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
이주희 지음 / 글항아리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

 

신간을 검색하다가 이 제목에 끌렸다. 누구에게든지 차별은 분노를 일으키는 행위이지만, 언제 어디에서든지 존재하는 게 차별이기도 하다. 차별을 낳는 사회적인 힘을 구조라고 부른다면, “차별하는 구조라는 말은 추상적이고 개념적이며, 피와 살이 없는 기계, 감당할 수 없는 무게처럼 느껴진다. 반대로 차별받는 감정은 다른 말이 없어도 아픔을 자아낼 것 같다. 차별받는 슬픔을 생각하면.

차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나는 사진이 있다. 어디론가 도로 위를 걸어가는 흑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백인만을 위한 좌석에서 일어나기를 거부한 로자 파크스의 행동이 촉발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의 한 장면이었다. 버스를 타지 않고 먼 거리를 걸어가는 불편과 고됨을 스스로 감수하는 것으로 인종분리정책에 맞섰던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마음들이 수십 년의 시간을 가로 질러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 마음들 속에는 오랫동안 말없이 견디어온 차별, 그것이 낳은 수많은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차별받는 감정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지, 구조와 감정을 어떻게 연결할지 궁금하여 책을 읽었다. 책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로부터 시작한다. “지성으로 현실을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미래를 낙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현실을 비관하게 하는 것은 구조가 가진 힘이요,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건 주체의 능력일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저자(이화여대 사회학과 이주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적 해방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있어 지적인 해방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차별하는 구조 아래 차별받는 사람들의 감정이 더 이상 부차적인 현상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차별받는 사람들의 감정에 작동하는 프레임 규칙과 감정 규칙의 파악이 차별 극복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프레임 규칙은 어떤 상황을 정의하거나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규칙을 말한다. 그리고 감정 규칙은 상황과 감정 간의 일치 혹은 불일치를 평가하는 기준을 뜻한다. 해고당한 사람이 그것을 고용주의 횡포로 여기는지 아니면 자신의 무능력과 실패로 규정하는지가 프레임 규칙에 의한다면, 감정 규칙에 따라서는 회사에 화를 내거나 비난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가 결정된다.

책은 차별받는 사람들의 감정에 작동하는 규칙에 대해 세 가지 키워드로 분석한다. 체념과 적응, 혐오. 차례대로 읽어가는 중에 내가 겪었던 차별의 구조와 그 아래에서 나의 감정은 어떠했는지 돌아보았다.

 

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

 

내가 기억하는 대형마트는 서열화된 노동의 장소이다. 서열은 고용형태에 의해 결정된다. 밑바닥에는 외주, 하청화된 노동과 파견 노동이 존재했다. 청소와 경비, 시설관리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은 마트 소속의 직원이 아니며, 그들끼리도 서로 다른 회사들에 속해 있다. 시식대의 판매촉진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처지가 가장 열악한 건 마트와 용역회사 간의 계약이 해지되면 마트로 출근할 근거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마트가 이들의 노동에 매기는 예산과 용역회사가 중간에서 떼먹는 정도에 의해서 이들의 급여가 결정되고, 마트의 비용 절감과 용역회사의 중간착취 열정은 법정 최저임금으로만 식힐 수 있다.

간접고용과 직접고용 사이뿐만 아니라, 마트에서 직접 고용하는 노동자들 사이에도 서열이 존재했다. 상품을 진열하는 등의 기간제 노동자들이 있고,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 내에서도 서로 높낮이가 다르다. 나 같은 하층의 용역 노동자에게는 캐셔와 매장 부분별 담당자들이 중간층, 사무실에 책상을 갖고 있는 몇 명의 사무직과 점장이 상층으로 보였다. 인상적이었던 건 과거 대형마트 노동조합 투쟁의 당사자들이 기간제나 입점 점주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던 거였다. 과거에 노조원들이 했던 일들은 비정규직의 일이 되었다.

이러한 고용카스트를 정당화하는 논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직무에 따라 최적의 고용형태가 결정되고, 저마다 능력에 맞는 일을 하고 있다면, 고용형태에 따른 서열은 능력에 따른 분배순위로서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사실 어느 노동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 곳에 존재한다. 청소 노동자가 없다면 마트는 악취 나고 불결한 장소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의 가치는 이런 필요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수요와 공급이다. 청소나 경비, 시설관리, 판촉과 같이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가 하더라도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은 공급 측면에서 희소성이 없기 때문에 그 가치도 낮다는 게 경제학의 설명이다. 그리고 경제학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효율적이고 경제성장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른바 비핵심업무를 외주화한 대형마트는 이런 논리에 충실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혼자 일을 할 때는 별로 의식하지 않지만 마트의 진짜 정규직이 지켜볼 때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들이 있었다. 고용형태에 따른 노동의 분할이 수평 구조의 칸막이가 아니고, 수직 구조의 천장과 같고 임금과 의사결정 권한이나 기회의 차등 분배가 당연시되기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일 것이다. 못난 열등감이라는 자책에도 걸러지지 않는 건 여기서 나의 위치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자각과 이에 뒤따르는 위축감이었다. 나의 위치는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공간, 이용할 수 없는 시설, 말을 걸 수 없는 상대 등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아무리 오래, 열심히 일하더라도 저 위로 낄 기회는 생길 수 없다. 나의 노동은 쓸모가 없고, 나 역시 쓸모가 없다는 무력감과 명백히 대비되는 건 마트 정규직의 사원증과 분명한 목소리의 지시였다.

