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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지음, 류한수 옮김 / 지식의풍경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Russia`s War』 리뷰
“소련의 성공은 이 모든 요인들에게 무엇인가를 빚지고 있다. 그 요인들이란 대중의 애국심과 타고난 인내심, 스탈린의 역할, 계획 수립 및 동원의 정치 환경, 그리고 창의성과 노력의 일시적인 만개 등이다. 마지막 요인은 매우 강력해서 대숙청 이후 사회를 괴롭혀 온 복종할 팔자를 타고났다는 암울한 풍조를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전쟁 수행 노력은 단지 자신들이 속해 사는 체제에 반항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만 지탱되지 않았지만, 소비에트 국가, 그 지도자, 당의 산물도 아니었다. 두 요소가 상대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독일의 공세가 부과한 상호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한데 결합되어 불안정하게 공생하면서 작동했다. 대가를 더 적게 치르고, 더 인간적으로 덜 억압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지 않고도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데 의심을 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소련이 치른 전쟁의 비극이었다. 고통받은 한 민족의 희생이 승리를 가져왔지만 해방은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다. 상실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승전의 순간에.”
위 글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의 마지막 문단이다. 특히 마지막 문장들 중 하나가 인상적이다. “고통받은 한 민족의 희생이 승리를 가져왔지만 해방은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 문장이 책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이 말만큼 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소련 인민의 운명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도 없어 보인다.
예상을 뒤엎은 승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의 원제는 『Russia`s War』이다. 한국어판 제목이 주는 인상과는 다르게, 나치 독일의 침공을 이겨내고 승전하기까지의 소련의 전쟁수행과정만을 서술하고 있다. 저자인 리처드 오버리는 책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요약한다.
“소련은 거의 공통된 예상을 뒤엎고 승리를 거두었다. 구소련에서 전쟁 초반에 두드러진 터무니없는 무능과 의미 없는 억압에 퍼부어진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소련 체제는 가장 혹독한 시험을 통과했다. 이것이 역사가들에게 아주 풀기 어려운 문제를 내놓는다. 즉 소련은 전쟁에서 당연히 패했어야만 하는데, 의기양양하고 포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p435)
리처드 오버리는 “아주 풀기 어려운 문제”에 답을 내놓는 데 능숙해 보인다. “대중의 애국심과 타고난 인내심, 스탈린의 역할, 계획 수립 및 동원의 정치 환경, 그리고 창의성과 노력의 일시적인 만개 등”의 승리의 요인들을 전쟁의 일련의 장면들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 그러면서도 단지 설명과 분석에 그치지 않고 전쟁수행과정에서 소련 인민이 “피와 땀”으로 치룬 가혹했던 희생에 대한 연민 어린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이 발휘하는 최고의 장점이다.
인터넷에서 책의 제목으로 검색하면 전쟁사 마니아들이 이 책을 추천해놓은 여러 글들을 읽어 볼 수 있다. 그런데 독소전쟁사를 다루고 있는 일부 마니아들의 관점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들은 마치 ‘전쟁의 이성’과 ‘전략 전술적 합리성’의 관점으로만 독소전쟁을 취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의 과정에서 단지 전쟁수행기구의 일 도구로서만 취급된 일개 군인, 국민들의 생명과 삶에 대한 짓밟힌 권리와 그들 각자가 간직하고 있는, 그러나 그 의미를 전혀 인정받지 못한 서사들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그러면서 영웅화된 전쟁기계들의 행위들에 매겨지는 평가에 대한 관심은 과다하다. 특히 당시 가장 선구적이고 파격적이며 효율적이었던 전쟁기계로 평가받는 독일군에 대한 관심에는 애정의 기운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이 전쟁기계가 어떻게 하여 망가지고 부셔졌는지에 대한 고통 어린 호기심이 독소전쟁사에 대한 관심을 지배하는 듯 보인다.
