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행은 진정 마르크스 경제학자인가?

 

내수경제가 대안이다?

 

12월 27일자 한겨레에 실린 책 소개 기사를 보니, 지승호 전문 인터뷰어가 김수행 교수를 인터뷰해 책으로 만든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에서, 김수행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나?
“내수 중심의 경제를 한번쯤 해 보라는 겁니다.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을 하다 보면 세계경제가 어려워 수출이 잘 안 되면 금방 타격을 입잖아요. 내수시장을 키운다는 것은 사실은 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것과 같아요. 사회보장제도를 확장해서 서로 나눠 가지는 식으로 정책을 바꾸면 내수시장이 확 커진다구요. … 이를 통해 수출산업이 아니라 내수에 기반을 둔 산업이 하나씩 일어납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구요.”
“양극화 해소→내수기반 확충→경제의 안정적 성장→인권유린과 증오 해소→사회적 타협의 확대로 나가는 것이 유럽 선진국들이 걸어온 길”이라는 그의 생각은 “자신들의 수익률을 유지하고 올리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줄이고 노동자에게 양보를 강요해 점점 더 야만적인 사회를 만들어 온” 미국·영국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간 스웨덴 모델에 가깝다. 다른 말로 하면 국가와 시민의 역할이 커지는 “계획참여 경제나 계획참여 자본주의”다. (한겨레 기사 인용)

 

내수경제를 부양해야 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현재 한국의 경제문제가 수출의 비중이 커서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에 취약해서라든가, 총수요의 부족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에 대한 취약성도 결국 (수출수요의 감소로) 총수요를 부족하게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니, 김수행 교수의 “내수경제가 대안”이라는 주장은 현재의 한국경제의 위기는 총수요의 부족 때문이라는 분석으로 귀결된다. 
 


‘총수요의 부족이 원인’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적인가?

 

총수요의 부족은 초과공급된 상품의 판매를 어렵게 해, 결국 자본가들로 하여금 생산규모를 축소시키게 하고, 잉여노동력을 방출시키게 해 실업을 늘린다. 이는 연쇄적으로 초과공급자에게 원자재, 중간재 등을 판매하던 자본가의 판로를 제한시키고, 또한 실업의 증가로 구매력 있는 소비자가 감소함으로써 총수요의 추가적인 위축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총수요의 위축에 따라 경기전망이 악화되면서 자본가들에 있어 투자는 불안정하고 모험적인 것으로 여겨지면서 투자수요는 더욱 위축된다. 그리고 실업의 증가와 경기전망의 악화에 면한 소비자들도 미래의 불확실성에 처해 지갑을 닫게 된다. 이러한 나선형적 경기하강을 통해 경제는 더욱 어두운 터널로 돌입하게 된다.  

 

이것이 케인즈주의자들의 공황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이고, 따라서 케인즈주의자들은 총수요가 위축되는 초기 국면에 정부가 적절하게 개입해, 추가적인 수요위축을 막고 경기를 부양시킴으로써, 다시 자본가의 금고와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해 성장과 완전고용을 달성하자고 한다.

 

그렇다면 총수요는 왜 갑자기 부족해지는 것일까? 케인즈주의자들은 대개 유동선 선호나 투기에 따른 활황과 그 붕괴, 이를 가능케 한 금융의 과대성장 등을 주요이유로 뽑는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 경제학은 경제공황의 원인을 자본의 운동 그 자체에서 찾는다. 자본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운동의 지배적인 동인은 자본의 축적 그 자체이다.

 

가치를 증식하려는 자본의 축적이 착취의 형태(절대적·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와 이에 따른 새로운 생산기술의 도입과 노동과정의 변형, 그리고 산업순환과 산업예비군의 양산(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내적 모순의 발현(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등을 결정한다.

 

따라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당연히 공황같은 경제현상의 분석을 총수요 같은 개념이 아니라, 자본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김수행 교수의 언급은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 마르크스 경제학자라는 스스로의 언명과 달리 오히려 케인즈주의자 같다.

 

물론 이 말이 케인즈주의적 분석은 무조건 옳지 않다는 도그마적 선언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답게 말하라는 것이다.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라는 책 제목과 달리 실제 내용은 케인즈주의적 대안이라니, 얼마나 요상한가? <케인즈로 한국경제를 말하다>라고 책 제목을 고쳐 짓는 것이 양심적이다. 

 


김수행 교수가 말하는 장기불황의 원인 : 소비위축과 주주가치 극대화

 

김수행 교수가 얼마나 마르크스 경제학자답지 않은지에 대해서 다른 사례를 들어보겠다. 아래는 민중의 소리 12월 22일자인, “죽은 산업생산이 경제 전체를 끌어내리고 있다” 라는 제목의 김수행 교수 인터뷰 기사이다. 일부를 다소 길지만 인용하겠다.  