차별의 벽들을 무너뜨리기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차별받지 않는 마음을 위해 내세우는 제안은 차별금지법과 적극적 조치”, “기본소득과 기본서비스이다. 차별하는 구조는 개인의 체념과 적응, 혐오를 낳고, 이런 감정들이 차별을 더욱 공고화시킨다.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건 로자 파크스와 같은 위대한 용기와 차별받는 마음들의 연대와 운동이겠지만, 이러한 순간은 계획하고 준비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차별을 받을 때 언제라도 기대거나 싸울 수 있도록 도움 주는 사회 제도의 마련이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사회 여건의 성숙이 연대와 운동 없이 선물과 같이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다. 차별 아래에서 무력감과 패배감이 너의 책임이라거나 자기계발로 떠미는 게 아니라, 그 부당함에 분노하고 싸울 수 있는 감정을 지지하는 사회분위기의 변화도 필요하겠다.

책의 끝맺음이 상당히 좋아 이 문장들로 마무리 짓고 싶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가장 빨리 뛸 수 있는 선수가 항상 메달을 얻는 것은 아니다. 성소수자이거나 비정규직이거나 장애인인 우리도 차별적 구조에 막혀 능력을 보여줄 수 없었을 뿐, 우리가 선택한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메달을 딴 사람들은 좀더 겸허해져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작동 중인 여러 차별적인 기제로 인해 메달을 쟁취한 것 자체가 가장 빨리 뛴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메달 가까이 가지 못하기 때문에 무너져내릴 필요도 없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차별하는 구조, 즉 우리가 차별받았을 때 느껴야 하는, 그래서 그 구조를 제거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진실한 감정을 막아서고 있는 거대하고 단단한 벽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동의 상실 - 좋은 일자리라는 거짓말 전환 시리즈 2
어밀리아 호건 지음, 박다솜 옮김 / 이콘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 이런 말이 무심코 나왔다. 이렇게 열심히 일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같은 양의 노력을 일찍 공부에 쏟아 돈 더 잘 버는 직업을 가질 것 그랬다고. 버티며 애써 일하는 게 당연하다면 더 많은 보상이 주어지는 길로 찾아 갔어야 한다는 후회였다. 좀 더 노력했더라도 잘 버는 직장에서 일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출근 때마다 온 몸에서 돋아나는 거부감을 참아내고 있다는 거다.

노동해방이라는 말은 착취와 억압받는 노동에서 해방되어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참 주인이 되자는 뜻이다. 그런데 이보다 은퇴 : 노동으로부터 벗어남이 스스로를 구하는 가장 현실적인 미래로 느껴진다. 복리의 마법을 믿으며 꾸준하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재산도 모을 수 있다고, 여러 재테크에 기웃거린다. 그러나 금리가 오르고 경기침체에 빠지니 이런 믿음과 희망이, 회사 밖에 대한 미래도 사라진다.

일하는 게 왜 이리 싫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고 싶어 했던 일이 아니다. 취업하는 자체가 중요해서 뭐 하는 회사인지도 모르고 들어왔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그래도 몇 년은 아무 생각 없었는데 10년이 넘으니 한 번 뿐인 인생을 허비한다는 자책이 커진다. 둘째, 하고 싶어 하지 않은 일을 너무 오래 한다.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는 거에 더해서 일찍 출근하며 추가 근무하고, 일하며 생긴 피곤과 스트레스를 보듬는 시간들까지 합산하면 압도적인 지분이다. 내 시간의 실질적인 주인은 회사이다.

셋째, 직장에는 화를 돋우는 일들이 쉬지 않고 벌어진다. 직장에는 계급이 있고, 권한을 가진 상급자가 책임을 떠넘기거나 잘못된 결정을 해도 웃는 낯빛을 유지해야 한다. 상급자가 되기 위해 경쟁과 평가가 이뤄지고, 납득할 수 없는 인사에 그동안 일로 증명해왔다고 여겨온 스스로의 가치는 추락한다. 일찍부터 편한 자리 찾아 가는 요령을 욕해놓고, 이제라도 노선을 바꿔야 하나 갈등한다.

부적응자라서 힘든 걸까, 직장은 원래 적응하기 어렵고 힘든 곳일까? 스스로 부적응자가 아니라고 믿는다면, 직장이 꼭 이런 곳이어야 하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노동의 상실 좋은 일자리라는 거짓말

 

20234월에 번역 발행된 영국인 어밀리아 호건이 쓴 책이다. 원제는 LOST IN WORK : Escaping Capitalism이다. 이 책을 쓰도록 이끌었다는 저자의 소망이 인상 깊다.

