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철학자들 -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의 생애, 시대와 아이디어
로버트 하일브로너 지음, 장상환 옮김 / 이마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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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 : 자본주의, 비전

 

경제학 분야에서 폴 새뮤얼슨의 경제학 교과서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로버트 하일브로너가 쓴 세속의 철학자들이라고 한다. 경제학 교수들이 강의에 사용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독자들의 흥미에 힘입어 No.2에 오른 세속의 철학자들은 이 분야에서는 보기 드물게 어렵지 않고 재밌는 책이다. 그러면서도 생각의 주름이 깊게 파이는 진중함도 함께 묻어나는데, 이는 자본주의비전이라는 두 단어를 가지고서 경제사상들을 요리하는 하일브로너만의 개성에서 비롯한다. 두 단어에 대한 그의 관점을 이해한다면 하일브로너식 만찬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란 무엇일까?

 

산고의 진통은 지나고 시장체제가 탄생했다. 이제부터 생존의 문제는 관습이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자유로운 행동에 의해 해결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인간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시장뿐이었다.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 후반까지는 그렇게 광범위하게 쓰이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라는 불리는 것이다!” (위 책, 46p)

 

여기서 하일브로너가 강조하는 게 자본주의가 다른 질서를 대체하면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란 긴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지 고작 몇 백 년밖에 되지 않은 새로운 사회질서이다. 인류가 그간 경제사회(, 생존하기 위해서 인간은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경제는 사회적이고, 사회적인 것은 경제적이다)를 조직해온 방법은 세 가지뿐인데, 바로 관습과 명령, 시장이다. 이중 시장체제가 가장 최근에 발명돼 현대사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원리에 대하여 그 의미와 전망에 대해 많은 이들이 질문하고 탐구했던 건 당연했다. 자본주의와 함께 이에 대한 비전도 탄생했다.

 

국부론이 발표된 이후 사람들은 새로운 눈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이 행하는 일이 전체 사회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전체로서의 사회가 멀기는 하지만 분명히 가시적인 목표를 향해 당당한 발걸음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새로운 비전이 나타난 것이다.” (위 책, 52p)

 

비전의 개념은 자본주의에 대한 하일브로너의 이해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자본주의가 자연적으로 처음부터 주어진 게 아니라 역사 가운데서 태어나 성장해온 체제라면, 이 체제도 역사와 같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어쩌면 다른 모든 것처럼 끝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전은 바로 역사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미래와 이 미래를 향한 변화에 관한 지식체계이다. 아담 스미스로부터 마르크스, 케인스, 슘페터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세속 철학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독창적인 비전들을 인류에게 제시해왔다.

 

신고전파 경제학 비판

 

세속의 철학자들은 단순한 경제사상사가 아니다. 자본주의 비전이 여러 경제학자들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역사는 자연히 비전이 사라져버린 요즘 경제학에 대한 매서운 비판으로 변모한다.

 

내가 보기에 더욱 깊고 의미심장한 변화는 경제학의 비전-바로 경제학의 진수-으로 새로운 개념이 더욱 많이 등장하고 이에 상응해서 다른 훨씬 오래된 비전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비전은 과학이며 사라지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이다.” (위 책, 416p)

그렇다면 우리가 경제학을 과학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는 것에 환호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위 책, 419p)

사회에는 자연의 기정사실과 비교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질서 속에는 권력과 복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우리는 우리의 설명이 자연의 해명에서 추구하는 객관성을 충족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자연의 작동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를 사회의 작동에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이러한 가짜 과학적인 견해가 경제학의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세속철학으로서는 종말을 기록하게 될 것이다.” (위 책, 421p)

 

