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들고 다니는 걸 본 친구는 돈키호테와 햄릿을 비교하는 것이 영국인들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돈키호테 쪽이 훨씬 매력적이고 생생한 인물이므로 비교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땐 그저 웃고 말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수긍한다. 물론 이것은 영국인들의 음모가 아니라 투르게네프의 구분이라지만 말이다. (이반 투르게네프는 '햄릿과 돈키호테'라는 에세이에서 사색과 회의에 몰두하는 사색형 인간 햄릿과, 자신의 이상을 향해 무모하지만 용기 있게 나아가는 행동형 인간 돈키호테로 인간의 대표적 성향을 이분했다.─알라딘 책 소개)

 

돈키호테가 무모한 인간인가. 글쎄. 돈키호테는 사실 상당히 지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다. 책을 많이 읽고, 재치 있으며, 언변이 뛰어나고, 마을의 농부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시골 귀족이다. 그러던 그가 기사도 소설에 몰두하면서 상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짓고, 동네 아낙을 둘시네아 델 토보소 공주로 바꾸어 연인으로 삼고, 소설 속의 기사들이 그러했듯이 업적과 명성을 쌓기 위해 편력을 하기로 결심한다. 결심한 순간 모든 일은 이미 결정된 것이며 그대로 진행할 뿐이다. 그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 돈키호테는 확실히 행동형 인간이다. 그러나 사색이 결합된 행동파이며, 자신의 의식 속에 하나의 세계를 건설할 능력이 있고, 남들의 비난과 조롱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뚝심이 있다. 나는 그가 미쳤다거나 무모하다기보다는 스스로 만들고 걸어 들어간 자신의 세계에서 남들의 현실 세계로 돌아오기를 거부하는 의지의 인간이라고 본다. (게다가 의지란 건 때로 꺾이기도 하고 살짝 굽히기도 할 수 있다는 걸 돈키호테는 잘 알고 있다.) 세속의 상식을 떠나 자기만의 가치와 이상을 따르는 돈키호테의 이단자적인 모습은, 요즘 세상에서도 가끔 만날 수 있는 특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돈키호테 같다고 한다면 그건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칭찬이어야 마땅하다. 

 

다른 식의 구분은 돈키호테를 이상주의자로, 돈키호테의 종자인 산초를 현실주의자로 나눈다. 물론 산초가 돈과 먹을 걸 좋아하고 영지를 받으려는 욕심에 돈키호테의 종자 노릇을 한다는 건 틀림없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허황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라 나선 사람을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 배운 것 없고 무지한 시골 촌부라서 그렇다고? 그보다는, 산초 역시 머리는 이상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적절하다. 다만 땅에 붙어 있는 발과 엉덩이가 더 묵직할 따름이다. 하여 이 둘을 한 인간의 양면이라고 본다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두둥실 떠오르지도 바닥에 붙어버리지도 않는 일정한 균형을 유지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만담 같은 콤비의 좌충우돌 편력기는 꽤나 유쾌 상쾌하다. 기사로서의 신조를 갈파하다가도 상황이 어려워지면 은근슬쩍 발을 빼거나 자기를 합리화하는 돈키호테와 꽁알꽁알 투정 많고 겁 많고 그러면서도 우직한 산초를 보고 있자면 웃지 않을 수가 없다. 17세기의 소설에서 이처럼 활동적이고 특징적이고 성격 있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놀랍다.

 

세르반테스가 이 소설을 발표했을 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이전에 그는 에스파냐군에 입대하여 저 유명한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였으며, 해적의 습격을 받고 알제리에서 5년간 노예생활을 했다. 38세부터 소설과 희곡을 쓰기 시작했지만 전혀 성공하지 못했기에 문학의 길을 버리고 세금징수원으로 살아가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돈키호테>에 자연스레 녹아 들어 있다.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험 외에도 그들이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절절한 사연이 소개되는데 이것들은 각각 하나의 단편 소설로 봐도 무방하다. 하나같이 아름답고 빼어난 남녀가 등장하는데다 사랑에 죽고 못살고 여자에게 정숙함을 요구하는 등 뭐 이런저런 한계를 보이긴 하지만, 흥미를 반감시킬 정도까지는 아니다. 돈키호테의 광태에 지겨워질 무렵이면 이 이야기들이 하나씩 등장하기 때문에 오히려 꾸준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7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돈키호테>의 1부만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2부도 빨리 완역되기를 희망한다. 우리의 기사 돈키호테가 겪은 모험의 전말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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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6-03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돈키호테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리뷰군요.. 잘 읽었습니다..^^

로드무비 2005-06-0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저는 산초형 인간!ㅎㅎ
리뷰 빨리도 올리셨네요.^^

물만두 2005-06-03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만^^

미완성 2005-06-03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신청해야겠어요 헤헤.
요즈음 스페인 문학에 푹 빠져계신 겁니까~ 흠..시공사 책만 아니면 더 좋았을텐데..
이건 좀 다른 얘긴데요.
전 스페인이란 나라, 예전에 참 동경했었는데..라틴아메리카 역사 공부 잠깐하고나서는 그냥 스페인이란 단어만 들어도 으스스해요. 심각한 편견이겠지요? ;;;;

urblue 2005-06-0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님, 저도 시공사라 떫떠름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수탈 문제라면 사실 스페인만의 문제는 아니지요. 게다가 당시 스페인 국왕과 정부 관리들이 상당히 멍청하여, 라틴 아메리카에서 수탈한 자원들은 대개 영국으로 흘러들었답니다.

물만두님, 감사. ^^

로드무비님, 미 투! ㅋㅋ

날개님, 돈키호테하면 풍차에 달려드는 장면만 떠올랐었거든요. 그런데 책 읽고 생각이 바뀌었지요. ^^

하이드 2005-06-03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 에서도 돈키호테 vs. 셰익스피어더라구요. 그 책 읽을때 돈키호테 다시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세르반테스의 책만 실컷 샀습니다.

urblue 2005-06-0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동시대 작가니까 그렇겠지요?
엥, 그런데 세르반테스 vs. 셰익스피어 / 돈키호테 vs. 햄릿 아니구요?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