<진격하는 독일 탱크들. 나치 독일군의 놀라운 성공은 탱크와 비행기라는 새로운 기술이 가진 군사적 가능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최초로 구사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비행기의 종심 타격력과 결합한 집단을 이룬 탱크의 진지선 돌파와 신속한 기동, 종심타격은 적군의 전선 수습, 군대 재전개 능력과 시간까지 일시에 파괴할 수 있었다. 한니발이 기병의 적후방전개능력을 극대화시켜 극적인 섬멸전을 완성했듯이, 나치 독일군에게 한니발의 기병은 기갑군이었다.>
독일 국방군과 전격전에 호의적인 전쟁사 마니아들이 내놓는 독인군의 패배에 대한 진단의 핵심은 “히틀러의 책임”이다. 히틀러의 어리석고 광기 어린 군사작전에 대한 개입, 지도가 독일군의 궤멸과 패주를 낳았다는 것이다. 1941년에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던 레닌그라드를 함락시키는 게 아니라 포위케 함으로써 북부집단군의 전력을 허비한데다가, 결국 소련의 반격을 허용하고 연합국의 소련에 대한 보급로도 터주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또 42년에는 주공을 모스크바가 아니라 남방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스탈린 정권의 붕괴를 노리지 않은 점. 그리고 스탈린그라드에서 6군의 후퇴를 허용치 않아 궤멸시킨 점. 이후 소련군의 반격에 맞서 만슈타인 원수의 기동방어 제안을 수용하지 않고 재앙과 다름없었던 현지방어만 고집한 점 등이 히틀러 비난의 근거들이다.
이러한 진단은 그들에게 내재된 관점의 논리적인 귀결로 보인다. 그들에게 독일 참모부는 전쟁이성과 전략전술적 합리성의 결정체인 두뇌로, 또 독일 국방군은 그 두뇌의 지시를 정교하게 실천하는 강인한 육체로 여겨진다. 따라서 전쟁 패배의 원인은 그 두뇌와 육체의 밖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러나 소련군은 그 원인이 될 수 없다. 독일군보다 우수한 두뇌와 육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군의 신경을 마비시키고 근육을 무력화시킨 독일 내부의 적,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된다. 이러한 시각은 전쟁사 마니아들이 2차 세계 대전의 최고 명장으로 꼽는 만슈타인 원수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말한 변명과 일치하기도 하다.
<왼쪽부터 히틀러, 괴링, 괴벨스, 헤스>
내 생각이 거친 요약이며, 전쟁사 마니아들의 자부심 어린 글들을 지나치게 폄하한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장들에 대해서 리처드 오버리는 이렇게 평가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 독일 장군들은 재빨리 히틀러의 변덕스러운 지도 방식과 장비 부족으로 패배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독일이 전쟁에 진 것이지 소련이 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견해는 사실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1941년에 독일 장군들은 ‘무식한 반(半)아시아’ 전사들인 러시아 인들, 그리고 ‘제정 러시아 장군들……보다 훨씬 덜 위협적인’ 소련 지휘관들을 상대로 한 승리는 (기껏해야 8주 내지 10주가 걸릴) 시간 문제라는 자신감에 차서 출전했다. 이런 판단은 일어난 시건들로 거의 입증되었다. 독일군이 패하려면 독일 지도자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그 어떤 것이 필요했다. 그것은 소련이 경제력을 회복하고, 군대를 개혁하고, 출중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들을 양산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독일은 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련은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했다.” (p435)
즉 리처드 오버리는 1941년의 대패배를 딛고 일어선 소련의 역량과 이를 가능케 한 소련 내부의 혁신을 독일 패배의 참된 원인으로 바라본다. 혁신된 소련군에 독일군은 패배해야만 했다. 그리고 리처드 오버리는 소련에게 가해진 충격과 이로 인한 불가피한 변화를, 위기 앞에 선 초인적인 이성과 합리성의 단선적인 실현 과정이 아니라, 실수와 패배를 반복하며 배우며, 그 교훈을 인민의 희생이라는 토지 위로 고통스럽게 뿌리내리는 모순적이고 총체적인 과정으로서 묘사한다.
역사는 아무리 막대한 영향력을 휘두르는 개인이라 할지라도 그 책임을 모두 질 수 있을 만큼 만만치 않다. 반대로 역사는 그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함께 만들어가는 거대하고도 복잡한 구조물이며, 또한 허물어지고 새롭게 지어지는 영속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쟁을 몇몇 장군들과 지도자들의 머릿속 수읽기 정도로 환원시킴은 역사상에 실존했던 거의 모든 구조와 과정을 생략하는 오류일 뿐이다.
만약 히틀러의 잘못된 지도가 독일군을 패배로 몰아넣었을지라도, 히틀러를 전혀 견제치 못하고 그 전제를 허용한 체제의 취약성과, 이러한 취약성을 낳은 일련의 역사적 국면들에서 나치를 용인했던 모든 이들에게 책임이 나누어지는 법이다.