 

“내가 볼 때는 단순히 금융부분에서의 위기가 온 게 아니고 경제체제 전체로서의 위기가 왔다. 금융을 살리려 해도, 이자율을 낮추더라도 경제가 안 살아나서 아래로 빠진 것이다. 산업생산 부분이 회복을 못해서 전체를 끌어당기고 있다.”
- 산업생산이 죽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950-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에서 복지국가가 매우 잘 확립이 돼 있었고 노동계급의 힘이 굉장히 컸다. 모두가 나누면서 더불어서 산다는 개념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는다고 신자유주의자들은 생각했다. 1980년 이후 대처와 레이건이 대표적이다. 오히려 부익부 빈익빈이면 자본주의가 더 발달한다고 봤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회보장제도를 깎는 일이었고, 그 다음에 노동운동을 못하게 노동법을 개악하고 해고를 늘리고 노동의 유연화를 강조했다. 이렇게 해버리면 금방 나오는 것이 국내시장이 확 좁아지는 것이다.
실제로 누진세에 의해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고 병원이나 학교나 실업수당이나 저소득에 대한 보조나 이런 게 굉장히 늘어난다. 이게 사실 국내수요를 만들어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안되니 선진국의 국내시장이 좁아지면서 세계시장도 좁아진다. 물건이 안 팔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계화 전략이 나왔다. 선진국 정부가 무역자유화, 외환자유화 얘기가 그래서 나온거다. 산업생산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금융산업이 확대됐다. 97년 한국공황이 왔을 때 당장 우리 주식시장을 다 잡고 부를 빼가는 식으로 했다. 금융활동, 주식 채권 외환을 사고팔아 이윤을 보는 것, 파생으로 이윤 보는 것, 소비금융은 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주머니 돈을 훑어내는 사기적인 것이다. 금융은 실제로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 금융부분의 이윤은 생산은 없고 전부 주머니를 터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기관투자가들이 거대 주식회사의 최대주주가 됐다. 이들은 산업기업이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R&D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배당을 내놔라, 주가를 올려라 해서 이익을 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경영진에게 스톡옵션을 주고, 노동유연화 시키고, 나중에 가서는 회계조작해서 단기순이익을 올려 기업이 많이 망하게 했다. 산업 육성이 안됐다. 그러니 아무리 금융에 돈을 줘도 안 올라가는 것이다.”

 

김수행 교수는 현재 세계대공황의 진원지를 금융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도 “산업생산 부분이 회복을 못해서 전체를 끌어당기고 있다”며, 1974-75년 공황 이후 자본주의적 생산이 겪고 있는 장기불황(1950~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에 비교한 연간 성장률의 하강을 의미한다)이 대공황 분석의 핵심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공리로 굳혀진 사실이다.  

 

그러나 김수행 교수의 마르크스주의자다운 면모는 딱 여기까지이다. 이어서 김수행 교수는 세계대공황의 원인을 아래같이 두 가지로 말하는데, 이는 진보적일지는 몰라도 마르크스주의적이지는 않다.  

 

① 신자유주의(“사회보장제도를 깎는 일이었고, 그 다음에 노동운동을 못하게 노동법을 개악하고 해고를 늘리고 노동의 유연화를 강요했다”)에 의한 소비위축
(*김수행 교수는 “국내시장이 좁아지면서 세계시장도 좁아진다”라고 표현하는데, 사회보장제도나 노동운동은 소비수요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투자수요까지 포괄하는 시장이라는 용어보다는, ‘소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김수행 교수의 주장을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적절한 듯하다.)

 

② 주주가치 극대화(주주이익 우선)에 따른 기업의 단기이익 극대화 추구
(*위 인용문 중 “두 번째로 기관투자가들이 거대 주식회사의 최대주주가 됐다 ~ 산업 육성이 안 됐다” 부문 참조) 

 

위 설명방식은 분명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 ①은 복지확대 및 노동운동 강화가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근거로 역할 할 수 있고, ②도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 지역사회, 소비자 등의 모든 이해관계자가 기업경영에 관계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일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설명방식은 한국의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자주 주장된다. 특히 ②의 주장은 금융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대안연대회의 등에 의해 빈번히 소개됐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고, 그 자체로도 (부분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의미에서) 틀린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분석들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케인즈주의자, 제도학파 등에 의해서 주로 주장된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올해 흥행했던 장하준 교수의 시각도 김수행 교수의 설명방식과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그리고 소비위축과 주주가치 극대화가 장기불황의 원인이라면,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소비팽창이 탈출구라는 소리인데, 과연 그러할까?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소비팽창이 탈출구가 될 수 없는 이유

 

주주가치를 제한하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경제위기 대안의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주주가치 극대화를 쫓는 영미식 모델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경영이 소유로부터 더 독립적인 독일·일본 모델도 동시적인 공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겠다. 


그리고 소비팽창이라는 케인즈주의적 해법이 답이 될 수 없는 것도, 우리는 케인즈주의적 해법이 이미 실패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인위적인 소비진작정책은 줄곧 짧은 붐을 낳고는 거품붕괴에 직면했다.  

 

이에 대해 김수행 교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소비진작정책은 구조적인 양극화라는 부실한 기반 위에서 집행되었기 때문에 치유책이 될 수 없었다고 답할 수 있겠다. 그리고 복지확대와 고용안정, 임금팽창이라는 총수요 확대정책은 견실한 기반으로 작용하여, 경제가 다시 견조한 성장과 안정이라는 레일 위를 달리도록 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 같다.  

