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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마르크스 ㅣ How To Read 시리즈
피터 오스본 지음, 조원광 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짜증 유발 마르크스주의자들
지금 이 글을 읽기 시작한 여러분들은 마르크스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가? 아마도 무관심한 대다수와 이보다는 적은 수의 불편해하는 이들, 그리고 호감을 보이는 소수가 이 글을 읽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관심이 없고 불편해하는 독자들은 읽지 않고 지나쳤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가 인기없고 볼품없는 아이템으로 전락한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진보라는 가치를 고민하는 학생, 지식인들도 최장집 교수의 민주주의론이나 홍세하 교수로 인해 유명해진 똘레랑스, 반핵평화, NGO 등을 선호한다. 그리고 하버마스,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의 현대사상가들이 마르크스를 대신한다.
대화와 관용, 합리적 절차, 비폭력 평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치장한 세련되고 현대적인 ‘진보’에 반해 마르크스주의는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가령 편협, 교조, 반사회성, 거리를 혼잡케하는 집회, 무엇보다 실패한 사회주의-와 맞닿아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를 멀리한다. 또한 마르크스가 유발하는 불편 혹은 짜증은 이른바 운동권 특유의 계몽적, 실천적 성격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너는 잘못된 허위의식에 빠져 있어”, “특권을 버리고 실천과 활동에 나서야 해”라는 ‘나’의 과거로부터 계속된 의식과 일상을 깨버리라는 요구만큼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은 없다.
이러한 규범적, 일방적 성격은 마르크스주의가 가치중립성이라는 학문의 절대조건과 가치의 상대성이라는 현대의 도덕률을 위반하고 있는 증거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주의는 객관성을 상실한 비-학문이자 낡은 도덕이다. 마르크스가 휴머니스트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는 노동자의 불쌍한 처지를 동정한 나머지 균형을 잃고 자본주의가 갖는 역동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를 부당한 판결이라고 항변한다. 여기까지 읽었으니 인내심을 내서 항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잠시 샛길로 빠져보자
우리는 흔히 세계 그 자체를 순수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것이 착각인 까닭은 우리가 보고 만지는 경험은 모두 감각기관에 의해 매개되기 때문이다. 인식된 사물과 사물 그 자체가 일치한다고 누구도 보증하지 못한다. 감각기관을 초월해서 사물을 직접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나아가 인간의 경험은 동물과는 달리 감각기관과 더불어 언어에 의해서도 중계된다. 우리가 다리가 서너 개 달린 평평한 판자를 탁자라고 인지하는 것은 이런 모습을 한 사물들을 탁자라고 지시하는 언어적 질서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을 탁자라고 여기는 이상, 우리는 직접 그것에 앉기보다는 무언가를 올려놓는 용도로 사용한다.
한편 언어는 단순히 대상과 음성 사이의 지시관계가 아니다. 언어에는 가치와 규범, 세계관이 기입돼 있다. 가령 광인이라는 말은 특정한 문화적 실천을 보편적 기준으로 전제하고 이를 정상이라는 말로 버무리면서, 보편적 기준에서 벗어나있는 이들에 대한 배타성과 공격성을 함축한다.
다소 엉뚱하게도 우리의 경험이 감각기관, 언어, 세계관 등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언급한 것은 인식에서의 주체의 ‘능동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실체를 바라보기에 앞서 실체를 바라보는 방법을 먼저 배운다. 또한 우리는 실체를 충분히 알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이전에 먼저 판단한다. 이런 측면에서 실체를 바라보는 방법과 판단은 선험적(경험 이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선험적 인식방법과 판단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 아닌 역사적 생산물이다. 다만 누구나 특정 방향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자연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인류가 자연력 앞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기에도 벅차던 시대에 자연은 공포와 외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공포와 외경이 자연현상은 신적 권능의 산물이라는 자연에 대한 앎을 결정했다. 인류가 점차 자연력을 자신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조절할 수 있게 됨으로써만 비로소 자연은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세계를 보기 이전에 보는 방법을 먼저 배우고, 이런저런 보는 방법에는 세계에 대한 어떤 판단들이 전제되어 있다. 사실과 가치는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다. 가치는 사실을 구성한다. 가치중립적이라는 선언은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일반적인 사회적 가치를 전제한다는 말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한 시대의 지배적인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라고 했다. 일반적인 사회적 가치라는 가면을 벗겨내면 그 곳에는 기득권을 쥐고 있는 이들의 꿈틀대는 욕망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른바 상식과 통념을 거부하고, 세계를 다른 방법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기득권을 쥐고 있는 자들의 욕망에 의해 고통받는 이들의 절규에서부터 출발하자고 한다.