경제학을 과학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의지하는 수단들 중의 하나가 수학이다. 그런데 복잡다단한 경제현상을 정확한 수식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인간행동의 규칙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간행동에 규칙적인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등호를 가운데에 둔 양편 사이의 일정한 양적 관계도 성립할 수 없다. 그리고 신고전파 경제학이 인간행동에 일정한 패턴을 부여하기 위해서 도입하는 게 경제적 인간으로서 개인은 주어진 예산 하에서 효용을 극대화하는 계산과 선택을 변함없이 한다는 가정이다. 물론 이외에 다른 많은 전제에도 의존한다. 이에 대해 하일브로너가 비판하는 점은 경제적 인간이 함축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과도한 단순화이다. 인간은 경제학자들의 기대대로만 행동하지 않는다. “인간은 최후의 순간에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능력을 가졌다.”(위 책, 420p)

 

이어서 그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제시하는 매끈한 사회질서 역시 부정한다. ‘우리는 경제적 인간으로 타고났다는 신고전파의 전제에서 수학적으로 빈틈없이 도출되는 결론들은 인간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가정 자연적인 질서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는 각자의 이기심과 계산만 있을 뿐,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을 얽매고 속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의 현실은 결코 평평하지 않다. 누군가는 어떤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빠르게 부를 늘리고, 다른 집단은 계속 제자리이거나 뒷걸음친다. 현재를 지양하는 운동이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반면에 신고전파의 안락한 세계 속에서는 더 나은 미래를 밝히고 숭고한 이상을 위해 분투할 필요도 없다. 인류는 자신이 닿을 수 있는 최선을 이미 획득했다. 미래는 바로 현재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이 더 이상 비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경제학이 줄 수 있는 건 없다. 자본주의와 변화는 분리될 수 없고 진정한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는 힘을 이해하려고 한다.

 

나의 대답은 예측 가능한 장래에 우리들의 집단적 운명을 결정하게 될 자본주의 무대를 우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경제학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위 책, 422p)

경제 분석은 그 자체로 우리 미래의 길을 밝힐 횃불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경제적 비전은 자본주의 구조가 그 동기를 확대하고, 유연성을 높이며, 사회적 책임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위 책, 424p)

 

하일브로너식 비판의 한계

 

하일브로너가 신고전파 경제학과 자본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스스로를 오랜 세월, 민주적 사회주의의 이념과 목표에 대해 찬성해온 나”(위 책, 422p)로 밝히지만, 자본주의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진보를 전망한다는 점에서는 온건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의 전망이 근본적인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그가 가진 자본주의개념에서 비롯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를 시장체제 즉, 자유로운 이익추구와 이의 시장을 통한 조정 메커니즘을 거의 동일시한다. 그리고 시장과 관습 및 명령을 서로 대비시키는데, 시장은 경제적 자유에 기초하나 관습과 명령은 사회정치적 속박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경제체제도 세 가지-각각 관습과 명령, 시장에 근거한다-로 분류한다. 그런데 이런 분류 속에서는 당연히 시장체제 이외의 대안이 생겨날 수 없다. 하일브로너가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결국 뛰어넘지 못하는 지점이다.

 