 

그러나 김수행 교수가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적하는, 양극화를 유발한 복지축소, 노동유연화, 임금억압은 그 자체로 자본을 살리고, 경제를 팽창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조치로부터 자본이 어떠한 이익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은 부를 직접적으로 노동으로부터 자본으로 이전시키는 약탈이었고, 이로부터 자본은 당연히 이익을 누렸다. 그런데 왜 세계자본주의는 장기불황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반노동 정책은 개별적인 자본에게는 이익일지 몰라도, 경제 전체적으로는 총수요를 위축시켜 불황을 장기화하는 것이라고 답하는 것은 극도의 어리석음이다. 이 말이 참이라면 이제까지의 자본주의는 어떠한 공황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황기에는 의례 실업의 증가와 임금감소 등 소비위축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본은 공황기의 조건으로부터 착취율을 높이고 이윤율을 개선하여, 다시 힘찬 축적을 위한 조건을 확보한다. 자본의 축적이 재개되면 새로운 공장이 세워지고, 고용이 창출된다. 개별적인 자본의 수익성 개선과 이에 힘입은 축적의 재개는, 사회 전체적으로 투자수요와 증대와 이에 의한 부가적인 소비수요의 증대를 가져와 경제 전체를 회생시키는 것이다. 공황은 이러한 메커니즘으로 극복돼 왔다(물론 이 말이 1950년 이후의 케인즈주의적 공황극복책이 효과적이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 세계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착취적인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반노동 공세로도 극복이 안 되는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정책도, 인위적인 수요진작책정책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1974-75년 공황 이후 세계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점의 극복 없이, 김수행 교수가 말하는 양극화 해소를 통한 총수요 부양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김수행 교수가 제안하는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정책들은 전부 자본의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것들이다. 자본의 수익성이 악화되면 당연히 자본가의 투자능력과 의지도 좁아진다. 따라서 경제는 투자수요 위축에 직면해 하강하게 된다. 이러한 하강경향을 어떻게 조정할 것(가령 개별자본의 이윤에 대한 조세 수취 강화와 이에 기반한 사회적 투자 등)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총수요 부양만 말하는 것은 경제학 초짜나 저지를 실수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세계자본주의를 늪에 빠트리고 있는 구조적 문제란 무엇인가?

 


장기불황의 원인은 자본의 과잉축적에서 구해져야 한다

 

과잉자본이란 모든 자본이 가치증식하기에는 서로가 장애가 되는, 모든 자본이 안정적으로 축적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자본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과잉자본은 자본이 순환하는 과정(화폐-생산수단/노동력-생산-상품-화폐′)에서 취하는 화폐, 설비, 노동력, 상품 등의 형태에 따라, 투자의 기회를 잡지 못하는 과잉화폐, 가동률 저하를 겪는 과잉설비, 노동과정에 들어가지 못하는 과잉노동력, 창고에 진열대에 가득 쌓이는 과잉상품 등의 다양한 형태로서 존재한다. 

 

과잉자본의 상태에서는 기존에 자본으로 하여금 활발한 축적을 가능하게 해주였던 이윤율이 저하한다. 기존의 적절한 수준의 이윤율이 유지되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상품이 생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상품판매를 위해 가격인하에 경쟁적으로 나서야 하며, 또는 비용압박에 직면해서도 쉽사리 가격을 올리지 못하는, 그대로 이윤의 감소를 감수해야 되는 상황에 처한다. 과잉자본과 과잉생산은 짝패이며, 이는 자본에게 있어 이윤율 저하로 드러난다.

 

과잉자본 하에서의 이윤율 저하는 우선 생산성이 낮고, 높은 비용으로 생산하는 자본을 먼저 압박해 도산의 위기에 처하게 한다. 그리고 과잉생산, 과잉설비의 상황에서 자본은 새로운 기계의 도입, 공장건설 등에 거의 나서지 못하게 된다. 설비투자는 점점 모험적이 것이 되고, 따라서 자본가의 실제 투자능력보다도 못 미치는 산업에서의 과소투자가 발생한다. 이윤 중 더 많은 부분이 새로운 노동력과 설비의 구매에 투하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금융에 투하된다. 즉 배당과 이자를 낳는 주식과 채권의 구매, 앞으로 가격이 오를 것으로 보이는 자산, 상품의 투기에 화폐가 몰려든다. 산업에서의 과소투자와 맞물러 금융이 과대성장한다.

 

경쟁의 격화로 자본의 폐기 혹은 이윤을 낳지 못하는 부문에서의 자본철수가 본격화되면 이에 따라 과잉자본에 고용돼있던 노동력도 방출되고, 산업순환은 침체에 빠진다.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생산영역에서의 침체는 곧바로 금융부문에서의 위기로 전염된다. 제한된 이윤획득의 기회에 비해서 너무나 많이 몰린 투기자금이 만들어낸 거품은 폭발하고, 금융공황이 발생한다. 금융공황은 신용을 위축시키며, 채무와 신용으로 기계를 돌리던 자본가들을 파멸로 몰아간다. 따라서 산업부문도 공황에 빠진다. (*이는 공황이 일어나는 여러 과정들 중의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런데 현재 세계자본주의는 위에서 묘사한 과잉자본의 상태에 직면해 있다. 지금 세계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과잉자본의 상태는 특히 자동차산업의 과잉설비에서 잘 드러난다. 1980년대부터 과잉설비의 문제점을 노출한 세계자동차산업의 과잉생산능력(생산능력-생산대수)은 1990년에는 1,300만대 수준이었고, 2001년에는 2,300만대 수준까지 증가했다. 09년에는 과잉생산능력이 2,900만대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과잉생산능력의 존재로 자동차산업의 가동률은 60~70%대(정상수준 80%)에 머물러왔고, 이는 유휴설비에 투자된 자본의 현금화, 즉 자본의 순환을 지연·단절시킴으로써 자동차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켜왔다.

