제프의 시점에서 모든 걸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제프가 겪은 그간의 상황은 그의 시선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그의 일그러진 시선에서 그를 이해하고 그가 보는 주변을 제대로 보려는 노력도 해야한다.

또한 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제프의 조용하고 처절한 분노, 애처로운 자책을 아무 기운 쓰지 않고 바라볼 순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두가 알고 있다. 모두 중의 누군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너머를 상상하기도 했을 거다. 그런 와중에 제프는 웅변한다. 그는 나를 만지지 않았다. 그는 그냥 범죄자다. 변태가 아니다. 이런 그의 노력이 너무 안쓰러워서 닥치고 그냥 있으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오.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나는 돌연히 말했다.
"그 사람이 나를 강간했어요, 그 사람이 나를 강간했어요. 어떻게 그 사람이 나한테 그럴 수가 있었지요? 어떻게 그런 식으로 나를 대우할 수가 있었어요?"
"그가 너무 미워요. 그를 증오해요."
나는 소리를 질렀다.

 

*
느낌을 살리기 위해 제프 또래의 소년에게 도움을 받아 번역을 한 모양인데 난 번역이 좀 거슬렸다. 보통보다 더 번역투라고 할까... 아니 번역한 소설이라기보단 걍 '번역문'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 영...
**
역자 후기에도 비슷한 고민이 있던데... 이걸 과연 내가 애들한테 읽힐 수 있을까 싶다. 그렇지만 꼭 써먹어보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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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차피 불편한 것이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삶은 어차피 불편한 것이다 - 티베트에서 만난 가르침
현진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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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티베트 사진에 마음이 혹해 여행기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여행기라기보다는, 티베트에서 그곳 풍경과 사람을 만나며 현진 스님이 우리 삶에 대해 생각한 것들을 풀어놓은 거다. 왜 풀어놓았냐 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우리에게 '그렇게 좀 살지마'라는 당부를 하시려고.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을 풀어놓았으니 여행기임이 분명하나 그렇게 살면 안 되요, 삶은 이런 거랍니다, 우린 모두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라는 이야기들 때문에 여행기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모두 비슷한, 아니 결국 같은 얘기지만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부분은 낯설지 않은, 어쩌면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우리가 어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둥글고 성기고 큰 이야기다. 다음은 같은 이야기에 불교적 색깔이 많이 더해지고 마지막 부분은 티베트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짙어진다. 개인적으론 뒤로 갈수록 더 좋았다. 덕분에 티베트 불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책 말미에 수록된 참고 도서 목록도 따로 메모해뒀다.

 

읽는 동안은 나와 내가 살아온 시간과 지금의 내 모습 같은 걸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필요한 사치와 오락에 돈을 낭비하는 것은 너무나 무의미하게 삶을 허비하는 것이라든가, 악마가 사람을 낚을 땐 미끼를 쓰지만 게으른 인간은 찌만 있어도 낚을 수 있다며 노동의 가치를 얘기할 때나, 다른 동물이 반납한 지난한 시간을 인간이 받아왔기에 우리의 삶이 고되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그 자체가 무엇보다 감사한 일이 아니냐는 등의 이야기에는 끄덕끄덕 감사감사 뭐 그랬다.



다만 아쉬운 것은(이건 아마도 개인적인 문제일 뿐인 듯하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지금을 직시하고 앞으로를 그려보는 그런 귀한 시간이 책을 덮은 후에도 이어지고 변화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게으르고 부족한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 담긴 이야기는 말하기는 쉬우나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들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책을 읽다 문득 법정 스님을 떠올렸다. 많은 이들이 그토록 법정 스님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분은 말로 가르침을 주신 게 아니라 행동으로 몸소 보여주셨기 때문이니까.

 

직접 가서 그 하늘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면 더  행복했겠지만 담긴 사진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지고 조용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책이다. 두고 두고 읽으면 나의 저 아쉬움이 해결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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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데이즈>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파인 데이즈
혼다 다카요시 지음, 이기웅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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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파인 데이즈』는 네 편의 짧은 소설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굳이 네 편의 공통점이라고 할까 뭐 그런 걸 찾자면 '가볍고 투명한 그러면서도 신비스러운 분위기' 정도지 싶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 분위기가 전부인 이야기였다. 미스터리하지만 미스터리는 아닌 이야기, 청춘을 말하지만 청춘은 없고 청춘이 그려지는 분위기만 있는 이야기는 묘하게 가볍고 상큼하여 괜찮은 시작을 보였는데 끝으로 갈수록 반복되는 분위기가 지겨워진 건지 책장이 무겁고 느리게 넘어갔던 기억이 난다.

「파인 데이즈」에는 자신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는 어떤 악의적인 분신을 지닌 신비스런 여고생이 등장한다. 너무 아름다운 전학생을 따르는 소문은 섬뜩한 것으로, 그녀에 대한 과도한 애정으로 그녀를 힘들게 했던 남학생 다수가 자살했고 그 죽음에 그녀가 깊게 관여되었다는 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심한 말을 했던 교사가 자살하면서 그녀는 '저주'라는 힘을 지닌 인물로 아이들 사이에서 묘하게 떠받들어진다. 두 소녀와 두 소년이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청춘의 풋풋함과 불안함을 미스터리한 분위기로 들려준다.

「Yesterdays」에는 주인공을 과거의 어느 때로 이끄는 특별한 공간과 그 곳에서의 시간이 등장한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부친의 부탁으로 아버지의 옛애인과 그 사이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아이를 찾아나선 주인공은 젊은 시절 그녀가 살았던 낡은 아파트를 찾아간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그녀와 '그 시절'의 아버지를 만난다. 돈이 전부인 삶을 사는 아버지와 맞지 않아 집을 버린 주인공은 한때 예술가를 꿈꾸던 아버지를 만나고 이해하게 된다고…….