나는 이 책이 이론의 가능성을, 이론이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일의 가능성을 실현하기를 소망한다. 당연하고, 고정되어 있으며, 극복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꺼내어 그것이 실은 우연적이고, 변할 수 있으며, 극복 가능하다고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책이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 조건인 희망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나은 일을 위한 희망,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일에 대한 희망,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을.”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이란 임금노동을 가리킨다. 일을 폭넓게 해석하면 어떤 목적을 위해 육체적 수고와 정신적 피로를 감수하는 모든 활동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행해지는 일로 서술대상을 한정짓는다. 같은 종류의 가사노동일지라도 고용되어 타인을 위해 일하게 되면 그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책은 임금노동이 처해 있는 현실을 비판한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저임금 불안정 노동이 늘어나고, 노동의 양극화로 격차와 차별이 늘어나며, 국가는 실업자에게 국가 재정을 좀 먹는다는 낙인을 찍으며, 최저 임금보다 못하더라도 일단 일자리를 구하라고 한다. 이처럼 일자리의 질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다시 좋은 일자리를 되살려야 할까? 저자는 훨씬 멀리 나아간다.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의 일이 사람의 자유를 앗아가는 방식을, 일이 약간의 만족과 심지어 약간의 즐거움도 제공하긴 하지만 그건 다른 유형의 즐거움을, 다르게 살고 생산하는 방식을 없앰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을 숙고한다.”

임금노동에 대한 전복적인 비판이 필요한 건 임금노동이 두 가지 부자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부자유, 그리고 임금을 받는 대신 주는 사람의 통제에 따라야 하는 부자유. 이 두 부자유가 임금노동을 가능하게 하고 규정한다. 그런데 밥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부자유는 자연이 인간에게 지운 굴레 같은 게 아니고, 사회가 자본을 소유한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로 갈라져 있으며, 다수는 자기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고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회현실을 의미한다.

한편 노동력을 구매하는 입장에서는 매출과 이윤을 낳는 쓸모 있는 노동을 원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일하는 걸 용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생겨난 게 일터에서의 수직적 위계질서와 통제이다. 위계질서 내에서 어떤 사람은 관리자가 되어 사장 대신 직원들을 통제하지만, 결국 이윤극대화(비용절감)와 시장경쟁이 직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결정한다.

 

힘을 합쳐 자본주의 넘어서기

 

두 부자유로 인해 노동자는 일터 밖에서도 안에서도 일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빼앗긴 채 타인을 위한,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노동의 소외로부터 월급쟁이들이 겪는 고통과 번민이 시작된다. 그래서 저자는 일터에서 노동자가 자기 결정의 권한을 확보하고 넓혀가야 한다고 말한다. 촛불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노동자의 권한이 커질수록 우리를 옮아 매는 부자유는 힘을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가 힘을 갖는 유일한 수단은 노동조합으로 조직과 단결이다. 다만 노동조합의 목적이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를 높이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금융치료가 부족해서 노동이 힘든 게 아니라 노동자가 자기 노동을 결정하지 못하는 부자유가 실존의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책의 원제가 LOST IN WORK : Escaping Capitalism이라는 걸 기억하자.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가 잃어버린 건 자기 결정의 자유이며,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앙상한 요약에 담지 못한 이 책의 개성과 매력, 저자의 깊이 있는 관찰과 풍요로운 언변을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작은 책이라 더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동화와 노동의 미래 - 탈희소성 사회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아론 베나나브 지음, 윤종은 옮김 / 책세상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GPT가 공개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성능과 활용가치에 흥미를 가지고 놀라워한다. 체스와 바둑 같은 특정한 분야에 한해서만 인간을 뛰어넘었던 인공지능이 이제는 스스로 학습하여 모든 방면에서 인간의 권능을 복제하고 뛰어넘어서고 있다. 좀 더 멀리 있을 것이라 여겨온 변곡점이 눈앞에 와 있는 듯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기 시작하는 변곡점이 가시화되면서 이에 대한 두려움도 일어나고 있다. 가장 큰 두려움의 이름은 실업이다. 골드만삭스는 10년 후 인공지능이 전 세계의 정규직 일자리 3억 개를 대체할 수 있다고 예측한다. 이러한 예측이 맞아 떨어진다면,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는 3억 명은 무슨 일로 먹고 살아야 할까? 노동자를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이 그 사용자에게는 풍요를 안겨주겠지만, 대체되는 노동자들은 빈곤으로 내던져질 것이다.

이러한 기술발전의 역설하면 거의 반드시 함께 언급되는 게 러다이트 운동이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증기기관이 뿜어내는 동력으로 지치지 않고 움직이는 기계가 보급되면서,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분노하여 기계를 파괴했다. 이 사건들은 기술발전을 가로막아 일자리를 지키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한 교훈을 담은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도입되어 구조조정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도 러다이트라는 딱지가 붙을 것이다.

21세기 러다이트로 조롱받고 싶지 않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독서가 답을 주지는 않지만, 두 책에 대해 논하며 고민을 더해보고자 한다.

