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MBC에서 새로 시작한 주말 연속극을 잠깐 보았다. 날라리틱한 여자가 (그 전 주에도 잠깐 보니 거의 꽃뱀 수준인 듯) 웬 돈 많은 남자 차를 타고 교외로 드라이브를 간다. 아니나 다를까, 한적한 곳에 이르러 남자는 ‘이런 곳까지 따라 왔을 때는 너도 생각이 있었던 것 아니냐’며 달려들고, 여자는 얻어맞아가면서 남자를 뿌리치고 차에서 뛰쳐나온다.
이런 설정은 어느 드라마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건, 여자가 아무리 꽃뱀에 사기꾼 짓을 하고 다니더라도 남자와 자는 것만은 안 한다는 점이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그것만은 안 한다. 절대로 안 한다. 가정 교육을 엄청 잘 받은 건지 (콩가루 집안이라도), 학교에서 그런 것만 배웠는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았어도), 태어날 때부터 도덕심과 순결 의식을 타고 난 건지 (그래도 사기는 치네), 하여간 그렇다.
아니, 사실은 돈 많고 멋진 남자와 결혼하는 법을 제대로 알 만큼 영악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느 날 여자 앞에 멋진 남자가 나타나고, 여자는 그때까지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순식간에 요조숙녀로 변신한다. 돈 많고 멋진 남자는 여자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는다. 사기를 치건 도둑질을 하건, 그 정도는 한 때의 일탈일 뿐이니까. 돈 있는데 또 그러겠어?
그러나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한 건, 더구나 동거 정도라면 절대 용납이 안 된다. 만일 여자에게 그런 과거가 있다면, 저 <애정의 조건>에서처럼, 용서를 하네 마네, 죽네 사네 하는 신파가 필수로 따라붙는다. 온갖 고생을 다 시켰어도 결국 여자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남자는 무지막지하게, 엄청나게, 죽을만큼 여자를 사랑해서 그렇다는 내용이다. 설사 남자가 여자를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른 인물들도, 시청자들도 남자를 비난하지 않으니까. 반면 여자에게는, 거봐, 니가 잘못 살아서 그렇잖아, 그러길래 잘 하지 그랬어, 라는 비난 겸 위로가 던져진다.
아아, 쓰다보니 짜증나네.
<아일랜드>는, 사실 좋은 드라마라고 말하기 어렵다. 일부의 마니아가 있다고 해도, 10%를 넘은 적이 없는 시청률은 이 드라마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주변 사람들을 보니, 대개 1,2회에서 떨어져 나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시청자와의 소통에서 실패했다고나 할까. 어느 분이 지적하신 대로 의미의 과잉도 문제다. 의욕이 넘쳤는지, 절제가 되지 않았는지, 작가가 인물들의 입을 통해 쏟아내는 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게다가 배우들의 연기력 면에서도 썩 흡족하지는 않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시연이라는 캐릭터이다. 에로 배우 시연(김민정)은 유명 감독의 영화에 캐스팅 되기 위해 감독과 잠을 자야 하는 건지 안 그래도 괜찮은 건지를 고민한다. 그렇게 살지 말라는 국(현빈)의 충고에,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서, ‘내 꿈은 청소가 아니라 배우거든? 오늘 하루 드럽게 놀아서 앞이 보인다면 나 그렇게 살라구요.’ 라고 내뱉는다. 영화 촬영 중에는 감독과 잔다. 예쁘다 예쁘다 하는 칭찬에 넘어갔다면서, 자기가 스스로를 속인거라고 말한다. 온갖 나쁜 짓을 다 해도 끝까지 순결한 몸을 지키고 있다가 좋은 남자랑 결혼해서 잘 사는 다른 드라마의 여자들보다 오만 배쯤 현실적이고, 십만 배쯤 더 예뻐 보인다. 시연의 사연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김민정의 연기가 훌륭해서 일 수도 있겠다. 남자 캐릭터도 비슷하다. 시연의 말을 모두 듣고도 시연을 바라보는 국의 눈과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 여자의 과거는 자신의 과거일 뿐, 남자가 용서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태 열심히 드라마를 본 것은 시연과 국 때문이었다. 중아(이나영)는 현실감이 없고, 재복(김민준)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다. 시연을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하고, 어느새 내 입에서는 시연의 대사 ‘지랄’이 맴돈다.
오늘 드디어 마지막회. 에로 천사 시연은 행복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