 

김수행 교수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라면 당연히 과잉생산, 과잉자본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잉생산, 과잉자본은 바로 자본의 축적과정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의 발현임을, 즉 자본의 축적 자체가 위기와 공황의 이유임을 말해야 한다. (*자본의 축적이란 종자돈을 불리듯이 자본이 자신의 덩치를 불려가는 것을 말하고, 과잉축적은 과잉자본을 만들어내고 있는 자본축적의 상태를 의미한다.) 과잉축적론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설명이 자본주의가 내포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과잉축적에 대한 이해는 왜 자본 자신이 자기 자신의 한계인 점과, 자본주의 모순의 필연적인 발현에 대해서 인식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천을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극복으로 모아질 수 있게 해준다. 

 

 

과잉축적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러나 과잉축적론이 경제위기에 대한 설명에 있어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과잉생산, 과잉자본은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위기가 드러나는 현상이지, 원인 그 자체는 아니다. 과잉자본과 자본주의적 경제위기는 사실상 동의어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잉생산, 과잉자본을 낳는 것이 자본의 축적 그 자체인데, 왜 자본축적이 과잉축적으로 돌진하게 되는지는 언제나 구체적인 분석을 요구한다.  

 

가령 세계자동차산업에서 지속적으로 과잉생산능력이 증대해온 것은 세계적인 자동차업체들이 수요가 늘어나는 지역시장(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설비를 증설(특히 현지공장 건설)해왔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과잉설비에는 한국이 한 몫을 톡톡히 담당했는데, 과잉중복투자의 전형이었던 삼성자동차나, 지금 위기의 와중에도 체코와 러시아에 신규공장을 건설 중인 현대차의 공격적인 경영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현실의 경쟁은 자본을 과잉축적으로 내몬다. 이 과정에서 경영자의 공격적 성향이나 잘못된 판단은 과잉축적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동차산업에서 과잉설비의 또 하나의 이유는 자동차산업이 고용, 생산 및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전후방 연관효과가 커서 경제위축을 우려한 국가의 개입으로 낡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설비의 폐기가 지연돼왔기 때문이다(이번의 GM 구제금융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국민경제에서 자동차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른 정부개입과 세계시장에서의 무한경쟁이 과잉설비를 구조화시킨 것이다. 

 

세계제조업 전체 수준에서의 과잉설비에 대해서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인 로버트 브레너는 미국·일본·유럽 간의 국제적 경쟁 격화를 지적하며, 그 이유들 중 하나로 경쟁자의 신설비 도입에 직면해 이윤율 저하를 겪는 자본가들이 막대한 자본이 투자된 고정자본의 폐기 대신, (어차피 고정자본은 매몰비용이기 때문에) 유동자본 대비 평균이윤율만 얻을 수 있다면 해당분야에 잔류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을 든다. 즉 자본으로 기능하기 위한 최소자본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자본의 청산과 이동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생산영역의 모순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자들은 1970년대 이후의 장기불황과 이윤율 저하에 대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과잉축적이나 이윤율 저하 추세의  핵심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잘 정리돼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점이 마르크스 경제학자가 장기불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포기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김수행 교수의 이율배반적인 결함은 어떻게 설명돼야 하나?

 

김수행 교수가 여러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포기하는 것은, 그의 이론적 활동에서의 성실함에 비교하면 상당히 의외이다. 김수행 교수가 한국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뛰어난 학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의 이율배반적 결함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나? 그런데 이의 설명에서 김수행 교수의 개인적인 특성을 이유로 드는 것은 어떤 교훈도 주지 못할 것이다.  

 