 

2의 기계 시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슬론경영대학원의 두 교수가 공저하여 2014년에 출간됐고, 상당한 유명세를 얻은 책이다. 아마도 메시지가 대담하고 명확해서인 듯하다. 18~19세기 산업혁명이 제1의 기계 시대였다면, 1960년대 이후 집적회로와 인터넷, 소프트웨어 등의 디지털 기술로 인해 인류는 제2의 기계 시대로 들어섰다. 산업혁명이 세상의 풍경을 농촌과 방앗간, 마차에서 도시와 공장, 철도로 바꾼 크기의 변화만큼 엄청난 도약이 다시 한 번 인류에게 다가왔다. 1의 기계가 인간의 몸을 대체했다면, 2의 기계는 인간의 두뇌를 대신하여 일할 것이다. 가령 앞으로는 엑셀에서 복잡한 표와 함수를 입력하거나,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작성하는 일을 직접 하지 않을 것이다. 사용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만 입력하면 된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은 경제에 풍요와 동시에 격차를 주입하고 있다. 책에서 다루는 격차의 몇 가지 현상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1인당 실질 GDP(즉 평균소득)와 중간소득(총 분포의 50 백분위수에 있는 사람의 소득)의 격차가 1975년 이후로 가위처럼 계속 벌어지고 있다. 중간소득은 늘어나지 않는데 반해 상위 계층의 소득은 빠르게 증가해서이다. 이러한 계층 간 소득 격차를 설명하는 게 숙련 편향적 기술 변화라는 말이다. 대학 졸업자 이상의 노동자들은 소득이 늘어난데 반해 저학력 노동자들은 소득이 오히려 줄어든 현상이 덜 숙련된 노동의 수요를 감소시키는 기술발전 때문이라는 설명을 의미한다. 소득 격차의 확대에 관한 설명으로 GDP에서 자본이 아닌 노동으로 분배되는 소득을 의미하는 노동분배율의 감소도 있다. 실제로 1980년대 초 이래로 세계의 노동분배율은 크게 감소했다. 그리고 저자들은 노동을 대체하는 기술의 발전과 이로 인한 실업의 장기화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2의 기계 시대가 가져온, 앞으로 본격화될 풍요와 격차의 이중성에 대해 책은 기계와 함께 달리는 법을 제안한다. 기계로 대체될 노동에 매달리기보다 기계를 보완할 노동, 여전히 기계가 할 수 없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등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격차를 완화하고 풍요를 촉진하기 위해 더 많은 경제성장을 위한 정책들을 제안한다. 저자들이 제안하는 정책 중에 눈길을 끄는 건 일정 소득 이하의 사람들에게 국가가 소득을 보조해주는 역소득세이다. 적은 소득일지라도 일을 하면 보조금이 나오니 사람들의 근로 의욕이 향상될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근로세는 폐지하여 기계 대비 노동의 가격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도 말한다.

 

자동화와 노동의 미래

이 책은 미국의 좌파 학자가 쓰고 2020년에 나온 책이다(한국 출판은 2022). 좌파 학자답게 주류 담론 중 하나인 자동화 이론에 대한 비판이 목적이다. 자동화 이론이란 2의 기계 시대를 말하는 것처럼 기술 발전으로 인해 노동생산성이 빠르게 향상되어왔고, 앞으로도 더 빠르게 향상되어 노동에 대한 수요가 감소되어 결국에는 현재 형태의 노동은 대부분 사라진 (연구와 탐험, 예술 같은 진실로 인간적인 행위만이 남아있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고, 이러한 대전환에서 기본소득과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말한다. 기본소득은 좌파뿐만 아니라 우파에게도 인기 있는 정책인데, 대체로 우파는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복지정책에 들어가는 재원을 대신 기본소득으로 돌려 시장을 통해 필요한 서비스를 직접 구입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한다. 이러한 자동화 이론에 대해 저자는 세 가지 지점에서 비판한다.

첫째, 기술발전으로 인해 생산성 향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건 거짓이다. 오히려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감소하고 있다. 이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솔로 교수가 1987년에 지적한 이래로 경제학에서 생산성 역설로 불리는 현상인데,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도입에도 불구하고 생산성 개선의 속도가 1950~60년대보다 더 낮아진 것이다. 특히 고용의 다수를 차지하는 서비스업에서의 노동생산성 향상이 지지부진하며, 그동안 가장 빠르게 성장해온 제조업에서도 생산성 개선은 점차 느려지고 있다.