관습과 명령, 시장이라는 삼분법에는 분명 단점과 한계가 있다. 먼저는 이 단어들이 경제적인 역사시대를 나누기 위함보다는 한 경제체제의 서로 다른 차원들을 의미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 역사적 사례들을 검토해보면 뚜렷해진다.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에서 번성했던 노예제 경제가 한 예인데, 하일브로너의 분류에 따르면 노예제 경제는 백인 농장주가 지배하는 명령체제일 것이다. 하지만 남부 노예제 경제가 당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분리돼서는 시작부터 파악될 수 없다는 점 즉, 영국 면산업에 대한 원료공급지였으며 면화수출 덕분에 노예제가 번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시장에 의해 규제되는 사회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 또 15~16세기 동유럽에서의 재판농노제를 들 수 있다. 서유럽에 대한 곡물수출에 자극되어 동유럽에서 도리어 농노제 착취가 더 강화된 것이다. 이처럼 시장이 바깥에서 자극했던 사례들과는 반대의 경우도 다양하다. 서양중세의 대부분의 시기는 봉건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상업과 도시가 성장해온 역사였다. 이런 역사적 경험들은 명령(과 관습)이 시장과는 원리상 모순적이면서도 실제로는 서로를 보완, 강화하는 관계를 맺어 왔음을 증명한다. 이런 관계는 단순한 이분법적, 삼분법적 사고방식으로는 사유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사례들보다 정말 중요한 건 관습과 명령, 시장이 바로 자본주의의 서로 다른 차원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기업과 소비자의 관계, 기업과 기업의 관계 등 자본주의의 상당히 많은 영역이 시장에 속한다. 이런 측면에서 자본주의는 분명 시장사회이다. 하지만 기업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곳은 명령이 지배한다. 만약 기업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사적 이익에 따라 자유로이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 기업은 곧 문 닫게 될 것이다. 기업이 성립할 수 있는 건 노동자들이 임금을 대가로 제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양도하기 때문이다. 소유주와 경영자들은 양도받은 통제권으로부터 명령을 시행한다. 그런데 기업 내부는 명령이 지배, 외부는 시장이 지배한다는 식으로 단순히 구분해서도 안 된다. 명령과 시장은 서로에게 침투하고, 서로를 제한한다. 기업 내부에서 벌어지는 명령의 다양한 내용과 방식들은 시장에 의해서 그 성과를 평가받고 살아남거나 퇴출된다. 반대로 새로운 명령체계가 시장의 작동방식을 수정하기도 한다. 포드주의가 확산되면서 소비 주도의 성장 및 시장여건이 무르익은 것처럼 말이다. 한편 관습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인데, 경제적 선택의 기저에는 쉬이 변하지 않는 생활양식과 문화, 관례 같은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선택이 합리적 계산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가정만큼 비현실적인 것도 없다.

 

이상의 논의를 간추려보면, 자본주의를 딱 잘라 시장체제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시장 말고도 자본주의에는 명령과 관습 같은 다른 차원들이 무시할 수 없는 힘과 크기로 존재한다. 시장이 평평한 세계라면 실제의 자본주의는 수평과 수직으로 짜인 입체적인 공간이다. 2차원의 세계는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지만, 3차원의 세계는 이리저리 돌려보아야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보다 종합적이고 예리한 관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를 풀기에는 마르크스가 가장 적합해 보인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특수한 사회체제 ~ 는 역사적 힘(인클로저 운동 같은)을 통해, 아무런 자산도 갖고 있지 못한 까닭에 자신의 노동력-순전히 일할 수 있는 능력-을 파는 것 외에는 살아갈 다른 방법이 없는 노동계급을 창조한 사회, 곧 자본주의이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경제학 자체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종의 사회분석을 창안했다.” (위 책, 215-6p)

 

더 읽을거리

 

세속의 철학자들를 읽고 신고전파 경제학과 자본주의를 보다 더 철저히 비판하는 독서에 흥미가 인다면, 아마도 아래의 책들이 적당할 것 같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에 불만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강의, E. K. 헌트