반대로 소련의 승리를 스탈린 개인의 업적으로 치환하는 개인숭배적 발상에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체제의 성공과 이러한 성공을 낳은 일련의 역사적 국면들에서 과업에 동참했던 모든 사람들을 제치고 스탈린만을 치켜세우는 데 지금 누가 동의하겠는가?
소련 인민의, 인민에 의한 승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 영광을 돌리는 이들은 다름 아니라 이름 없는 자들, 바로 소련 인민들이다.
(독일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킨) “1943년의 승리들은, 비록 희생이 1년 전보다도 훨씬 더 적기는 했지만, 영웅들을 많이 잃는 큰 희생을 치르고 거두었다. 스탈린그라드는 소련군 군인과 항공대원 470,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독일군 진지선은 다시 183,000명을 잃고 돌파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엄청난 수치였다. 두 달 동안의 싸움에서 붉은 군대는 미국과 대영 제국이 전쟁 전체 기간에 잃은 군인과 거의 같은 수의 군인을 잃었다. 소련 인민에게 부과된 희생의 수준은 다른 사회를 작동 불능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소련 인력의 엄청난 대량 출혈은 두 해 넘게 지속되었다. 그 기간 동안 4,700,000명이 죽음을 당하고 수백만 명이 불구가 되거나 상처를 입었다. 이 손실은 1943년의 가을철 공세 무렵에 소련군의 사단 병력이, 비록 대포와 탱크의 대규모 증강으로 강화되기는 했지만, 2,000명으로까지 내려갈 정도로 막심한 것이었다. 전쟁 동안 소련군 부대에서 노동과 자본 간의 대차 대조가 노동의 대량 투입에서 자본의 대량 투입으로 이동했다. 소련이 동부에 무한 공간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서 인력을 빨아들였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신화다. 동부에는 사람보다 공간이 더 많았다. 소련은 오로지 소련 여성의 2/3를 동원해서 공장과 농장을 운영했기에, 그리고 더 이상 그저 무턱대고 병사의 숫자에 의존할 필요 없이 미군처럼 대량 생산되는 무기에 의존할 수 있도록 군을 현대화했기에 살아남았다.” (p289)
<소련과 독일의 전시 생산 비교. 소련은 석유를 제외한 다른 자원의 생산 능력에서 독일에 뒤지는데도 불구하고, 더 많은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대량의 항공기와 탱크, 포는 점차 소련군이 독일군을 압도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했다.>
위 내용의 요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소련이 독일에 결정적인 반격을 가하기까지 막대한 인명피해를 치렀으며, 이는 다른 사회였다면 그 작동을 멈추게 했을지도 모를 정도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소련 사회는 자신에게 가해진 대파괴를 견디어냈다. 소련 인민이 무한에 가까운 인내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죽은 이들의 자리를 대신해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련이 가진 힘이 단지 무한의 인력과 인내심에 불과했다는, 소련군의 승리에 대한 무지에 가까운 통상적인 설명에 대한 반박이다. 소련은 인적 물적 자원의 대량 파괴와 국토의 큰 상실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더 강하게 재생된 것이었다. 소련군은 현대화, 기계화되었고 이에 투입된 군장비들은 새롭게 조직된 경제에서 산출되었다. 그리고 군대가 치룬 가혹한 희생 못지않게 경제의 재조직화 과정에서도 소련 인민은 다른 국민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희생을 감내했다.