둘째, 노동저수요, 특히 전체 고용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드는 탈공업화의 주된 원인은 노동생산성 향상이 아니라, 생산성 증가율보다도 산출량 증가율이 더 줄어든 데에 있다. 생산성이 증가하여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해도 모두 팔아치울 수 없으니 고용을 줄여 저성장에 적응했고, 그 결과가 탈공업화였다(이를 증명하는 통계와 그래프가 함께 제시돼 있다). 그리고 제조업에서 산출량 증가율이 1970년대 이래로 줄어든 건 1950~60년대 일본과 독일에서 제조업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한 전 세계적인 과잉 생산능력 때문이다. 생산능력 과잉으로 비용이 상승해도 가격을 올려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못하는 경쟁압력이 강해져 결국 이윤율이 떨어졌다. 이윤율 저하로 투자가 줄어들어 생산성과 산출량 증가율도 함께 줄어드는 악순환이 굳어졌다. 70년대 이후 동아시아의 수출 주도 성장은 선진국 자본이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노동력이 저렴하고 규제받지 않는 공간으로 재배치된 덕분이며, 또한 그 결과로 제조업에서의 과잉 생산능력과 경쟁압력은 해소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셋째, 자동화 이론이 그리는, 노동이 현저히 줄어들거나 사라진 사회는 기술발전에 의해 저절로 오지 않으며, 기본소득이 촉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기술발전과 생산성 향상이 일자리 감소로 귀결되는 건 기술이 단순히 노동을 대체하기 때문이 아니다. 제 가격에 팔리지 않을지 모르는 상품의 생산을 무작정 늘리거나 고용을 유지하면서 노동시간을 줄여주는 게 경영자와 자본에게는 매우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윤 추구가 지배하는 경제구조 하에서 생산성 증가는 노동시간 대신 일자리를 줄이고, 쫓겨난 이들을 싼 임금에도 무엇이든 하려는 처지로 몰아넣고, 값싼 노동력으로 돈 가진 이들의 새로운 욕망을 자극하는 신규 산업(주로 서비스업)과 비공식 부문의 증가로 이어진다. ‘오징어 게임과 같은 이야기가 단순히 허구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현실이다. 따라서 저자는 자본에 대항하는 사회운동만이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입장 사이에서

두 책을 비교했을 때 2의 기계 시대는 기술결정론과 신자유주의에 가깝다. 1970년대 이후 경제적 격차의 확대가 디지털 기술의 발전 때문이며, 앞으로도 기술이 노동을 대체하는 건 불가피하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기술결정론이다. 또한 이러한 기술결정론을 앞세워 시장의 실패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앞으로도 팔릴 만한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거나 기계보다 싼) 노동력 상품이 될 것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이다. 이처럼 사회 주류를 대변하는 입장이 아마도 국제적인 유명세를 얻은 배경일 것이다.

반면에 자동화와 노동의 미래는 오늘날 저성장과 노동저수요, 불완전고용과 같은 경제적 문제의 기원을 시장원리 그 자체에서 찾는다. 그리고 사회운동을 통한 시장원리의 극복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다. 기술이 일자리를 파괴하는 건 비용 절감과 이윤 극대화의 목적으로 기술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적으로 합의된 목적, 가령 노동시간 단축이나 무상공급 확대 등을 위해서 기술을 새롭게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를 자유의 영역이 모두에게 열리는 탈희소성 사회라고 부른다. 인류의 오래된 이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국의 충돌 -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광해의 추억

 

영화 광해에서 가짜 광해군이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보내면서 백성만을 위한 마음으로 여의치 않으면 후금에 항복하라며, 명에 대한 사대의 명분보다 백성의 목숨이라는 실리를 우선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실리적인 태도를 내세우기 위해 호출되는 단골 메뉴인데, 그가 파견한 원정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특히 어렵게 양성한 조총부대를 잃어 조선의 국방력에 큰 구멍을 냈다는 게 반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가 큰 흥행을 하고, 현재도 여전히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회자되는 건 한반도를 둘러싼 어지러운 국제정세를 헤치고 나갈 실마리를 찾고 싶은 희망 때문일 것이다.

영화 광해가 개봉했던 2012년은 2008년 금융위기와 2012년 재정위기로 서방이 휘청이는 동안 중국은 큰 타격 없이 경제성장을 이어나가며, 2010년에는 일본을 추월하면서 G2로 위상이 달라지고 있는 해였다. 중국이 미국을 언제쯤 따라잡을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지며, 미국과 중국 중 어느 쪽에 줄을 서야하는 지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중국으로 패권 교체를 예상하며 이를 명청 교체기와 비교하곤 했다. 미국에게는 안보를 의지하고, 중국에게는 경제를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둘 다 내 꺼 하자는 실리외교를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문재인 정부의 전략적 모호성은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정당화되었다.

2012년 이후로 십여 년이 지난 현재의 분위기는 상당히 달라졌다. 2016년 사드 배치 결정과 뒤이은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반중감정이 고양되고, 무역갈등을 시작으로 미중간의 경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첨단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미국이 가로 막으려 하면서부터는,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라는 피크 차이나론도 나오고 있다. 2022년에 시진핑이 집단지도체제를 허물고 1인 통치를 공고화하면서 정치이념적 측면에서도 중국은 위신을 잃어가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과 푸틴의 러시아가 새로운 악의 축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반대편의 자유민주진영에게서는 과거 소련에 그랬던 것처럼 냉전적 열정을 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냉전적 열정에 한국도 달구어지고 있다. 반중정서는 더 심해진 것 같고, 정부는 중국을 조준하는 나토와 협력에 나서고, 반중 반도체 동맹 가입 여론이 높다. 멀리서는 중립과 실리를 외치다가 막상 갈등이 본격화되니까 몸과 마음이 전부 한 쪽으로 쏠리는 것 같다. 회색은 흑과 백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해서일까?