김수행 교수의 공황론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면, 그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을 공황론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수행 교수의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이해는 벤 파인과 로렌스 해리스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파인과 해리스의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해석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은 경험적 예측이 아니라, 이윤율 추이에 대한 모순되는 두 경향(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경향과 이를 상쇄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며, 실제의 이윤율 추이는 모순되는 경향들의 힘과 배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비되는 해석이 근본주의자들의 것인데, 근본주의자들은 상쇄경향에도 불구하고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때문에 이윤율은 저하하기 마련이며, 현실에서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관철된다고 본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주기적 공황의 설명에 직접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에 반하여 김성구 교수 등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은 자본주의의 장기 추세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은 이론적 실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단적으로 파인과 해리스는 1970년대 이후의 장기불황에 대해서 의미있는 연구서를 낸 적이 없다. 그들의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해석이 이론적으로는 아무리 엄밀하더라도, 실제의 경제분석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도움을 거의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매번의 공황을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야기하는 모순들의 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즉 모순되는 두 경향을 계량화하기도 힘들뿐더러, 사실 두 경향은 장기적인 과정과 시기를 통해 관철되는 것인데, 대략 십년주기의 공황을 매번 이러한 힘들의 변화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공황의 설명에 직적 적용하는 해석방식으로는 20~30년에 걸친 장기불황과 같은 장기추세의 설명에 있어서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 적용의 어려움이 현실의 분석에 있어 김수행 교수를 무능하게 하고, 따라서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설명들을 차용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만약 우리가 김수행 교수의 이론활동에 알게 모르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면, 김수행 교수가 의존하고 있는 이론틀(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고유한 해석)을 교체하거나, 혁신해내는 것일 게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라면 마르크스주의자답게 말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자의든 타의든) 권위자를 자처하며, 장기불황의 원인과 대안에 대해 신자유주의니 내수경제니 운운하는 것은 영 아니올시다이다. 바로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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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 대한 한 TV토론회에서 어느 대학 교수가 정부쪽 토론자로 나와 협상의 정당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을 보고, 화가 치민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여당 의원도 나왔었는데, 여당 의원도 인정하는 문제점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쌓아온 지식을 내세우며 협상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모습을 보고, ‘종’이 ‘주인’보다 더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어용 지식인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이지만, 정말 화가 나는 것은 학자적 양심을 지키는 것보다 권력의 눈에 들기를 욕망하는 지식인이 요즘은 차고 넘친다는 점이다.


영혼이 없는 지식인의 정치 참여

  지난 대선과 총선을 전후해 ‘폴리페서’(정치 참여 교수)라는 말이 유행했다. 선거철만 돌아오면 정치권에 진출하는 대학교수, 낙선해도 대학에 쉽게 돌아오는 교수 등의 이야기가 언론에 오르내렸다. 이명막 정부 출범 때 16명의 국무위원 후보 가운데 7명이 대학 교수 출신이었고, 4월 총선에서는 42명의 대학 교수 출신이 출마해 19명이 당선됐다(전국구 포함). 그리고 총선에 출마했다 낙선한 뒤 학교로 돌아오려 했던 한 서울대 교수가 논란이 되었고, 급기야 서울대 교수 81명이 ‘폴리페서 윤리규정’ 건의문을 대학에 제출했다. 교수직을 정치권을 맴돌다가 끈 떨어지면 돌아올 둥지 정도로 여기는 뻔뻔한 교수들에 대한 제재는 당연하겠다.

  그런데 대학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의 정치, 공직 참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정치, 공직 참여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 참여 과정이 지식인의 철학과 신념의 실천 과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스스로를 정치권의 장식과 도구로 전락시키며, 입신 영달하는 과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식이다.

  “한승수 현 국무총리. 그는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8월 상공부 무역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으며 정권과 연을 맺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던 때였다. 한 국무총리는 1988년 5월 민정당 공천을 받아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89년 12월 제34대 상공부 장관에 취임했다. 노태우 정권 때다. 문민정부로 분류되는 김영삼 정권 때는 제15대 주미 대사, 제18대 대통령 비서실장, 제3대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지냈다. 19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00년 무소속으로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다음해인 2001년에는 최초의 민주정부라 일컬어지는 김대중 정권에서도 외교통상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한 국무총리는 2002년 10월 다시 한나라당에 입당, 16대 국회의원직을 마쳤다. ‘전두환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까지’ 주요 임명, 선출직 공직을 두루 거쳤다. 현재 국무총리 자리까지 포함하면 여섯 개 정권에 걸쳐 있다.”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91쪽)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의 조사에 따르면 역대 정부의 지식인 출신 장관 182명 중 63명(34.6%)이 한승수 현 국민총리처럼 군사정부(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 이어 문민정부(김영상,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공직을 맡았다고 한다. “이 조사는 지식인의 정권 참여가 자신의 철학과 소신을 펼칠 수 있는 정부에 참여하는 건강한 방식이 아니라 소신과 무관하게 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정부에 자신의 지식을 파는 ‘지식 상인형’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같은 책, 95쪽)


지식인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폴리페서 문제를 비롯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 이 책은 2007년 4월부터 7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같은 제목의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기획 시리즈 기사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기획 시리즈는 민주화 20년을 맞은 2007년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은 어떤 존재고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이를 소재로 17회에 걸쳐 연재된 것이었다. 이 기획기사에 대한 경향신문 편집국장의 평가를 직접 들어보자.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그 양과 질에서 우리 언론 사상 최초로 시도한 지식인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다. 팀장과 세 명의 기자가 악전고투 끝에 만든 지식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자 변론문이다. 연재 기간 동안 지식사회를 긴장시킨 지식인 건강진단서다.” (같은 책, 6쪽)