“‘총력전’이라는 용어가 어떤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 용어는 틀림없이 독일과의 전쟁이 한창일 때 소련을 묘사하는 말일 것이다. 그토록 많은 국민을 전쟁 수행 노력을 위한 작업으로 내몬 다른 국가는 없었으며, 사람들에게 그토록 과중하고 기나긴 희생을 요구한 다른 국가도 없었다. 후방 국민의 삶은 전쟁이 벌어지는 전선의 고통스러운 싸움을 빼닮은 분투였다. 1943년 이후에 거둔 승리들은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얻었다. 소련을 단일 전시 병영으로 바꾸겠다는 스탈린의 약속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전쟁은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지배했다. (중략)
하루하루의 삶은 농촌에서 가장 가혹했다. 시골 마을은 자기 마을 장정들을 군대에 내주었다. 1944년 무렵에는 집단 농장에서 일하던 남자의 거의 3/4이 사라졌다. 남은 남자들은 병자나 노약자, 또는 전선에서 불구가 된 농부들이었다. 도시와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에 극히 중요한 공급 식량을 생산하는 일 대부분을 러시아 여자들이 했다. 여성이 1941년 농촌 노동력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1944년 무렵에는 그 수치가 거의 4/5였다. 그들의 일상은 혹독하고 비참했다. (중략) 그들에게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릴 농기구와 말이 없었다. 그들은 막대기와 나뭇가지로 땅을 파헤쳐 씨를 뿌렸으며, 여자들이 조를 짜서 쟁기를 끄는 모습이 낯익은 광경이 되었다. 어떤 농민들은 하루의 작업 시간을 마치면 지역 벌목조에 가담해서 여름이건 겨울이건 종종 먼 거리까지 나무를 끌고 가서 도시에 극히 중요한 땔감을 공급해야만 했다. 많은 농민들이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생산한 식량과 땔나무가 부족해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었다. (중략)
도시의 삶은 가혹했지만, 한 가지 중요한 면에서는 견디기가 더 쉬었다. 일을 하면 먹을 것을 얻었다. 완전 고용된 모든 사람들에게 배급표를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 일하지 않으려고 들거나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은 가족에게 얹혀살든지 아니면 굶어 죽었다. 1942년, 전쟁 기간 중 가장 암울했던 수개월 동안 가장 약한 사람들이 죽어 갔다. 이것에는 잔인한 합리성이 존재했다. 일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보상을 받았다. 나머지는 없어도 되는 존재들이었다. (중략) 새로운 노동 조건이 정해졌다. 주당 66시간 일하고 한 달에 하루 쉬는 것이 표준이 되었다. 휴가는 중지되었다. 초과 근무 의무제가 도입되었다. 공장 노동자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고 많은 공장 노동자들이 작업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기에 충분할만큼 나이가 들기를 기다리는 소년들이었다. 과중한 노동 시간, 기껏해야 기초 수준인 공장의 안전 기준, 가혹하게 부과되는 작업 기준량은 한결같이 그들의 건강을 해쳤다.” (303-5)
<집단농장의 점호 장면. 자신들의 두 팔과 막대기가 여성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생산수단이었다.>
소련이 발휘한 힘은 인력의 규모가 아니라, 한정된 인력에 지어진 무한한 요구의 감내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소련 인민의 희생을 온전히 열정적이고 자발적이었던 것으로 낭만화화지 않는다. 그토록 영웅이었던 희생은 소련 인민 스스로 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 체제가 인민에게 가한 억압과 테러에 의해 상당부분 지탱되었다. 책을 읽다보면 아연실색할 정도로 스탈린주의 체제의 내부를 향한 테러가 멈추지 않고 열거된다. 과장되고 날조된 태업과 반역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 수많은 살상을 낳은 소수민족의 집단이주, 막대한 규모의 유형과 노동수용소 등.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 그치지 않고, 억압과 테러에 의한 동원의 과정에서, 단지 동원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요소들이 체제를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싸움터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피난민과 이주민이 흘러들고 먹을 것과 생필품을 구하려고 끊임없이 발버둥치고 노동 관리 체제가 가혹함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후방은 계속 굴러갔다. 그것은 서구에서 흔히 국가 계획이라는 서툰 손에 지배되기에 단순하고 취약하다고 간주된 체제로서는 비상한 집단적 성취였다. (중략) 천천히 더 확정적이고 중앙 집권화된 계획 체계가 수립되었다. 이 체계는 전시 조직화라는 특수 상황이 쉽사리 적응할 수 있음이 입증된 평시 경제 체제에 기반을 두었다. 여러 차례의 5개년 계획으로 관리들과 생산자들은 전국 차원의 계획과 자원 할당에 익숙했다. 침공 뒤에 존재한 상황을 고려할 때, 다른 어떤 체제가 식량이나 무기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계획이 완벽하게 작동하지는 않았다. (중략) 그러나 식량, 물자, 노동력이 심하게 부족한, 쭈그러든 경제가 더 번영하고 생산성이 높아 보이는 적보다 더 많은 생산을 해낼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은, 모든 것을 감안해 볼 때, 오로지 희소 자원과 그 자원 할당을 통제하는 힘을 유지하는 소비에트 국가의 해당 능력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p308)
전쟁을 지휘했던 소비에트 국가가 단지 억압적이기만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당과 국가는 전쟁에서 생존하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잠재된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국가기구들 중 특히 소련 군대의 혁신은 놀라운 것이었다.