 

미국인가, 중국인가?

 

현재 국제정세와 한국 경제의 미래에서 이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여러 책들을 검색하다가 찾은 게 훙호펑이라는 저자였다. 훙호펑은 홍콩에서 태어났으며,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같은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교집합 같은 존재이다. 한국에는 그의 저서 두 권이 번역되어 있다.

202210월에 번역돼 나온 제국의 충돌은 근래 미중 무역갈등의 원인과 향후 전망을 다루고 있다. 미중갈등은 정치이념적 측면에서는 예외가 아니고 정상이다. 중국은 공산당이 권력을 독점하고 사회주의 헌법을 가진 국가이다. 같은 정치체제를 가졌던 소련은 미국과의 냉전 끝에 해체되었다. 그런데 미국은 어째서 중국을 자신이 주도하는 세계경제로 깊숙이 들여놓았을까? 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본격화된 중국의 경제성장에서 분수령은 90년대였다. 중국은 외국인 직접투자와 수출 중심의 경제로 도약하고자 했지만, 1989년의 천안문사건, 그리고 미국에서 인권을 내세우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출범이 발목을 잡았다. 소련을 잡기 위해 중국에 우호적이었던 공화당 정부와 달리 새로운 민주당 정부에는 냉전과 지정학적 고려라는 제약이 없었다. 그래서 1993518일 클린턴은 중국의 인권 향상 없이는 무역에서 최혜국 지위가 자동으로 갱신되지 않을 거라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만약 미중갈등이 시작되었더라면 중국과 세계경제의 모습은 지금과는 현저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러한 클린턴 행정부의 대중정책을 뒤집은 건 월가와 초국적 기업들의 로비였다. 중국 당국은 초국적 기업들에게 중국 시장의 개방을 통한 막대한 이익을 약속했고, 새로운 먹거리를 발견한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로비는 성공했다. 중국의 최혜국 지위는 갱신되었고, 2001년에는 WTO에 가입하며 자유무역과 수출에 힘입어 무시무시한 속도로 글로벌 탑 투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무시무시하게 성장한 중국의 수출산업이 미국의 제조 기반 기업들을 위협하는데 반해, 중국 시장으로 침투는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미국이 강세인 금융시장은 거의 열리지도 않았다. 또한 서방의 지적 재산권을 존중하지 않는 중국의 태도는 많은 기업들의 분노와 줄 잇는 소송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과거 중국과의 자유무역을 위해 로비에 나섰던 기업들이 이제는 반대로 돌아서며 백악관을 중국과의 투쟁으로 움직인다. 이처럼 제국의 충돌은 미중갈등을 자본 간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한다. 실제 정책결정을 변화시킨 구체적인 과정(로비), 중국이 자원 공급망을 조직하고 잉여 자본 수출을 위해 세력권을 형성하며 기존 미국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양상들을 뚜렷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정세는 저자가 보기에 1차 세계대전 전야 제국주의 경쟁, 특히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독일의 부상과 닮았다. 이는 사실 매우 두려운 역사적 유비이다. 영국과 독일의 경쟁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았으니까.

 

적대적 공생관계의 균열

 

제국의 충돌보다 먼저 출간된 차이나 붐은 중국의 경제성장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보는데 다음과 같다. 1650~1850년의 자본주의 없는 시장. 1850~1980년의 시초 축적. 1980~2008년의 자본주의적 호황. 경제적인 메커니즘만으로도 자본축적이 가능한 안정기에 앞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이 이뤄지며 축적 메커니즘이 형성되는 시기를 시초 축적이라고 하는데, 저자가 마오쩌둥 통치시기를 농촌을 희생시키며 자본주의적 호황의 여건을 조성한 기간으로 파악하는 건 흥미로운 시각이다.

또한 저자는 중국의 자본주의적 호황을 분석하며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수출 및 투자에 과다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수출은 미국의 무역적자에 의존하고, 미국의 무역적자는 중국의 미재무부 채권 구입에 의존하고, 덕분에 미연방정부의 재정적자와 군사력도 유지된다. 근래의 미중갈등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관계이다. 이러한 적대적 공생이 유지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분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중국 당국은 수출기업이 벌어든 달러를 거의 일정한 환율로 환전해주기 때문에, 무역흑자만큼 자동으로 통화 공급이 늘어나는 시스템이다. 이른바 양적 완화의 일상화인데 덕분에 돈은 넘치고 수익성을 따지지 않는 과잉투자(설비)와 부동산 상승이 구조화되었다. 이에 힘입어 당장은 경제가 성장해왔지만, 누구나 알든 거품은 붕괴하기 마련이다. 이 책이 쓰인 게 2015년인데 이후의 정세변화(중국의 성장률 하락, 부채위기 등)를 생각하면 신뢰가 가는 분석이다.