  이러한 평가가 결코 자족적인 것이 아닌 것이, 이 기획기사는 2007년 7월에 한국기자협회의 ‘이달의 기자상 기획보도 부문’에 선정됐고, 이어 11월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 매스컴위원회의 ‘올해의 가톨릭 매스컴상 신문 부문’에 뽑혔다. 그리고 2008년 1월에 ‘제39회 한국기자상 기획 보도 부문 수상작’으로도 선정됐다. 이는 내용의 시의성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지식인들과 인터뷰하며 문제의식을 다듬고, ‘지식인 지도’와 ‘문민, 군사 정권 넘나든 장차관 분석’, ‘지식인 설문’, ‘해외 박사 분석’ 등의 실증자료들을 직접 만든 특별취재팀의 쉽지 않은 노력에 힘입은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이번에는 책의 형태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지식인의 죽음

  책의 서문은 한국의 지식인처럼 명예와 돈과 권력을 모두 갖는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지식인은 흔히 전문 지식을 보유하고 담론에 참여하며 담론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자로 정의된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인은 그 이상이다. 교수로 좀 이름이 나면 쉽게 장관, 총리의 고위 공직을 차지한다. 이러한 한국의 습속은 유별나다. 미국에도 교수 출신 장관이 있지만, 교수에서 바로 장관이 되지는 않는다. 과장급으로 가서 경력을 쌓은 뒤 대학으로 돌아갔다가 그 다음 국장급 자리를 맡는 식이다. 교수라도 공직자로서의 경력을 축적해야만 고위직을 맡을 수 있다. 또한 언론에서는 무슨 문제만 생기면 교수들을 찾는다.

  “그렇다면 이 땅의 지식인은 자신들에게 이런 가치를 부여한 사회에 응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책이 출발점으로 삼은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책은 바로 지식인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를 들어보자.

  “민주화 20년이 넘었다. 군사정권은 타도되었다. 누구에게나 분명했던 악과 싸우는 시대가 끝난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으로 진영 대결이 종언을 고했다. 선과 악의 선명한 이분법적 전선이 사라졌다. 이제 사회는 외세에 억눌린 민족을 구원하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이끄는 안내자, 민중의 해방의 선도자이자 민중 이익의 수호자, 위대한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서의 지식인을 원하지도 않고 그들도 그렇게 자처하지 않는다. 저항적 지식인은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것이 지식인의 첫 번째 죽음이다.

  지식인의 두 번째 죽음은 그 첫 번째 죽음의 결과다. 지식인은 더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다. 지식인은 민주화 과정을 통해 이미 공공하게 구축된 지배 질서를 전복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지식인은 이 체제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보루가 되었다.” (같은 책, 11쪽)

  지식인의 저항적-사회비판적 역할 방기가 곧 지식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식인은 이제 사회에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는 독립된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기득권을 향유하는 특권 계급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정치권력, 경제권력의 품 안으로 안겨가 권력의 전위대, 선동가로 전락하고 있다.

  그런데 지식인에게 여전히 저항적-사회비판적 역할을 기대하고, 이에 근거해 그들을 평가하는 것은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는 과거의 유물이지 않을까? 책은 아니라고 말한다. 민주화 20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것은 성장지상주의, 시장주의, 미국이며, 따라서 이러한 획일적 가치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지식인의 역할이 여전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민주화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상이었던 ‘저항적 지식인’이 우리 시대 지식인의 표상으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고 말한다. “민주화 20년을 마감하고, 신보수주의 시대가 꽃을 피는 이 시점에 저항과 부정만이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대안 체제의 구축”이라고 주장한다. “지식인들은 대항 헤게모니를 위한 진지를 구축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책의 문제의식이 도달한 결론이다. 즉 책은 지식인의 권력지향적 행태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 지식인에게 다시 시대의 갈등과 분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돈에 신념을 파는 지식인

  책의 주요한 문제의식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책은 본문에서 기자다운 실증적 분석과 지식인 자신의 고백적 담론들(기고글)에 근거해 지식인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의 세부적인 항목들을 작성하고 있다.

  본문은 10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부터 3장까지는 총론 격으로 민주화 20년 동안의 지식인의 풍경과 위기를 말한다. 올해 초 퇴임한 김수행 서울대 교수의 ‘현대마르크스경제학’ 수업 풍경을 20년 전과 비교한 프롤로그에서 시작해, 주요 지식인 104명을 좌,우축과 민족,탈민족축으로 된 좌표에서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 ‘지식인 지도’와 진보,보수,중도 지식인 74명에게 ‘지식인의 위기’에 대한 생각,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식인과 저술 등을 설문한 결과도 실었다.

  4장부터 10장은 각론으로 분야별로 지식인이 처한 위기를 진단한다. 정치권력과 지식인, 경제권력과 지식인, 문화권력과 지식인 등 사회권력과 손을 잡은 지식인의 모습이 충격적이다. 미국 박사가 지배하는 한국 대학사회의 문제점과 공룡화된 학술 진흥재단의 학문지원 시스템이 어떻게 지식인들의 활동을 압살하고 있는지도 점검했다.

  특히 정치권력과 지식인 사이의 잘못된 관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폭로된 재벌과 지식인 사이의 ‘유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고발은 무척이나 충격적이다. 재벌이 어떻게 지식인 사회를 식민화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대기업 자문 교수들의 임무는 ‘건강한 기업 활동’을 위한 ‘자문’에 응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업 측에 비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됐을 때 우호적인 언론 칼럼을 쓴다든지, 자신의 학회나 학교 인맥을 이용해 기업에 필요한 우군들을 동원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지식인 출신 사외 이사들의 역할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또한 한 대학교수의 “요즘 교수들 중에 돈 3천만 원만 준다고 하면 기업 측에서 원하는 그대로 결론을 내 주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자조는 암울하다.