(1944년의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소련군이 독일의 중부 집단군을 쳐부수었다는 사실은 전쟁 초반 2년이 준 교훈을 얼마나 잘 배웠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아마도 전쟁 동안 실시된 소련군 작전술의 가장 훌륭한 사례였을 것이다. 그 전역은 1930년대 초에 투하체프스키가 최초로 윤곽을 그린 집단을 이룬 항공기와 장갑 무기의 ‘종심 작전’과 아주 흡사했다. 먼저 6월 19일 밤에 파르티잔 부대들이 독일군의 교통망에 체계적인 공격을 개시해서 운송 목표물 1,000군데에 맹타를 가하고 독일군의 보급 체계와 재전개를 불능으로 만들었다. 이 뒤에 엄청난 강도를 지닌 항공 공격이 이어졌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기념일 전날인 6월 21일에 소련 폭격기들이 공조해서 독일군의 후방 지대에 항공 타격을 개시했다. (중략)
드디어 6월 23일에 전면 공격이 독일군 돌출부 북쪽에서 시작되어 다음 이틀 동안 남쪽으로 천천히 옮겨갔다. 모종의 공격이 있으리라는 징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방어자들은 자기들을 치는 것의 규모와 강도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엇이 닥치고 있는가를 독일군에게 경고했을지도 모르는 통상적인 일제 포 사격이 총공격을 위해 줄어들자, 보병, 탱크, 포병이 어두음을 틈타 한꺼번에 전진했다. (중략) 독일군의 방어가 허물어져서 뒤따르는 기계화 부대가 그 틈새를 벌리고 다음 목표물로 이동할 공간을 남겨 놓았다. 이번에는 소련 지휘관들이 독일군의 저항 고립 지대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진지선이 공고해지기 전에 돌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1939년과 1941년 사이에 독일군이 구사해서 매우 놀라운 성공을 거둔 바로 그 전술이었다.” (p326-7)
소련군이 도리어 독일군을 상대로 전격전을 벌일 만큼 변모했던 것이다. 소련군의 현대화는 손쉬운 모방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소련 사회가 전쟁의 고통을 감내하며 쥐어짜내고 성취해낸 모든 결실들, 참패의 연속 중에서 고통스럽게 배운 교훈들의 극적인 종합, 완성이었다. 전쟁 초기에 막대한 규모의 손실은 입은 붉은 군대를 보충하기 위해, 후방에서의 전쟁수행을 위한 핵심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남자들이 징집되었다. 그리고 남겨진 농장과 공장에서 남자들을 대신해 노동력을 제공한 건 여자와 아이였다. 이들이 지탱한 소련의 경제는 독일보다 적은 경제자원을 가지고서 더 많은 무기를 군대에 제공했다. 이를 위해 후방에 남겨진 이들은 단지 먹고 일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을 제외한 모든 소비품을, 또 모든 사적인 시간을 희생했다. 이 정도의 동원과 사회재조직은 소련 정치 경제체제에 고유한 능력의 발휘를 제외하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이 국유화된 소유제도와 국가가 자원들을 할당하고 운용하는 중앙집중식 계획경제, 국가에 순응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조건, 하나의 당과 한 명의 영도자만이 존재하는 일괴암적인 국가권력, 이것들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었다. 또한 국가기구들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절대시하는 국가이성의 의지를 집행하는 데 자국민에 대한 테러조차 서슴없이 자행할 정도로 일사불란함을 흔들림없이 유지했다. 이처럼 가혹한 조건에서도 인민으로 하여금 계속 싸우고 일하게 하기 위해 소련 당국은 독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자는 애국심에 호소했다.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계급투쟁이라는 소비에트 이념보다는 민족과 전래의 토지를 지키자는 전통적인 애국적 호소가 인민의 희생을 유지하는데 더 유효했다. 그리고 소련 인민은 자신에게 지어진 운명을 감내하기 위해 동유럽 봉건주의의 오랜 지배에서 길러진 특유의 숙명론적 심성에 기대었다.
<어머니-러시아가 그대를 부른다!>
그리고 소련군 지도부는 쥐어짜낸 인력과 물자를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운용하는 법을 깨닫고 적용했다. 폭격기들과 탱크로 전략단위를 이루어 신중하게 선정된 지점들을 집중적으로 타격해 적을 마비시키고 파열구를 냈다. 그리고 기계화된 운송수단으로 병력과 장비를 실어 나르는 부대가 뒤를 따라 적역을 가로지르는 회랑을 만들어내고 넓혔다. 마지막으로 닦여진 회랑으로 기동한 보병사단이 남겨진 적을 포위하고 섬멸했다. 작전은 수천킬로미터에 걸쳐진 전역에서 계획에 따라 정교하고 신속하게 이뤄졌다. 군대의 기능이 분화하고 각 부대는 서로 유기적으로 기능했다. 전투기와 탱크를 모는 조종사들, 수리하는 정비사들, 새로운 개념의 작전을 계획하고 지휘하고 수행하는 장교들, 이들을 신뢰하며 현대전을 수행하는 병사들이 빠르게 길러지고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독일군을 어떤 운에도 기대지 않고 압도할 정도로 능숙해졌다.