이제까지의 성장 모델이 중국과 세계에 불안을 더하는 불균형을 심화시켜왔기 때문에 훙호펑은 수출과 투자 대신 국내 소비를 진작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내부의 불평등 문제는 극심하다. 수 억 명의 농민공들이 낮은 임금을 받으며 권리 없는 노동을 참아내고 있다. 훙호펑은 불평등을 완화해가는 방향 선회가 위로부터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의 성장과 민주화가 진전되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중국의 대외팽창적 성장 모델이 방향을 튼다면 미국과의 관계도 갈등과 충돌이 아닌 방향으로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중국 관련 기사가 뉴스창을 채운다. 90년대 이후 미국이 독주하는 시기에 배우고 일하기 시작한 나에게는 중국의 부상은 무언가 비현실적인 현실이다. 정치체제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거부감도 든다. 그런데 미중갈등을 둘러싼 선택은 이제는 개인적 선호 이상의 문제이다. 대만해협에서의 긴장은 더해지고 있고, 앞으로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외교노선이 가장 주요한 이슈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냉정한 시각의 책들로 성급한 감정들을 식히는 것도 유익하겠다. 거대기업의 이익을 국가와 민족의 이익으로 포장하며 적대를 불러일으키는 선전과 근거 없는 예측과 처방에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우리 자신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중국의 빼앗긴 자들이 자신들의 몫과 권리를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응원하며 연대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이나 붐 - 왜 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광해의 추억

 

영화 광해에서 가짜 광해군이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보내면서 백성만을 위한 마음으로 여의치 않으면 후금에 항복하라며, 명에 대한 사대의 명분보다 백성의 목숨이라는 실리를 우선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실리적인 태도를 내세우기 위해 호출되는 단골 메뉴인데, 그가 파견한 원정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특히 어렵게 양성한 조총부대를 잃어 조선의 국방력에 큰 구멍을 냈다는 게 반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가 큰 흥행을 하고, 현재도 여전히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회자되는 건 한반도를 둘러싼 어지러운 국제정세를 헤치고 나갈 실마리를 찾고 싶은 희망 때문일 것이다.

영화 광해가 개봉했던 2012년은 2008년 금융위기와 2012년 재정위기로 서방이 휘청이는 동안 중국은 큰 타격 없이 경제성장을 이어나가며, 2010년에는 일본을 추월하면서 G2로 위상이 달라지고 있는 해였다. 중국이 미국을 언제쯤 따라잡을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지며, 미국과 중국 중 어느 쪽에 줄을 서야하는 지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중국으로 패권 교체를 예상하며 이를 명청 교체기와 비교하곤 했다. 미국에게는 안보를 의지하고, 중국에게는 경제를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둘 다 내 꺼 하자는 실리외교를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문재인 정부의 전략적 모호성은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정당화되었다.

2012년 이후로 십여 년이 지난 현재의 분위기는 상당히 달라졌다. 2016년 사드 배치 결정과 뒤이은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반중감정이 고양되고, 무역갈등을 시작으로 미중간의 경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첨단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미국이 가로 막으려 하면서부터는,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라는 피크 차이나론도 나오고 있다. 2022년에 시진핑이 집단지도체제를 허물고 1인 통치를 공고화하면서 정치이념적 측면에서도 중국은 위신을 잃어가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과 푸틴의 러시아가 새로운 악의 축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반대편의 자유민주진영에게서는 과거 소련에 그랬던 것처럼 냉전적 열정을 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냉전적 열정에 한국도 달구어지고 있다. 반중정서는 더 심해진 것 같고, 정부는 중국을 조준하는 나토와 협력에 나서고, 반중 반도체 동맹 가입 여론이 높다. 멀리서는 중립과 실리를 외치다가 막상 갈등이 본격화되니까 몸과 마음이 전부 한 쪽으로 쏠리는 것 같다. 회색은 흑과 백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해서일까?

 

미국인가, 중국인가?

 

현재 국제정세와 한국 경제의 미래에서 이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여러 책들을 검색하다가 찾은 게 훙호펑이라는 저자였다. 훙호펑은 홍콩에서 태어났으며,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같은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교집합 같은 존재이다. 한국에는 그의 저서 두 권이 번역되어 있다.