“한국 지식사회학의 역사에 우뚝 설 대작이요, 쾌거”

  책에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탐구 대상이 대학교수에 집중되는 바람에 지식인 범위가 상당히 한정되면서, 지식인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지 못했다. 특히 ‘시간강사’로 불리는 비정규직 교수 문제, 박사 출신 실업자 문제를 고려하면, 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지식인이란 전체 지식인 사회의 상층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지식인 사회의 양극화에 대한 분석과 함께, 교수직이 연줄에 따라 폐쇄적으로 배분되는 대학구조가 지식인 사회를 어떻게 불구화시키는지에 대한 분석이 빠진 점도 아쉽다.

  그렇지만 이런 아쉬운 점들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강준만 교수의 평에 따르면 “한국 지식사회학의 역사에 우뚝 설 대작이요, 쾌거다.” 미비점을 보완한 ‘속편’을 기대한다. (*한편 강준만 교수는 책이 다음 기회에 보완해야 할 점들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이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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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는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읽었다. 화장실에서나 틈틈이 보려고 구매한 것이었는데, 읽으며 어찌나 지적 쇼크와 감동을 받았던지 잠까지 줄여가며 읽어버렸다.

그런데 ‘지적 쇼크’라는 표현은 사실 무척이나 과장된 것이다. 먼저 이해가 돼야 쇼크를 받던가 말든가 하지, 대충 글자들을 훑으며 중간중간 간혹 이해되는 구절들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끔 ‘어라, 이것 대단한데!’ 라는 생각도 하고, 이러면서 겨우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뿐이다.

그래도 다시 읽으며 중간중간 든 단상들을 꿰매어 정리해보면 어떤 진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또 읽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중간에 포기했다. 바디우의 ‘진리’, ‘진리과정’, ‘사건’ 등의 개념을 대략이라도 파악하지 않고서는 더 읽어봐야 별로 나올 것도 없을 것 같아서였다. 바디우가 ‘사도 바울’에서 이 개념들에 대해 직접 서술해놓았으면 다른 책들을 참조해야 하는 수고는 안 들었을 것이라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일단 책장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곧장 떠올린 게 바디우의 ‘조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바울’ 마지막 페이지에 “이 책(‘조건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명료해서 ‘존재와 사건’을 위한 입문서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광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전부터 ‘새물결’ 출판사의 ‘이행총서 시리즈’는 구입해두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터라 바로 구매리스트에 등록해 놓았다. 그러나 사고 싶은 물건을 곧바로 살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지 못한 터라 구매할 날만을 손꼽으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제 문득 바디우의 ‘진리과정’이라는 개념을 혹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2’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사유 -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 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이다.” -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2

여기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라는 유명한 말도 생각을 전개해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유는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그 현실성과 힘을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실천을 통해서 그 현실성과 힘을 증명한 사유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의식 가운데서는 어떤 사유도 자신의 진리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실천을 통한 사유의 진리성 증명을 ‘검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검증이란 실천의 의미를 단지 진리의 ‘보증자’로만 한정짓는 것이다. 즉 의식에서 생산된 어떤 사유의 잠재적인 진리성을 실제로 확인하는 것만이 실천의 역할은 아니다. 실천의 의미를 품질검사관이 확인도장을 찍는 절차 정도로 축소시키는, ‘검증’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관점은 실천이 또한 진리가 생산되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은폐한다. 실천은 단순히 공정을 마친 제품을 검사하는 절차가 아니다. 실천은 그 자체가 진리의 생산공정인 것이다.

이 말은 순수한 의식이 결코 진리의 생산 공간일 수 없다는 말이다. 실천 이전에 순수한 의식의 영역에서 진리를 생산하는 올바른 방법론이란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하다. 진리가 생산되는 곳은 의식과 물질이 상호교통하는 실천이라는 장소이다.

이 말의 의미는 사실 무척이나 까다롭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사유의 현실성을 믿고서 행동한다. 그러나 사유의 현실성은 오히려 실천이라는 계기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알고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동하고서야 알게 된다. 어쩌면 모든 새로운 도전은 오인(자신이 진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착각)의 산물이다. 진리의 주체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자신의 실천으로써 스스로 증명해보여야 한다. 주체는 진리공정에 개입한다.

주체가 진리공정에 개입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흔한 주/객 인식론에서 주체에게 대상은 오로지 ‘소여’로만 관계한다. 주체는 관조할 뿐이다. 그러나 실천의 인식론에서 주체는 대상을 해체하고, 구성하며 대상에 자신을 기입한다.

여기에 죽어서야 헤어질 것 같은 뜨거운 연인이 있다. 그런데 사랑에 불타고 있는 남자의 친구가 이들의 사랑을 내기에 걸었다. 여자는 다른 남자의 유혹에 굴복할 것이며, 남자는 질투에 미쳐 여자를 파멸시키리라고. 내기를 건 친구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여자를 유혹했고, 마침내 성공해내었다. 그리고 이를 슬그머니 남자에게 흘렸다. 그러자 남자는 친구의 예상대로 여자를 파멸시켜버렸다. 그들의 사랑은 ‘가짜’였던 것이다.