자본주의 이해하기, 새뮤얼 보울스, 리처드 에드워즈, 프랭크 루스벨트

자본론, 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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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양장) - 세계대침체의 원인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사회과학연구총서 39
앤드루 클라이먼 지음, 정성진.하태규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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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생산의 실패(2012)2008년 공황과 1970년대 이래로 세계경제의 상대적 정체를 이윤율 저하의 관점에서 분석한 마르크스 경제학 책이다. 저자인 앤드루 클라이먼은 시점 간 단일체계 해석(TSSI)’의 주창자이며, TSSI자본론 3에서의 이른바 가치에서 생산가격으로의 전형문제에 대한 백년이 넘는 긴 논쟁에 획기적인 해법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책에서 만난 인상적인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첫째는, 신자유주의론 비판이다. 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공황과 침체의 원인이라는 좌파의 통념에 대한 비판이다. 흔한 분석틀에서 신자유주의란 한 마디로 1%를 위한 모듬 정책이다. 이들 정책들은 99%를 수탈하여 1%를 더욱 부자로 만들어줄 뿐이고, 이로 인한 심각한 양극화 때문에 경제가 절뚝인다는 게 널리 알려진 주장의 요점이다. 이런 분석은 과소소비론과 일맥상통한다. 과소소비론이란 부족한 소비수요가 경제위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이론이다. 금융자본의 수탈이나 노동착취의 강화로 99%의 형편이 더 열악해지고 있는 현상에서 위기의 주된 원인을 찾아낸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 과소소비론의 논리적 결론 즉, 노동계급의 더 많은 소득과 소비가 경제를 회복시킨다는 아이디어는 노동계급의 이익과 자본주의 경제의 안정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생각에 기반을 둔 투쟁과 운동은 실패와 반동을 부른다.

 

이러한 논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둘째) 주장은 우리가 진정으로 싸울 대상이란 나쁜 자본주의 같은 게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 자체라는 것이다. 클라이먼이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는 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법인부문의 이윤율 추이이다. 이윤율이란 투자한 자본과 이로부터 발생한 이윤 사이의 비율이다. 벌어들인 이윤을 소비하지 않고 생산적으로 투자한다면 자본 총액이 늘어날 것이다. 더 많은 자본은 대개 더 많은 생산과 고용, 소득을 의미한다. 즉 경제가 성장한다. 그리고 이윤율이 높을수록 경제는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각종 통계로부터 추출해낸 자료에 의하면, 1970년대에 이윤율이 대폭 하락하고, 그 이후로 현재까지 거의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이런 L자형의 이윤율 곡선은 다음과 같은 명제들의 강력한 증거이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80년대 이전에 이미 미국경제의 상대적 정체가 시작됐다. 70년대 경기후퇴는 단지 케인즈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대침체의 시작이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이윤율이 회복된 적이 없다. 긴 침체와 빈번한 공황의 구조적 원인은 바로 이윤율 저하이다.

 

그렇다면 이윤율이 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마르크스가 정식화한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을 정교한 통계처리와 함께 내세운다. 자본주의에서 상품 가치는 궁극적으로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제되기 때문에, 자본가가 비용 절감을 위해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는 기술혁신은 결과적으로 상품가치를 떨어트려 이윤율을 낮춘다. 노동생산성 향상과 비용 절감 노력이 이윤율 저하로 귀결된다는 아이러니와 반()직관성이 -직관적으로 비용이 줄면 이윤은 는다- ‘법칙의 특징인데, 이점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법칙을 부정하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클라이먼은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어제와 오늘을 발견한다. 또한 자본이 자본이기 위한 조건(비용절감 경쟁)과 경제위기 사이의 필연에 대한 확신도 건져 올린다. 물론 다음과 같은 확신도 가능해보인다. 우리가 자본에게 모든 걸 양보할지라도 체제를 수렁에서 건져낼 수는 없다. 자본의 한계는 바로 자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은 스스로를 파괴하면서만 다시 축적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클라이먼의 결론은 이렇다. “전면적인 자본가치의 파괴는 수익성의 회복과 새로운 호황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지만, 1930년대에 자본주의의 자기교정 기제는 너무 허약해서 그런 호황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또한 회복은 대규모의 국가 개입과 세계대전의 파괴성을 필요로 했다. 이번에도 회복에 이르기 전에 우리가 혼돈, 파시즘 혹은 군벌주의로 빠져들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상이 끔찍하다면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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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회사의 주인이 되었나 - 세계 10억 인구의 삶을 바꾼 공생의 대안경제 시스템
마조리 켈리 지음, 제현주 옮김 / 북돋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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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10억 인구의 삶을 바꾼 공생의 대안경제 시스템이라는 부제를 단 그들은 왜 회사의 주인이 되었나는 근래의 협동조합 열기에 힘입어 나온 책들 중의 하나이다. 협동조합 관련 책들을 거의 읽어보지 않아서, 이런 종류의 책들 중에서 이 책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쉽게 읽히고 유익했다.