「잠들기 위한 따사로운 장소」에는 자신이 품은 악의를 현실로 만드는 여인, 그러니까 상대를 '저주'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자신을 거스르는 상대에게 저주를 내린다는 면에선 첫 수록작 '파인 데이즈'와 비슷하다. 스스로의 악의로 이웃은 물론 가족까지도 해치는 여자와, 사고에서 먼저 구출되기 위해 동생을 제치고 먼저 손을 뻗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인간의 의지와 운명의 관계를 묻는다.

「Shade」는 최고의 장인이 혼을 담아 만든 예술품에 관한 이야기로, 어둠에 대항하여 빛을 밝히는 전등갓과 어둠에 녹아버린 여인의 사연이 등장한다. 어둠을 물리치려 혼을 담아 전등갓을 만들었지만 끝내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지 못한 예술가를 통해 삶의 모든 因果는 그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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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러스트>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아메리칸 러스트
필립 마이어 지음, 최용준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아메리칸 러스트』는 몰락한 철강도시 부엘에 사는 젊은이 아이작과 포의 이야기다. 또한 몰락의 중심에서 그 처음과 끝을 몸으로 겪은 헨리, 그레이스 그리고 해리스의 이야기이며, 몰락한 도시를 뒤로한 리의 이야기다.


아이작은 스스로가 '노인네'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서랍에서 4천 달러를 꺼내 집을 나선다. 어머니가 자살한 후, 누나 리가 집을 떠나고 쭉 혼자서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보살폈다. 그러나 노인네는 아이작을 인정해주지 않았고 5년을 참고서야 아이작은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이작은 포의 집으로 향했다. 포는 아이작의 거의 유일한 친구다. 전도유망한 미식축구 선수였던 포는 결국 대학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트레일러에서 밀렵한 고기를 먹으며 그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작고 아이 같은 용모에 말이 없지만 천재적인 두뇌를 소유한 아이작과 큰 덩치에 호시탐탐 치기어린 주먹을 날릴 기회만 바라보는 철이 덜 든 포는 몰락한 도시에서 다시 반짝일 리 없는 녹슨 희망을 손에 쥔 동지였다. 그래서 포는 함께 떠나자고 찾아온 아이작에게 함께 떠날 생각은 없지만 조금 같이 걸어주겠다며 길을 나선다. 그리고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모두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때문에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는 사건이다.


제강소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철강 소도시 부엘의 제강소가 문을 닫았다. 더불어 도시도 문을 닫았고 도시를 구성하던 사람들의 희망도 문을 닫았다. 이제 부엘은 사람이 사는 집보다 텅 비어 스러져 가는 집이 더 많다. 정원에서 코요테나 사슴을 보는 것도 흔한 일이다. 최저 임금의 일자리를 놓고도 머리가 터져라 싸워야 한다. 능력이나 재능이 있는 사람은 벌써 도시를 떠났다. 그런 것이 없어도 떠날 사람은 떠나버렸지만 그들의 삶은 부엘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여전히 부엘에 남아있는 이유가 그것일 테지. 훌륭한 학업 능력으로 도시를 떠날 수 있었던 리의 말대로 부엘은 이제 '녹 덩어리'일 뿐이다.


"이 나라가 망하고 있는 건 머리를 녹색으로 물들이고 코에 피어싱을 하는 아이들 때문이 아니야. 개인적으로는 그런 애들을 싫어하지만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 진짜 문제는 보통 시민들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직업을 구할 수 없게 된다는 거야. 직업을 잃으면 나라는 잃는 거라고."
잠시 등장하는 치안 판사의 얘기처럼 부엘의 사람들은 직업을 잃고 나라를 잃었다. 절망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리의 얘기에서 알 수 있듯 이들에게선 어떤 저항도 없었다. 15만 명의 사람들이 해고됐지만 다들 조용히 직장을 떠났다. 도시 하나를 말아먹고 15만 명의 사람들에게 나라 잃은 것과 같은 무게의 절망을 안긴 누군가가 분명 있었으나 그 누군가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았다. 아이작이 부엘의 아이가 아니었다면, 포가, 리가, 아니 그 이전에 부엘이 그렇게 몰락하지 않았다면 아이작의 부모나 그레이스와 해리스의 삶이 그토록 막다른 곳에 몰리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비극은 부엘의 몰락에서 비롯되었다. 허나 저항하지 않는 그들, 사회적 힘이 개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외면하고 모든 것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려버리는 아메리칸 드림의 어두운 진실이 부엘의 몰락보다 앞선 그들 비극의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살벌한 무한 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중인, 거대 사회에 인생을 저당잡힌 하찮은 개인인 우리에게 부엘이 멀고 먼 미국의 어디일 뿐일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도 자신을 탓하는 15만 명의 사람들이 그저 말 안 통하는 미국 사람들이기만 할까. 내일의 우리 동네 혹은 지금의 내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벌써 그 어떤 절망의 기운이 마음에 피어오른다. 그러나 이 작품에도 '희망'이 있다. 녹슨 집에서 녹슨 꿈을 붙들고 절망하던 그들이 결국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결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을 선택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본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마지막 선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가슴 아프다. 그들의 그간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아이작과 포 그리고 헨리, 해리스, 그레이스, 리의 선택과 행동을 열렬한 희망의 시작으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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