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나는 늘 급진파다. 우선 소유하고 본다. 정류장에 나와 포장지를 끄르고 전차에 올라 첫페이지를 읽어보는 맛, 전찻길이 멀수록 복되다. 집에 갖다 한번 그들 사이에 던져버리는 날은 그제는 잠이나 오지 않는 날 밤에야 그의 존재를 깨닫는 심히 박정한 주인이 된다.

 

 

가끔 책을 빌리러 오는 친구가 있다. 나는 적이 질투를 느낀다. 흔히는 첫 한두 페이지밖에는 읽지 못하고 둔 책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속삭여 주려던 아름다운 긴 이야기를 다른 사나이에게 먼저 해버리기 때문이다. 가면 여러 날 뒤에, 나는 아주 까맣게 잊어버렸을 때 그는 한껏 피로해져서 초라해져서 돌아오는 것이다. 친구는 고맙다는 말만으로 물러가지 않고 그를 평가까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에 그 책에 대하여는 전혀 흥미를 잃어버리는 수가 많다.

 

 

책에만은 나는 봉건적인 여성관이다. 너무 건강해선 무거워서 안 된다. 가볍고 얄팍하고 뚜껑도 예전 능화지菱華紙처럼 부드러워 한 손에 말아 쥐고 누워서도 읽기 좋기를 탐낸다. 그러나 덮어놓으면 떠들리거나 구김살이 잡히지 않고 이내 고요히 제 태態로 돌아가는 인종忍從이 있기를 바란다고 할까.

 

 

─ <책>, 이태준

 

 

 

 

퇴근길 지하철에서 이 글을 읽다가, 빙그레 퍼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읽고 또 읽는다.

하여, 나는 읽지 않은 책은 빌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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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2-04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이군요..^^ 퍼갈께요~~~

urblue 2005-02-04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조선인 2005-02-04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부분에는 끄덕였는데, "너무 건강해선 무거워서 안 된다"에서 틀려지네요. 전 삐쩍 마른 책이 싫어요. ㅎㅎㅎ

미완성 2005-02-04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 급진파가 아니라 로맨티스트로 들리는데요 *.* 질투를 느끼고 부드럽기를 바라고 o_O 소유해야하고, 에또...누, 누, 누워서 읽기 좋기를 탐내고..*.*
오오....진짜 멋져요.

urblue 2005-02-04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님, 로맨티스트가 맞는 것 같습니다. ㅎㅎ 책 아니라 다른 것에도 낭만적인 면모가 좀 보입니다만, 아내와의 사랑에서는 어땠을까 싶네요.

조선인님, 전 주로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지라 '너무 건강한' 책 싫어요. ㅠ.ㅜ 그저 가방에 쏙 들어가서 어깨에 부담주지 않을 정도면 딱 좋은데 말입니다.

쎈연필 2005-02-04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문이 맞나요? 제 기억으로는 "노라가 되어 돌아 온다" 이런 구절이 있었는데. 그 노라가 <인형의 집> 노라인 줄 안 건 이 글을 읽고 몇 년이 지난 후였다죠. 이따가 집에 가면 확인해 봐야겠네요. 범우사판 무서록은 선집이더군요. 돌베개판이 몽땅 실었어요. 그리고 흔히 비견되는 수필집 김용준의 <근원수필>도 범우사판은 선집이고, 열화당에서 제대로 된 게 나왔죠.

urblue 2005-02-04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문 아닙니다. 제 마음에 드는 구절만 뽑았죠. ^^
"빌려 나간 책은 영원히 '노라'가 되어버리는 것도 있다." 라는 구절이네요.
흠, 그럼 돌베개판으로 다시 사야 하나, 고민 좀 해야겠는걸요. 내일 서점 갈 건데 살펴봐야겠습니다. 감사. ^^

로드무비 2005-02-04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冊'답다.
저는 이 첫구절이 참 좋았는데......
제가 가진 건 깊은샘 것인데 블루님 건 어느 출판사 꺼유?^^

urblue 2005-02-04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진 건 매너리스트님께 받은 범우사판입니다. 저도 첫구절 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