왜 오늘날 여전히 마르크스인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비인간적 삶으로 인해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절규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절규를 낳는 힘들을 분석한다. 마르크스의 분석이 과학적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출발점으로서의 절규가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의 외침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로 배따신 이들과는 반대로 절규에 이른 자들은 변화를 요구한다. 자신들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사회를 개조하고자 한다. 자연이 인간의 목적에 조응하는 변형의 대상이 됨으로써 그 내적구조가 밝혀졌듯이, 사회 변혁을 통해서만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설 때만이 사회구조를 낱낱이 밝혀낼 수 있다. 이는 가치에서 중립적일 때만이 객관적일 수 있다는 통념과는 달리 사회과학은 노동자계급의 당파성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입장이다. 그러나 모순은 오히려 이른바 주류적 시각에 있다.
주류적 시각의 모순은 존재하는 것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이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받는 것은 바로 노동자들의 억압과 고통이다. 가령 주류 경제학은 임금을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에 의해 결정되는, 동등한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의 자유로운 계약의 결과로 바라본다. 그리고 노동조합과 파업은 노동의 공급을 통제하여 노동시장에서의 균형가격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내려는, 시장을 교란하는 집단이기주의적 행태이다. 이러한 관점대로라면 동일노동을 하고도 기존 임금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이나 최저생계비도 안되는 임금도 조화로운 시장의 결과이다. 구조조정으로 심각한 생활수준의 하락을 막아보고자 하는 노동자의 파업이나 노동자 집회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는 인간적인 삶에 대한 진실한 외침도 집단이기주의적 행태에 불과하다. 이외에 주류적 시각이 결코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살아있는 노동자가 자본의 이윤창출 시스템 속에서 죽어있는 부품이 되어야만 하는 극심한 소외. 그리고 이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자본에 의한 ‘타살’이다.
마르크스는 그저 이처럼 생생한 현실로부터 시작하자고 할 뿐이다. 존재하는 불의를 인정하자고 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절규가 단지 사회 하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절규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즉 노동자의 절규를 낳는 자본의 파괴적 힘은 사회 전체로 구석구석 퍼져나가 인간과 자연에 질곡을 가한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화폐에의 극심한 의존으로 몰고 가 맹목적인 화폐추구와 무한경쟁에 우리를 결박한다. 인간적 가치에 대한 인간 고유의 욕구는 마모되고 소진되어, 종국에는 자본의 이윤에 대한 비합리적 충동이 우리의 영혼을 대신한다. 자연과의 조화마저 산산조각낸다. 이러한 인간적, 생태적 가치에 대한 위협으로서 자본주의는 우리 모두의 해방을 위한 극복의 대상인 것이다.
노동자의 절규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자본주의가 여전히-어느 때보다도- 인간과 자연에 질곡을 가하는 오늘날,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던, 따라서 지배계급의 욕망에 의해 구조화된 이데올로기를 들춰내어 그 내적구조를 생생하게 밝혀낼 수 있었던 마르크스의 가치는 그의 시대보다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더욱 읽혀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마르크스로 가는 뛰어난 징검다리 책이 있다. 바로 <HOW TO READ 마르크스>(피터 오스본, 웅진지식하우스)이다(독자들은 이 글의 형식이 서평임에도 이제야 책이 소개된 것을 너그럽게 용서하시라).
<HOW TO READ 마르크스>는 왜 읽을만 한가?
마르크스에 관한 숱한 입문서 중에서 이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약 200여 쪽)의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두 가지이다.