202210월에 번역돼 나온 제국의 충돌은 근래 미중 무역갈등의 원인과 향후 전망을 다루고 있다. 미중갈등은 정치이념적 측면에서는 예외가 아니고 정상이다. 중국은 공산당이 권력을 독점하고 사회주의 헌법을 가진 국가이다. 같은 정치체제를 가졌던 소련은 미국과의 냉전 끝에 해체되었다. 그런데 미국은 어째서 중국을 자신이 주도하는 세계경제로 깊숙이 들여놓았을까? 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본격화된 중국의 경제성장에서 분수령은 90년대였다. 중국은 외국인 직접투자와 수출 중심의 경제로 도약하고자 했지만, 1989년의 천안문사건, 그리고 미국에서 인권을 내세우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출범이 발목을 잡았다. 소련을 잡기 위해 중국에 우호적이었던 공화당 정부와 달리 새로운 민주당 정부에는 냉전과 지정학적 고려라는 제약이 없었다. 그래서 1993518일 클린턴은 중국의 인권 향상 없이는 무역에서 최혜국 지위가 자동으로 갱신되지 않을 거라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만약 미중갈등이 시작되었더라면 중국과 세계경제의 모습은 지금과는 현저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러한 클린턴 행정부의 대중정책을 뒤집은 건 월가와 초국적 기업들의 로비였다. 중국 당국은 초국적 기업들에게 중국 시장의 개방을 통한 막대한 이익을 약속했고, 새로운 먹거리를 발견한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로비는 성공했다. 중국의 최혜국 지위는 갱신되었고, 2001년에는 WTO에 가입하며 자유무역과 수출에 힘입어 무시무시한 속도로 글로벌 탑 투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무시무시하게 성장한 중국의 수출산업이 미국의 제조 기반 기업들을 위협하는데 반해, 중국 시장으로 침투는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미국이 강세인 금융시장은 거의 열리지도 않았다. 또한 서방의 지적 재산권을 존중하지 않는 중국의 태도는 많은 기업들의 분노와 줄 잇는 소송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과거 중국과의 자유무역을 위해 로비에 나섰던 기업들이 이제는 반대로 돌아서며 백악관을 중국과의 투쟁으로 움직인다. 이처럼 제국의 충돌은 미중갈등을 자본 간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한다. 실제 정책결정을 변화시킨 구체적인 과정(로비), 중국이 자원 공급망을 조직하고 잉여 자본 수출을 위해 세력권을 형성하며 기존 미국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양상들을 뚜렷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정세는 저자가 보기에 1차 세계대전 전야 제국주의 경쟁, 특히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독일의 부상과 닮았다. 이는 사실 매우 두려운 역사적 유비이다. 영국과 독일의 경쟁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았으니까.

 

적대적 공생관계의 균열

 

제국의 충돌보다 먼저 출간된 차이나 붐은 중국의 경제성장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보는데 다음과 같다. 1650~1850년의 자본주의 없는 시장. 1850~1980년의 시초 축적. 1980~2008년의 자본주의적 호황. 경제적인 메커니즘만으로도 자본축적이 가능한 안정기에 앞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이 이뤄지며 축적 메커니즘이 형성되는 시기를 시초 축적이라고 하는데, 저자가 마오쩌둥 통치시기를 농촌을 희생시키며 자본주의적 호황의 여건을 조성한 기간으로 파악하는 건 흥미로운 시각이다.

또한 저자는 중국의 자본주의적 호황을 분석하며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수출 및 투자에 과다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수출은 미국의 무역적자에 의존하고, 미국의 무역적자는 중국의 미재무부 채권 구입에 의존하고, 덕분에 미연방정부의 재정적자와 군사력도 유지된다. 근래의 미중갈등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관계이다. 이러한 적대적 공생이 유지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분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중국 당국은 수출기업이 벌어든 달러를 거의 일정한 환율로 환전해주기 때문에, 무역흑자만큼 자동으로 통화 공급이 늘어나는 시스템이다. 이른바 양적 완화의 일상화인데 덕분에 돈은 넘치고 수익성을 따지지 않는 과잉투자(설비)와 부동산 상승이 구조화되었다. 이에 힘입어 당장은 경제가 성장해왔지만, 누구나 알든 거품은 붕괴하기 마련이다. 이 책이 쓰인 게 2015년인데 이후의 정세변화(중국의 성장률 하락, 부채위기 등)를 생각하면 신뢰가 가는 분석이다.

이제까지의 성장 모델이 중국과 세계에 불안을 더하는 불균형을 심화시켜왔기 때문에 훙호펑은 수출과 투자 대신 국내 소비를 진작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내부의 불평등 문제는 극심하다. 수 억 명의 농민공들이 낮은 임금을 받으며 권리 없는 노동을 참아내고 있다. 훙호펑은 불평등을 완화해가는 방향 선회가 위로부터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의 성장과 민주화가 진전되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중국의 대외팽창적 성장 모델이 방향을 튼다면 미국과의 관계도 갈등과 충돌이 아닌 방향으로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중국 관련 기사가 뉴스창을 채운다. 90년대 이후 미국이 독주하는 시기에 배우고 일하기 시작한 나에게는 중국의 부상은 무언가 비현실적인 현실이다. 정치체제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거부감도 든다. 그런데 미중갈등을 둘러싼 선택은 이제는 개인적 선호 이상의 문제이다. 대만해협에서의 긴장은 더해지고 있고, 앞으로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외교노선이 가장 주요한 이슈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냉정한 시각의 책들로 성급한 감정들을 식히는 것도 유익하겠다. 거대기업의 이익을 국가와 민족의 이익으로 포장하며 적대를 불러일으키는 선전과 근거 없는 예측과 처방에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우리 자신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중국의 빼앗긴 자들이 자신들의 몫과 권리를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응원하며 연대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