영웅을 기다린 가혹한 운명
가장 중요한 점은, 승전의 조건들이 위로부터의 강제와 인민의 순응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동력은 그 반대의 사실로부터 비롯한 것이라고 리처드 오버리는 말한다.
“원시적이라고 비난을 받은 한 체제가 보여 준 현대적 능력은 그저 NKVD(내무 인민위원회의 약자로 국가테러기구)가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사실, NKVD가 개입한 곳에서 나타난 결과는 전쟁 수행 노력을 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저해하는 것이었다. 소련식 계획 체제는 그 관료적 이미지에 어긋나는 유연성과 조직력을 보여 주었으며, 엄청난 다수 국민을 단일한 공동 목표에 동원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과시했다. 전쟁이 끝난 뒤 낡은 버릇이 되돌아왔다. 당도 관료제도 사회주의 낙원을 계획할 수 없었다.
이 명백한 역설을 설명해 주는 해석이 적어도 하나는 있다. 전쟁 동안 비상 사태로 수많은 소련 관리, 경영자, 군인들이 수동성의 분위기,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났다. 한 퇴역 군의관은 1941년 이후에 사람들이 어쩔 도리 없이 여러 경우에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맡아야만 했던’ ‘자연 발생적 탈스탈린화’ 시기가 왔다고 회상했다. 마침내 1942년 가을에 일선 정치 기관원이 강등되고 장교들이 매 시간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점검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행동할 수 있었을 때 군에서 개인의 책임감이 고양되었다. 1990년 승전 기념일에 소설가이자 참전 용사인 뱌체슬라프 콘드라티예프는 ‘마치 오로지 그대만이 러시아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다. 그런 느낌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전쟁이 개개 군인들에게 커다란 책임을 부여했다고 회상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런 도취적인 의무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콘트라티예프는 이어서 ‘내가 있든 없든 만사는 어느 때처럼 굴러간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후방에서도 전쟁이 가져온 해방감이 존재했다. 레닌그라드 봉쇄에서 살아남은 시인 올가 베르그골츠는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자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썼다.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었기에 그런 자유를 자극했고, 그 자유는 자연 발생적인 융통성, 삶의 강렬함, 섬뜩한 극기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p437)
자유와 책임의 자연발생적인 확대에 뒤따른 개인의 주체화가 체제 아래서 숨죽여 있던 힘을 활성화시켰다는 논지이다. 이러한 논지의 타당성을 따져볼 수 있는 경험자료의 제시는 부족해 보인다.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체제가 자국민에게 저지른 테러들에 대한 서술에 비해, 당과 국가 내부에서 또는 그 밖에서 자발적이고 독창적으로 수행된 전쟁수행노력에 대한 서술은, (스탈린의 용인 하에) 스탈린의 간섭에서 벗어나 성공적인 전략들을 입안했던 소련군 사령부에 대한 부분 정도를 제외하고는 일화적이고 빈약하다. 그리고 사회 전체적으로 이 모순적인 현상들, 즉 한편에서는 억압과 테러가 다른 한편에서는 창의성과 노력의 만개가 어떠한 모습으로 공존할 수 있었는지, 그 창의성과 노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리처드 오버리는 충분히 말하지 않는다. 즉 그의 마지막 명제는 일종의 가설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개개인에게 자율과 책임이 주어질 때가 그렇지 않은 때보다 더 큰 에너지와 열정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는 바이다. 의사결정이 상부로 집중될수록, 또 하부의 재량권이 축소될수록 하부는 상부의 판단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게 되며, 상부는 숱한 자잘한 것들까지 일일이 보고받고 검토하고 판단해야 하는, 자기 능력 이상의 일로 과부하에 걸린다. 이에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는 변해가는 현장에 대해 대체로 무지한 채로, 일률적이고 과거 결정을 반복 참조하는 착오적인 것이 되어간다. 그러면서 전체가 활력을 잃어가고 무기력해져간다.