먼저는 책의 형식이다. 이 책은 <HOW TO READ 시리즈>의 하나인데, 사상가의 간단한 이력이나 대표작을 요약하여 알려주는 대개의 안내서들이 갖는 ‘원서의 깊이와 풍부함을 전달하지 못하는 간편한 요약’의 한계를 횡단하기 위해, 이 시리즈는 “독자들이 뛰어난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위대한 작가, 사상가들의 저술 자체를 직접 만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사용한 말들에 독자를 데려가고, 또한 이런 말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보여준다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마르크스가 창안한-혹은 새롭게 변형한- 핵심 개념을 잘 담고 있는 저작의 문구를 앞에 배치하고 뒤따르는 저자의 해설을 한 묶음으로 한 10개의 챕터가 있다. 즉 열개의 마르크스의 개념들을 설명하는 셈인데, 상품 물신주의, 실천, 생산양식, 소외, 공산주의, 자본, 본원적 축적 등이다.1)
개념은 현상을 파악하는 인식 도구로써, 한 사상의 요체랄 수 있다. 개념은 마치 프리즘과 같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수많은 색으로 분절되듯이, 개념들을 통과한 뭇 현상은 이면에서 현상을 주조해내는 힘, 규정력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보다는 그가 무엇으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설명했는지를 앎으로써,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스스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체험을 즐길 수 있다. 가령, 소외라는 개념을 통해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인간성의 왜곡을 사고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노동을 통해 자기를 스스로 산출해낸다는 점에 있다. 즉 자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를 결정하고 변형해가는 것이 인간 본질이다. 그리고 노동은 그 성질상 사회적이기-개별적으로 노동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분업이라는 틀 내에서의 노동이기- 때문에 인간 또한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이 말은 인간이 스스로를 산출해낸다고 해서, 개체가 자유롭게 그러한다는 것이 아니라, 집합적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의 소외는 인간에게서 집합적 자기 창조력을 앗아갔다. 노동이 오로지 자본의 이윤증식에만 종속됨으로써 인간 또한 맹목적으로 화폐를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화되었다. 이제는 이러한 인간상이 마치 태곳적부터 이어져온 본성인양 여겨진다. 획일화된 대중소비문화로 인해 문화창조의 기반이 되는 자율성과 다양성이 압살당하면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단조로운 미래를 예고한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는 노동의 소외가 지양되는 공산주의 사회를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로 그린다. 그리고 노동의 소외는 자본이 아닌 노동자가 사회적 필요의 충족을 위해 스스로 생산을 구상하고 조직함으로써 지양되며, 이러한 노동자의 직접통제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달과 인간의 자기 창조력을 재생해 낼 것이다.
<HOW TO READ 마르크스>의 두 번째 장점은 저자인 피터 오스본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마르크스에 관한 해석으로서의 독해, 즉 정통주의(orthodoxy)에 대항하는 독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피터 오스본이 비판하는 정통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에서 정당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 교육 체계로 코드화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의미한다.
사실 정통주의에 대한 비판은 구소련 몰락 이후 스탈린주의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꾸준히 계속되어온 온 작업 중의 하나라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제대로 된 정통주의 비판이 무엇인지, 즉 기존의 스탈린주의 비판이 명목상이었지 여전히 스탈린주의에 부분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철학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피터 오스본은 런던 미들섹스대학교 현대유럽철학과 교수이며 잡지 <래디컬 필로소피>의 편집자이기도 한데, 자신이 분명 뛰어난 철학자임을 이 책에서 정통주의에 대한 근본적 전복을 통해 보여준다.
가령 이 책의 3장에서는 마르크스의 생산력 개념에 관한 정통주의의 모순을 뛰어넘을 수 있는 해석을 제공한다. 정통주의는 생산력 발전을 단순히 물질적 생산능력의 확대로 바라보아, 사회혁명의 시기로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생산관계로 인한 물질적 생산능력의 정체로 여겼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언제고 생산력의 정체로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지만, 역사는 반대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여주었다. 한편 피터 오스본은 생산력의 발전을 동시에 새로운 욕구가 창출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물질적 생산능력과 사회적 욕구가 확대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생산관계의 질곡으로 인해 노동자계급의 욕구 충족의 가능성은 줄어드는 시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매해 계속되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양극화와 빈곤은 확대되어가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다.
<HOW TO READ 마르크스>에 피터 오스본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관한 최초 · 최고의 비판적 분석가라고 한다. 어떻게 해서 최초가 최고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한 이들은 이 책을 펼쳐라!
1) 역자인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조원광은 communism을 공산주의로 번역하기보다 원어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는 이들 연구집단이 소련 등의 역사적 공산주의와 대립하는 독자적인 코뮤니즘 개념을 내세우는데 그 이유가 있다. 이 글의 필자는 일반적 관례에 따라 공산주의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