 

  먼저는 주식회사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다. 주식회사란 기업에 대한 소유권이 유가증권으로 분할되어 증권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을 의미한다. 소유권이 주가형태로 가격을 갖고 거래되기 때문에 소유자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을 당장 부자로 만들어줄 주가상승을 우선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주주들의 요구(즉 높은 주가)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그리고 신속한 이윤 확대가 기업의 지상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기업은 돌이킬 수 없이 탐욕으로 물든다. 증권거래소에 상장되고나서는.

 

  저자인 마조리 켈리가 흥미로운 건 주식회사에 대한 이와 같은 분석을 체제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해간다는 점에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주식회사를 고용주로, 판매자, 채권자 접하게 된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주식회사는 탐욕적이다. 노동자를 손쉽게 해고하고 소비자를 간단히 무시하고 채무자(대출자)의 존엄성까지 훑어내고 이런 돈으로 정치도 좌우한다. 결국 주식회사의 탐욕 앞에서는 무력하게 벌거벗겨질 수밖에 없는데, 저자는 이런 상황을 추출적 구조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해 소수의 대주주가 주식회사라는 빨대를 통해 대다수의 땀의 결실을 훔치는 것이다.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면 부익부빈익빈이 극심해지고 모기지대출 연체로 촉발된 2008년 경제위기 같은 힘든 시기가 반복된다.

 

  그래서 저자가 대안으로 내놓는 것은 주식회사가 아닌 대안적 소유방식의 발전이다. 대안적인 소유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협동조합, 종업원 소유, 공동체 소유 등등. 어떤 형태이든 핵심은 이윤확대의 강박을 벗겨내고 다양한 가치들이 기업 안에 뿌리내리도록 하는데 있다. 저자의 표현으로는 생성적 구조의 형성이다. 추출적 구조에서 생성적 구조로의 이행은 시대의 과제이고, 그 가운데에는 회사를 누가 어떻게 소유하느냐의 문제가 놓여 있다.

 

  누가 어떻게 소유하느냐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서 대안기업을 고민한다는 점이 근래 유행하는 협동조합”, “사회적기업같은 말들을 되씹어보게 한다.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등에 대해 근래 부쩍 늘어난 관심은 나아지지 않는 경제와 살림살이의 팍팍한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아래로부터의 대안을 찾는 이들에게는 당장 손에 잡히는 게 협동조합등이고, 웬일인지 덩달아 정부와 대기업, 언론들도 관련 콘텐츠를 쏟아내고 있다. 사회적기업 육성법과 협동조합 기본법이 제정되고, 기업에서 내놓는 지원프로그램들도 늘어나고, 관련 강좌와 출판물은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만사가 잘돼가고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사회적기업 같은 경우는 현재 정부에서 사회적기업을 인증해주면서 공공기관에서의 인증기업제품 의무구입 같은 여러 장려책을 통해 지원해주고 있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중간유통으로 구입실적 채워주고 중간마진 먹기 이상이 아닌 곳이 있고, 기존의 열악한 일자리를 대신하는 데 그치기도 하고, 지원받기 위한 게 아니라면 굳이 사회적기업이어야 하는지 물음표가 떠오르는 곳도 있다. 이런저런 모습들을 더해보면 대안과 이정표가 되기에는 많이 모자라 보인다.

