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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철학자들 -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의 생애, 시대와 아이디어
로버트 하일브로너 지음, 장상환 옮김 / 이마고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핵심어 : 자본주의, 비전
경제학 분야에서 폴 새뮤얼슨의 경제학 교과서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로버트 하일브로너가 쓴 《세속의 철학자들》이라고 한다. 경제학 교수들이 강의에 사용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독자들의 흥미에 힘입어 No.2에 오른 《세속의 철학자들》은 이 분야에서는 보기 드물게 어렵지 않고 재밌는 책이다. 그러면서도 생각의 주름이 깊게 파이는 진중함도 함께 묻어나는데, 이는 ‘자본주의’와 ‘비전’이라는 두 단어를 가지고서 경제사상들을 요리하는 하일브로너만의 개성에서 비롯한다. 두 단어에 대한 그의 관점을 이해한다면 하일브로너식 만찬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란 무엇일까?
“산고의 진통은 지나고 시장체제가 탄생했다. 이제부터 생존의 문제는 관습이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자유로운 행동에 의해 해결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인간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시장뿐이었다.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 후반까지는 그렇게 광범위하게 쓰이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라는 불리는 것이다!” (위 책, 46p)
여기서 하일브로너가 강조하는 게 자본주의가 다른 질서를 대체하면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란 긴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지 고작 몇 백 년밖에 되지 않은 새로운 사회질서이다. 인류가 그간 경제사회(즉, 생존하기 위해서 인간은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경제는 사회적이고, 사회적인 것은 경제적이다)를 조직해온 방법은 세 가지뿐인데, 바로 관습과 명령, 시장이다. 이중 시장체제가 가장 최근에 발명돼 현대사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원리에 대하여 그 의미와 전망에 대해 많은 이들이 질문하고 탐구했던 건 당연했다. 자본주의와 함께 이에 대한 ‘비전’도 탄생했다.
“《국부론》이 발표된 이후 사람들은 새로운 눈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이 행하는 일이 전체 사회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전체로서의 사회가 멀기는 하지만 분명히 가시적인 목표를 향해 당당한 발걸음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새로운 비전이 나타난 것이다.” (위 책, 52p)
비전의 개념은 자본주의에 대한 하일브로너의 이해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자본주의가 자연적으로 처음부터 주어진 게 아니라 역사 가운데서 태어나 성장해온 체제라면, 이 체제도 역사와 같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어쩌면 다른 모든 것처럼 끝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전은 바로 역사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미래와 이 미래를 향한 변화에 관한 지식체계이다. 아담 스미스로부터 마르크스, 케인스, 슘페터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세속 철학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독창적인 비전들을 인류에게 제시해왔다.
신고전파 경제학 비판
《세속의 철학자들》은 단순한 경제사상사가 아니다. 자본주의 비전이 여러 경제학자들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역사는 자연히 비전이 사라져버린 요즘 경제학에 대한 매서운 비판으로 변모한다.
“내가 보기에 더욱 깊고 의미심장한 변화는 경제학의 비전-바로 경제학의 진수-으로 새로운 개념이 더욱 많이 등장하고 이에 상응해서 다른 훨씬 오래된 비전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비전은 과학이며 사라지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이다.” (위 책, 416p)
“그렇다면 우리가 경제학을 과학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는 것에 환호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위 책, 419p)
“사회에는 자연의 기정사실과 비교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질서 속에는 권력과 복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우리는 우리의 설명이 자연의 해명에서 추구하는 객관성을 충족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자연의 작동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를 사회의 작동에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이러한 가짜 과학적인 견해가 경제학의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세속철학으로서는 종말을 기록하게 될 것이다.” (위 책, 421p)
경제학을 과학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의지하는 수단들 중의 하나가 수학이다. 그런데 복잡다단한 경제현상을 정확한 수식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인간행동의 규칙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간행동에 규칙적인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등호를 가운데에 둔 양편 사이의 일정한 양적 관계도 성립할 수 없다. 그리고 신고전파 경제학이 인간행동에 일정한 패턴을 부여하기 위해서 도입하는 게 경제적 인간으로서 개인은 주어진 예산 하에서 효용을 극대화하는 계산과 선택을 변함없이 한다는 가정이다. 물론 이외에 다른 많은 전제에도 의존한다. 이에 대해 하일브로너가 비판하는 점은 ‘경제적 인간’이 함축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과도한 단순화이다. 인간은 경제학자들의 기대대로만 행동하지 않는다. “인간은 최후의 순간에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능력을 가졌다.”(위 책, 420p)
이어서 그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제시하는 매끈한 사회질서 역시 부정한다. ‘우리는 경제적 인간으로 타고났다’는 신고전파의 전제에서 수학적으로 빈틈없이 도출되는 결론들은 인간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가정 자연적인 질서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는 각자의 이기심과 계산만 있을 뿐,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을 얽매고 속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의 현실은 결코 평평하지 않다. 누군가는 어떤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빠르게 부를 늘리고, 다른 집단은 계속 제자리이거나 뒷걸음친다. 현재를 지양하는 운동이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반면에 신고전파의 안락한 세계 속에서는 더 나은 미래를 밝히고 숭고한 이상을 위해 분투할 필요도 없다. 인류는 자신이 닿을 수 있는 최선을 이미 획득했다. 미래는 바로 현재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이 더 이상 비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경제학이 줄 수 있는 건 없다. 자본주의와 변화는 분리될 수 없고 진정한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는 힘을 이해하려고 한다.
