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서 어른이 되고 싶다고 늘 바랐던 아이였다. 서울의 동(洞) 하나 만큼도 안 되는 소박한 면적과 인구를 자랑하는 지방 소도시는 어린 내게 갑갑하기만 했다. 얼른 대학생이 되기를, 어른이 되기를, 그리하여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 소도시에서 벗어나기를 꿈꾸었다. 하고 싶은 일도 보고 싶은 것들도 너무 많았고, 무엇보다 내 힘으로 살고 싶었다. 기실 어른이 되는 과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상처도 있었지만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제법 즐길 만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내가 아이로서 보냈던 시간 때문이었을 게다. 어른이 되기까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차곡차곡 자라나는 과정이 인간의 아이에게는 필요하다.
『숙자 언니』는 아이가 어른이 되는 일이 지금과는 좀 달랐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마도 60년대쯤의 어느 시골 마을. 빨리 조그만 마을을 벗어나서 읍내로, 서울로, 더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셋찌니 영미도, 마을에서 마냥 뛰어 놀며 엄마와 평생 살고 싶은 막내 영옥이도 엄마와 아버지와 할머니의 품 안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그런 보살핌 없이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아이들이 있다. 너무 이른 시기에 어쩔 수 없이 어른들의 세계로 떠밀리는 아이들. 영옥의 첫찌니와 둘찌니도 어린 나이에 서울의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어야 하고, 재혼한 엄마와 함께 살 수 없어 이모집에 맡겨진 숙자 언니도 제 앞가림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이들에게 세상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의 터전만은 아닐 터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숙자 언니는 꿋꿋하게 나름의 삶의 요령을 터득해 가고, 한껏 자기 욕심만 차릴 줄 알았던 영미도 타인을 이해하는 법,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 나간다. 막내 영옥이에겐 언니들의 변화가 낯설지만 조만간 그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숙자 언니』가 보여주는 풍경이 요즘 아이들에게는 낯선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숙자 언니의 심정을 헤아려보고 셋찌니 영미의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성장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법하다. 모든 아이들이 따스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책 속에 삽입된 삽화들은 책의 내용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보너스다. 간단하게 자르고 찢어 붙인 색종이, 신문 조각이 산자락 사이에 놓인 좁다란 길도 되고, 머리 위로 나리는 꽃비,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엄마의 편지를 기다리는 소녀도 된다. 운치 있고, 정겹고, 포근하고, 절절하다. 시골 마을의 정경을 소박하고도 세련되게 표현한 삽화를 보고 있으면 은은한 온기가 가슴 속에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