 

  이는 어떤 맥락에서 협동조합등을 내세우는지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협동조합등을 주식회사체제를 보완하는 역할에 한정짓는 것, 즉 일자리와 빈곤 문제의 완화를 위해 빈곤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그들이 스스로를 고용하는 수단 정도로 장려하는 건 실제로는 그만큼도 해내지 못하도록 한다. 마조리 켈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추출적 구조와 함께 나란히 생성적 구조가 발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협동조합등이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려면 주식회사체제의 극복과 소유패러다임의 폭넓은 변화를 전제해야 한다. 사회적 목표 추구 같은 가치를 담아내려면 이에 합당한 사회적 소유의 틀을 짜야한다. 소유자들의 금전적 이익 추구를 보장하는 소유방식의 온존과 사회적 목표의 추구가 양립할 수는 없다. 때문에 협동조합등의 구상에 있어 대안적 소유방식은 본질적이며, 본질이 사상된 작금의 논의행태는 기만과 다름없다.

 

  책은 단점도 적지 않다. 곳곳에 팽배한 경제적 탐욕을 주식회사제도로 환원시키는 듯한 태도, 그래서 이해관계자 소유는 탐욕에서 자유로울 것이라는 다소의 비약, 대규모 생산유통시설을 담아낼 수 있는 사회적 소유방식에 대한 고찰의 결여, 회사 내부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나갈 비전의 부족 등등. 이런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소유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협동조합등을 옹호하는 급진적이라면 급진적인 면모는 요즘 공공연히 권장되는 협동조합사회적기업 담론보다 훨씬 제대로 된 모양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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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 민주주의 Democracy 아주 특별한 상식 NN 7
리처드 스위프트 지음, 서복경 옮김 / 이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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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무엇으로 채워나갈까?

[서평]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강한 시장 약한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기지배를 의미한다. 계급사회에서처럼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리돼있지 않고, 인민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즉, 구성원 모두가 주권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갖는 상태이다. 구성원들 간의 평등은 민주주의 자체는 아니지만,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불평등의 증가는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기 마련이다.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는 경제적 불평등이 일으키는 민주주의의 무기력화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약화되고 있는 민주주의란 우리가 아는 대의선거정당민주주의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외양을 걸친 의회, 선거, 정당이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인민의 자기통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 부와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현존 민주주의 제도를 가진 것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맘껏 이용한다. 가진 자들의 거짓 민주주의가 지키는 건 시장에서의 제한 없는 이윤추구이고, 사상 초유의 양극화이다.

 

 

강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저자인 리처드 스위프트는 인민주권의 이상에 다가가는 강한 민주주의를 만들어갈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경제 민주화 : 현재의 약한 민주주의는 강한 시장 때문이므로, 강한 민주주의의 첫 걸음은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이다. 그런데 경제 민주화의 내용에 대해 저자는 흔한 시장규제, 정부개입, 복지국가 등에 한정시키지 않고, 더 근본적이며 급진적인 고민을 던진다. 기업사회의 모순은 평등한 시민들이 기업 안에서는 소유와 통제에 대한 모든 권리를 틀어진 소수의 고용주와 이들에게 복종할 의무만을 가진 다수의 고용인으로 나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터에서 다수가 겪는 피라미드형 상명하복의 경험은 자신이 민주적 주체라는 의식을 앗아간다. 따라서 일터에서부터 경제적 삶을 스스로 통치해가는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진정한 기초 없이 강한 민주주의는 제대로 세워질 수 없다. 철저한 경제민주주의만이 인민주권을 심화시키고 강건하게 해줄 것이다.

 

대안세계화 : 세계화가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건, 국제경쟁의 파괴력에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정부능력을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한미FTA는 투자자가 공공정책으로부터 이익을 침해받을 경우 국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통제받지 않는 국제협정, 선출되지 않는 초국적 권력인 IMF와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들이 한 나라의 헌법과 민주적 합의보다도 상위에 군림하며 자본의 자유와 소유를 한정 없이 늘려주는 게 세계화의 핵심이다. 이에 저자는 초국적 권력기관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국제 시민사회를 형성해가고, 국민국가 안에서는 인민의 힘을 강화해가는 다차원적인 행동을 제안한다.