비극적인 것은 전쟁이 끝난 이후로 소련 사회가 실제로 화석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스탈린주의가 다시 소련 사회를 뒤덮기 시작했다. 지배의 사슬이 사회를 옮아 매고, 체제는 늘어난 사슬의 무게를 못 이기며 침체로 빠져들었다. 승리를 가져다준 인민의 희생을 배반하고 다시 족쇄를 채웠던 체제는, 그러나 두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어찌 되었던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인류사 최악의 재앙이었고, 그 중 대부분의 피해가 독소전쟁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조차 소련 인민이 겪은 참화를 거의 설명하지 못한다. 소련 인민 앞에 놓인 직접적인 위협은 무엇보다 나치 독일이었다. 히틀러가 동방에서 일으킨 전쟁은 클라우제비츠 식의 정치의 연속 같은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한 인종을 전래의 토지에서 몰아내고 노예화시키고 절멸시키기 위한, 총과 포가 존재하는 가장 확실한 목적-살상을 한 점의 의심없이 실현한 학살이고 파괴였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을 위해 슬라브 인종이 거주하는 우랄 산맥 서편의 땅과 자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새로이 건설될 동방의 식민지에는 게르만 민족을 위해 봉사할 노예화된 인구 외의 슬라브인들은 절멸되거나 시베리아로 내동댕이쳐져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동방계획을 독일군이 소련 영토로 진주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실행에 옮겼다. 유태인과 공산당원을 골라내 총살에 처하고 가스실로 보냈고, 수백만 명의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해 독일의 공장에서 혹사케 했다. 나치의 식량과 물자 징발은 피점령민들을 고의로 기아로 내몰아 절멸시키려 했던 것이 진지하게 고려됐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될 정도다. 이처럼 자신들의 존재를 완전히 지우려고 온 나치 독일 앞에서 소련 인민에게는 흥정의 여지가 없었다. 앉아서 죽던지, 아니면 싸우다 죽던지 뿐이었다.
그런데 총부리가 앞에서만 겨누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무제한적 희생을 요구하는 스탈린주의 체제 역시 소련 인민에게는 사실상 또 다른 위협이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싸우고 일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나 전장으로, 공장으로, 토지로 내몰렸다. 어쩔 수 없는 전시상황이었다고는 하나, 이 체제는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자국민들을 혹독하게 취급했다. 개개인들은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자신들에게 지어진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여기에 의문을 표하는 순간, 그는 고문실로 끌려가거나 총살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일상적인 테러의 위협이 소련 전시사회를 지배했다.
소련 인민은 한 편에서는 절멸과 노예화의 대상으로, 다른 한 편에서는 국가이성의 무자비한 실현의 도구로 여겨졌다. 어느 곳에서도 그들은 편히 누울 수 없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위대했던 건 모든 걸 내려놓고 포기할 수 있었던 그 혹독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용기를 발휘하고 결의에 찬 투쟁을 시작하고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군이 레니그라드와 모스크바 앞에까지 이른 1941년) “9월 중순 무렵의 분위기는 침울하고 절망적이었지만, 모스크바의 공황 같은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그들이 해야만 하는 희생을 상기해 줄 필요가 없었다.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증언에서 소개 대상이 된 사람들 중 다수가 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린이들은 가족과, 아내는 남편과 함께 남았다. 주민들의 공포와 나란히 쥬코프가 훗날 보통 사람들의 ‘용기, 인내심, 강인성’이라고 기억한 것 또한 함께 있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1941년 9월은 평생 기억에 남았다’고 회상했다.” (p150)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 가는 동안 시 당국은 조직화된 생활 비슷한 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공장은 가능한 한 오래 계속 가동해서, 시 방어자들을 위한 장비를 생산해 냈다. 7월부터 12월까지 공장들에서 탱크와 전투용 차량 1,100대 이상, 박격포 10,000문, 포탄 3,000,000발이 생산되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굶주리는 레닌그라드 노동자들이 모스크바 방어에 사용할 대포와 박격포 1,000문을 만들어 냈고, 이 무기들은 독일군 진지선을 넘어 레닌그라드 밖으로 공수되었다. 그 유명한 키로프 공장은 전선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공장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잠을 잤고, 작업 시간은 독일군의 소이탄으로 난 불을 끄거나 공장 방어 훈련을 하느라 중단되어 있었다. 공장들은 더 궁색한 가정생활에서 벗어나 먹을 것, 동지애, 심지어는 인정마저 발견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었다.” (p154)