“나의 대답은 예측 가능한 장래에 우리들의 집단적 운명을 결정하게 될 자본주의 무대를 우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경제학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위 책, 422p)
“경제 분석은 그 자체로 우리 미래의 길을 밝힐 횃불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경제적 비전은 자본주의 구조가 그 동기를 확대하고, 유연성을 높이며, 사회적 책임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위 책, 424p)
하일브로너식 비판의 한계
하일브로너가 신고전파 경제학과 자본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스스로를 “오랜 세월, 민주적 사회주의의 이념과 목표에 대해 찬성해온 나”(위 책, 422p)로 밝히지만, 자본주의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진보를 전망한다는 점에서는 온건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의 전망이 근본적인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그가 가진 ‘자본주의’ 개념에서 비롯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를 시장체제 즉, 자유로운 이익추구와 이의 시장을 통한 조정 메커니즘을 거의 동일시한다. 그리고 시장과 관습 및 명령을 서로 대비시키는데, 시장은 경제적 자유에 기초하나 관습과 명령은 사회‧정치적 속박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경제체제도 세 가지-각각 관습과 명령, 시장에 근거한다-로 분류한다. 그런데 이런 분류 속에서는 당연히 시장체제 이외의 대안이 생겨날 수 없다. 하일브로너가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결국 뛰어넘지 못하는 지점이다.
관습과 명령, 시장이라는 삼분법에는 분명 단점과 한계가 있다. 먼저는 이 단어들이 경제적인 역사시대를 나누기 위함보다는 한 경제체제의 서로 다른 차원들을 의미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 역사적 사례들을 검토해보면 뚜렷해진다.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에서 번성했던 노예제 경제가 한 예인데, 하일브로너의 분류에 따르면 노예제 경제는 백인 농장주가 지배하는 명령체제일 것이다. 하지만 남부 노예제 경제가 당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분리돼서는 시작부터 파악될 수 없다는 점 즉, 영국 면산업에 대한 원료공급지였으며 면화수출 덕분에 노예제가 번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시장에 의해 규제되는 사회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 또 15~16세기 동유럽에서의 재판농노제를 들 수 있다. 서유럽에 대한 곡물수출에 자극되어 동유럽에서 도리어 농노제 착취가 더 강화된 것이다. 이처럼 시장이 바깥에서 자극했던 사례들과는 반대의 경우도 다양하다. 서양중세의 대부분의 시기는 봉건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상업과 도시가 성장해온 역사였다. 이런 역사적 경험들은 명령(과 관습)이 시장과는 원리상 모순적이면서도 실제로는 서로를 보완, 강화하는 관계를 맺어 왔음을 증명한다. 이런 관계는 단순한 이분법적, 삼분법적 사고방식으로는 사유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사례들보다 정말 중요한 건 관습과 명령, 시장이 바로 자본주의의 서로 다른 차원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기업과 소비자의 관계, 기업과 기업의 관계 등 자본주의의 상당히 많은 영역이 시장에 속한다. 이런 측면에서 자본주의는 분명 시장사회이다. 하지만 기업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곳은 명령이 지배한다. 만약 기업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사적 이익에 따라 자유로이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 기업은 곧 문 닫게 될 것이다. 기업이 성립할 수 있는 건 노동자들이 임금을 대가로 제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양도하기 때문이다. 소유주와 경영자들은 양도받은 통제권으로부터 명령을 시행한다. 그런데 기업 내부는 명령이 지배, 외부는 시장이 지배한다는 식으로 단순히 구분해서도 안 된다. 명령과 시장은 서로에게 침투하고, 서로를 제한한다. 기업 내부에서 벌어지는 명령의 다양한 내용과 방식들은 시장에 의해서 그 성과를 평가받고 살아남거나 퇴출된다. 반대로 새로운 명령체계가 시장의 작동방식을 수정하기도 한다. 포드주의가 확산되면서 소비 주도의 성장 및 시장여건이 무르익은 것처럼 말이다. 한편 관습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인데, 경제적 선택의 기저에는 쉬이 변하지 않는 생활양식과 문화, 관례 같은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선택이 합리적 계산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가정만큼 비현실적인 것도 없다.
이상의 논의를 간추려보면, 자본주의를 딱 잘라 시장체제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시장 말고도 자본주의에는 명령과 관습 같은 다른 차원들이 무시할 수 없는 힘과 크기로 존재한다. 시장이 ‘평평한 세계’라면 실제의 자본주의는 수평과 수직으로 짜인 입체적인 공간이다. 2차원의 세계는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지만, 3차원의 세계는 이리저리 돌려보아야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보다 종합적이고 예리한 관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를 풀기에는 마르크스가 가장 적합해 보인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특수한 사회체제 ~ 는 역사적 힘(인클로저 운동 같은)을 통해, 아무런 자산도 갖고 있지 못한 까닭에 자신의 노동력-순전히 일할 수 있는 능력-을 파는 것 외에는 살아갈 다른 방법이 없는 노동계급을 창조한 사회, 곧 자본주의이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경제학 자체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종의 ‘사회분석’을 창안했다.” (위 책, 215-6p)
더 읽을거리
《세속의 철학자들》를 읽고 신고전파 경제학과 자본주의를 보다 더 철저히 비판하는 독서에 흥미가 인다면, 아마도 아래의 책들이 적당할 것 같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에 불만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강의》, E. K. 헌트
《자본주의 이해하기》, 새뮤얼 보울스, 리처드 에드워즈, 프랭크 루스벨트
《자본론》, 칼 마르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