 

민주주의의 민주화 : 민주화 이후에도 빈자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삶은 더 고달프다. 이처럼 밥 먹여 주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사실 진짜 주인은 따로 있는 가짜에 불과하다. 이제는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때이다. 의회와 선거, 정당을 가로질러 인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열려야 한다. 국민주민투표를 통한 정책의 직접 결정이 활성화되고, 중앙집중적인 의사결정과 국가 기능을 지방과 지역의 더 작은 자치공동체들로 분산 이전시켜 폭넓은 분권화를 이뤄야한다. 현재의 국가관료체제가 직장과 지역에 기초한 자치공동체들의 연합체로 대체된다면, 직업정치인과 관료, 전문가의 전유물이었던 입법행정사법이 전 인민에게 개방되고, 인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스스로를 개선시키는 데 사용할 것이다.

 

생태민주주의 : 직업정치가와 관료에 의해 운영되는 제한된 민주주의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들 중 하나는, 불평등의 증가 이외에도, 생태위기이다. 4, 5년마다의 선거에서 승리해야 하고 기업의 요구에 저항력이 없는 정치가의 단기적인 시간지평으로는 장기간의 추진과 인내를 요구하는 생태문제에 대처할 수 없다. 오직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의 더 많은 민주주의 즉, 더 많은 권리와 더 적은 노동시간, 더 민주적인 문화 등으로 향상될 삶의 질만이 물질추구와 소비를 줄이려는 진지한 노력을 대중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생태계와 실질적 민주주의는 하나를 방어하는 것이 다른 하나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관계 속에 있다.

 

 

민주주의, 비어있는 항아리

 

위의 대안들이 매우 추상적으로 느껴질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약한 민주주의와 강한 민주주의 사이의 대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어떤 제도나 시스템도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증 못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비어있는 항아리와 같다. 민주주의를 실제로 정의하는 것은 그 속을 인민이 어떠한 일상의 실천들로 채우느냐에 달려있다. 냉소를 가장한 무관심으로 제 운명을 부자와 권력자에게 맡겨만 놓을 것인가? 아니면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 협동조합, 마을, 공동체 같은 민주적 공간들을 스스로 열어 모두 함께 토론하고 결정하며 행동하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향유할 것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가늠하는 건 지금 여기에 사는 각자 선택들의 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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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워크
E. F. 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 느린걸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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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회 노동소외의 극복을 위하여

 

 

굿 워크는 말 그대로 좋은 노동, 그리고 중간기술과 영적 가치에 관한 책이다. 저자인 슈마허는 산업사회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인 석유의 대량소비에 의존하는 현대 산업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그 끝이 멀지 않았다. 또한 산업사회는 노동과 삶의 질을 극적으로 저하시켰다. 이런 병적인 산업사회의 한가운데에는 거대기술이 존재한다. 거대기술은 중앙집중적인 권위와 자원 소비의 토대이며, 인간을 기계 부속품처럼 전락시키며 노동자에게서 창의와 자유를 앗아간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거대기술이 극복돼야 한다. 그래서 슈마허가 제안하는 게 바로 중간기술이다. 중간기술은 자본집약과 노동집약의 사이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것이다. 중간기술을 통해 많은 자본이 없어도 각 지역의 특성과 필요에 적합한 재화를 지역에서 집적 생산할 수 있다. 거대기술이 대량소비와 환경파괴, 실업, 위계제의 토대라면, 중간기술은 한 곳으로 집중된 생산능력을 해체하여 자연과의 조화, 충분한 일자리, 작업장 민주주의의 토대가 돼줄 것이다. 끊임없이 이윤과 성장만을 쫓는 현대 산업사회와는 전혀 다른 지반 위에서 인류는 다시 노동의 진정한 의미와 삶의 가치를 일깨워야 할 것이다.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물질적 풍요가 아닌 스스로를 완성해가는 데에 있으므로.

