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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나는, 20% 부족하다고 느꼈다. 신선한 소재, 거침없는 유머, 통쾌한 주제의식은 확실히 장점이었지만, 진부한 전개에 전체 구성은 빈약했다. 2%, 가 아니라 무려 20% 부족할 때는 더 이상의 기대를 할 수 없게 마련이다. 그러나 박민규의 경우엔, 그렇다고 그냥 잊어버리기에도 아쉬운, 뭔가가 있었다. 어딘가 자신이 말한, 치기 어려운 공은 치지 않고 잡기 어려운 공은 잡지 않는다는 ‘삼미의 플레이’를 연상케 했다고나 할까. 좀 더 잘 쓸 수 있는데 어영부영 끝내버린 것 같은 허전함을 풍겼다. 그래서 내가 준 별점은 세 개 반이었다.
신작 단편집 <카스테라>는 망설임 없이 별 네 개를 준다.
일단 제목부터 먹고 들어간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아, 하세요 펠리컨」 등등. 이건 무슨 동물 시리즈인가? 한국 소설에 이런 발랄한 제목이 등장했던 적이 있던가. 유쾌한 상상력과 남다른 표현력의 산물이랄 수 밖에 없는, 신선하고 깜찍한 제목들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몰라’, ‘고마워’ 라는 말을 하게 되면 자연히 ‘개복치’와 ‘너구리’가 후렴구처럼 따라붙는다.)
발랄한 제목과 달리 소설 속에는, 하나같이 가진 것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직장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팀장과 어떻게든 취직해 보겠다고 애쓰는 인턴 사원(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미안하다 말하는 가냘픈 표정의 아버지와 일찍부터 ‘자신만의 산수’를 깨달아 돈벌이에 나선 고등학생(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사업이 망해 혹은 취직을 못해 ‘원래 이런 걸 할 사람이 아닌데’ 이러고 사는 사장과 아르바이트생(아, 하세요 펠리컨), 학생운동 전력의 농촌 운동가(코리언 스텐더즈), 갑자기 집도 절도 없이 세상으로 떠밀린 대학생(갑을고시원 체류기). 소재로만 보자면 갑갑하고 암울하고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아니 우리의 버거운 삶을, 박민규는 판타지로 엮어 낸다. 인턴 사원 앞에 갑자기 존재를 드러낸 너구리, 양복을 입고 지하철을 기다리는 기린, 하늘을 나는 오리배, 비행접시와 대왕오징어의 습격이라니, 현실에 느닷없이 섞여 드는 이런 판타지는 상당히 엉뚱하다. 그럼에도 생경하지만은 않은 것은, 우리의 삶이란 게, 특히 이 시대 한국에서 갑자기 직장을 잃거나 가족이 앓아 눕거나 사기를 당해 거리로 내몰릴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는 게 판타지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편 판타지는, 특유의 경쾌한 입심과 더불어 현실의 무게를 어느 정도 덜어주는 유머를 제공한다. 전작에서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괜찮지 않겠냐고 제안했던 작가는, 이제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래도 웃어볼 것을 권하는 듯 하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아, 하세요 펠리컨」 세 편이 마음에 든다. 재기 발랄한 문장과 엉뚱한 전개에 웃으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짠한 것이, 작가가 선사하는 유머와 페이소스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삐딱함과 독특한 문장으로만 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삶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글을 쓰는 작가 박민규가 반갑다.
아쉬운 점(별 다섯이 아니라 넷인 이유)이라면, 비슷한 설정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뒤로 갈수록 지겨워진다는 것이다. 2% 부족하다. 그러니까, 박민규는 여전히 진행형인, 좀 더 좋아질 수 있는 작가라는 의미 되겠다. 한국 작가를 거의 읽지 않고 있지만, 박민규 만큼은 앞으로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