“저널리스트 앨리그잔더 워스는 1944년에 우크라이나의 소도시 우만의 시장으로 임명된 중년의 러시아 인 파르티잔 대원과 대화를 나누었다. 피부가 창백하고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넘긴 단신의 자하로프 시장은 자기를 찾아온 손님에게 고생스러운 파르티잔 생활을 설명해 주었다. 그가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작은 무리였고, 그들은 비니차 숲에 들어가 숨었다. 무기가 빈약해서 그들은 계속 큰 피해를 입었다. 자하로프는 1941년 7월에 부상을 입었고, 독일군에게 사로잡혔다. 탈출을 한 그는 우만 밖의 파르티잔과 합류했다. 그는 1942년에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고, 게슈타포는 그를 혹독하게 고문하고 때리고 등을 부러뜨렸다. 그는 다시 숲 속으로 사라졌고, 숲에서 파르티잔 대원들은 그를 그저 ‘미챠 아저씨’라고만 알았다. 거기서 그는 철도 공격을 주도하는 한편, 그의 부대는 독일에게 고용된 카작에게 시달렸다. (중략)
저항은 이해하기가 더 쉽지 않다. 저항에는 엄청난 위험이 따랐으며, 파르티잔은 소련의 전쟁 수행 노력의 가미가제였다. 파르티잔에 가담한 사람들 일부는 소비에트 체제가 복귀했을 때, 또는 복귀할 경우에,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가담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은 순수한 신념에서 파르티잔에 가담했다. 자하로프 시장은 자신의 선택을 ‘내 나라가 잘되라고 일한 것’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자국민에게 그같이 무거운 짐을 부과한 체제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정치적 이상주의에 회의를 품기 쉽지만, 그 이상주의를 내버려서도 안 된다. 소박한 애국심은 많은 파르티잔의 말과 행동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며, 우리에게는 그것을 무시할 이유가 없다.” (p211-2)
<처형당하는 파르티잔 여성 대원>
“1942년과 43년의 소련의 군사적 소생은 난타당한 공업 경제의 회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소련의 전쟁 수행 노력은 오직 1941년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은 지역에서 기계, 설비, 인력이 극히 경이로운 대탈출을 했기에 구원을 받았다. 독일 공격 이틀 뒤 계획 입안자와 관리 85명의 직원을 가진 소개 위원회가 세워졌고, 그 책임자는 당에서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라자르 카가노비치였다. 그는 그 심각한 비상시국에 대처하지 못하고 7월에 노동조합 지도자 시베르닉으로 교체되었다. 소개는 이례적인 어려움 속에서 이루어졌다. 항공기의 공격을 당하면서, 몇 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에 독일군이 있는 상황이 자주 빚어지는 가운데 수천 명의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개미처럼 공장에 달라붙어 기계를 뜯어내고 설비와 주요 물자를 가장 가까운 철도 수송 종점으로 운반했다. 여기서 동쪽으로 장거리 여행을 하기 위해 종종 인력을 이용해서 무개 화차 위나 유개 화차 안에 짐을 실었다. 가능한 곳마다 각 열차는 한 공장과 그 공장 노동자를 통째로 운반했다. 노동자들은 줄지은 침대와 난로 하나가 갖추어진 화차에 빽빽하게 들어찼다. 우랄 산맥, 카자흐스탄, 또는 시베리아에 있는 목적지에 이르러 그들은 화차에서 쏟아져 나와 작업장을 재조립하는 고된 일을 시작했다.” (p235)
보통 사람들이 발휘했던 영웅적 행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더, 더 말해져야 한다. 이것들이 독일에 맞서 소련이 발휘했던,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던 전생수행능력의 진정한 비밀이다. 소련 인민은 국가기구가 파괴되고, 허물어지던 절망적인 패주의 상황에서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며 스스로 저항을, 반격의 조건을 조직했다. 동원과 테러만으로 그들의 분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소련 인민 사이에서 스스로 생겨난 노력들이 국가가 부과하여 이뤄내려 했던 어떤 것들보다도 더 적절하고 강했음이 틀림없다. 소련 인민의 자생적인 노력과 희생이 없었더라면 소비에트 국가는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두들기던 1941년 그 순간에 포화에 녹아내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 인민의 영웅적인 투쟁의 귀결은 씁쓸한 것이었다. 모순적이게도 자신들을 억압해오던 체제를 최대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 억압적 성격을 전혀 바꿔내지 못한 채로. 소련 인민 위에 군림하던 운명은 그 가혹함을 거두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