 

저자의 주장, 생각에 전폭 동의할 수 있는 책은 매우 드물다. 때문에 당연한 걸 굳이 여기서 내 생각과의 차이점을 밝히거나 저자를 비판하거나 하는 건 필요해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굿 워크는 슈마허의 대중강연집이라 논리나 구성이 엄밀하지는 않다. 대신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듯 쉽고 친절하게 자신을 생각을 들려준다. 여기에 쌍심지 켜고 달려드는 건 속 좁아 보인다.

 

글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존경하는 사상가 두 명이 겹쳐 보였다. 슈마허는 노동의 세 가지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는 인간 삶에 꼭 필요하고 유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선한 청지기처럼 신이 주신 재능을 잘 발휘하여 타고난 각자의 재능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협력하기 위해서입니다.”

 

슈마허는 책 중간에 노동과 삶의 의미와 가치에 무관심한 유물론을 비판하는데, 번역자가 물질주의를 유물론으로 잘못 번역한 것인지, 슈마허가 물질주의와 같은 의미로 유물론이란 말을 사용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철학의 한 조류로서 유물론은 상식적인 의미의 물질주의와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가장 악명 높은 유물론자인 마르크스가 청년 시절에 쓴 글에서 노동에 관해 피력한 입장과 슈마허가 말한 노동의 목적이 대동소이하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유적 본질의 실현으로 보았다. 여기서 유적 본질이란 다른 동물종과 구분되는 인간종에 고유한 특성으로서, 다른 동물들이 본능에 의해 자연과 관계를 맺는 데 반해, 인간은 구상하고 상상하며 이를 자연을 통해 실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생존의 수단이면서 자기실현의 수단이기도 한데, 마르크스는 더 나아가 인간이 노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에서의 사회적 관계 즉, 생산관계를 사회와 역사의 진정의 토대로 보았고,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재화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도 생산한다고 말하였다. 마르크스의 노동관과 슈마허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소외와 이의 극복에 대해 마르크스는 생산관계의 변혁과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역할을 강조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고 중간기술에 대한 슈마허의 강조가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성취한 중앙집중화된 생산력을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통해 인수만 한다면 노동소외가 극복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 실제로 이렇게 생각한 혁명가들도 없었을 것이다. 생산과정에 대한 민주적인 노동자통제가 최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은 폭넓은 분권화를 요구하며, 높은 수준의 분권화는 슈마허가 말하는 중간기술 같은 새로운 물질적 토대를 전제한다고 보인다.

 

마르크스 말고 또 생각난 사상가는 에리히 프롬이다. 슈마허가 책의 후반부에 이를수록 강조하는 영적 가치에 대한 주장이 프롬의 사상과 닮아보여서였다. 옮긴이 글을 보니 슈마허가 말년에 이르러 가톨릭 사상가들을 받아들여 무신론에서 돌아섰다던데, 에리히 프롬도 에크하르트 같은 가톨릭 사상가들을 자주 인용했다. 그래서 슈마허가 말하는 복음서나 영적 가치가 신비주의적이거나 노인의 약해진 소리 같은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프롬은 사회분석과 정신분석을 결합시켰던 초, 중기를 지나 후기에 이르면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자질 향상에 천착하는데, 여기서 종교의 근본을 새롭게 해석한다. 인류 역사에서 예수, 석가모니 등의 가르침들은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불안에 대한 진보적 해법으로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가르침이 가리키는 것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참된 고양과 자유이며, 이런 맥락에서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신론과 인간해방을 목표하는 유물론은 서로 조우할 수 있다고 프롬은 말했다. 슈마허도 이런 맥락에서 영적 가치의 추구를 말한 것이라 읽었다. 반면에 오늘날 세속적인 종교의 대개 모습은 물질주의의 다른 판본과 다를 바 없다.

 

몇 시간 정도면 쉬이 읽을 분량의 책인데 읽는 내내 노동의 소외와 이의 극복, 그 방법, 참된 가치 등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슈마허는 생각에 이어 행동하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동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의 마음속에서 확신과 결심, 남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쌓아가는 일입니다. 문제를 이해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압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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