남자의 친구는 자신의 생각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해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친구의 유혹이 없었다면 연인은 자기들 사랑의 진정성을 자신들의 삶을 통해 온전히 증명해냈으리라는 것이다. 친구의 ‘진리’는 그의 개입을 통해 ‘진리’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삼류소설같은 이야기가 모든 진리공정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진리가 증명되는 상황이란 주체의 개입을 통해서만 출현할 수 있다. 사유의 현실성과 힘의 증명은 주체적 개입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근거할 때 진리란 단순히 주체 너머의 대상 또는 물질의 의식에의 반영일 수 없다. 의식에 반영되는 대상, 물질이란 이미 주체가 기입된 것이고 실천의 산물인 것이다.

잠깐 다시 삼류소설로 돌아가면, 친구의 개입을 통해 생산된 진리란 다음같은 것이다. 하나, 연인의 불타는 사랑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파멸의 잠재성. 둘, 파멸의 잠재성을 활성화해낸 개입의 유효성.

이제 비약의 비약을 거듭해, 나는 모든 진리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보고일 뿐이라고 말하겠다. 1)현상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잠재된 힘. 그리고 2)잠재된 힘을 해방시킬 주체의 역능. 따라서 진리의 대상이란 ‘현상’이 아니라, 현상을 주조해내는 이면의 ‘힘’이다.

이런저런 별 쓸모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는데,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바디우의 ‘진리’, ‘진리과정’, ‘사건’ 등의 개념을 이런 생각에 비추어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 것인가라는 것이다.

진리가 실천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고, 주체의 개입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은 어떤 계기를 통해 진리를 생산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앞서 “인간은 알고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동하고서야 알게 된다. 어쩌면 모든 새로운 도전은 오인(자신이 진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착각)의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진리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오인 혹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에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믿음의 대상이 ‘사건’이고, ‘사건’을 ‘믿음’으로써 진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게 ‘사도 바울’의 내용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거의 알지도, 고민도 안 해본 이야기를 하려니 글이 자꾸 엉키고, 스스로도 창피한 마음이 들지만 좀 더 용기를 내서 더 써내려가도록 하겠다.

바울에게 사건은 ‘예수의 부활’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을 믿고, 이러한 믿음에 근거한 실천을 통해 부활이 의미하는 ‘힘’의 현실성을 증명해내었다. 즉 진리를 생산해내었다. 인간은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진리를 말이다. 사건은 주체를 통해 보편화된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인간의 부활로서 회귀한다. 진리란 보편화된 사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 믿음이 없다면 실천도 없었을 것이요, 그렇다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는 순전히 우화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진리의 주체는 사건을 믿는 주체이기도 하다.

바울의 사건이 예수의 부활이었다면, 혁명가의 사건은 무엇일까? 난 혁명가에게 있어 사건은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의 의미는 억압받는 민중이 스스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가는 ‘민중의 자기발전’을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근거해 역사에 개입해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개입으로써 역사는 해방된 사회를 향해 진군해간다는 진리를 증명해낸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질곡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라는 것, 사회주의의 필연성에 대한 사상은 사회주의 혁명가의 개입으로써만 진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난 바디우가 이러한 사상과 사회주의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이념을 우주에 대한 총체적 인식으로 파악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 인식을 이미 진리로 여긴다면 우리는 결코 ‘진리’를 즉 사회주의를 생산해낼 수가 없다. 이러한 철학적 태도 내에서 사회주의자는 대기주의로 빠지거나, 소련붕괴 같은 사건에 사상을 청산해버리거나, 무지자에 대한 지배를 재생산하게 된다.

사회주의자는 사상에 믿음으로서 관계해야만 진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은 실천하는 사회주의자를 정초하는 사건이다. 믿음의 대상이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믿음의 대상이 아닌, 이론적 판단의 소재로 전락시키는 순간 그는 결코 진정한 사회주의적 주체가 될 수 없다.

이제 정리와 한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마치겠다.

“사회주의적 주체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믿는 주체이며, 주체적 개입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의 힘과 현실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자이다.”

91년 청산주의가 사회주의 진영을 휩쓸 시, 가장 똑똑했던 이데올로그들이 가장 먼저 청산하고 떠났다고 한다.
똑똑하고 잘난 것은 사회주의적 주체를 재생산하는데 있어 전혀 필요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스팅을 하기 이전에 내게 ‘사건’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문득 떠오른 게 ‘광주민중항쟁’이었다. 어린 마음에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알았을 때 흐르는 눈물과 손에 베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는데, 슬픔과 분노 가운데서도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했던 최후의 투사들이었다. 난 그때 인간은 ‘자기’와 ‘이익’이 아닌 무언가를 위해 싸우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체험했다. 더욱이 그들은 너무나도 평범했던 사람들이었다.
5월의 광주를 생각하면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임) ‘사도 바울’은 또한 역사에서 간혹 나타나는 예측하지 못한 대중의 급진화에 대한 이해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 같다. 집단적 ‘믿음’에 의한 집단적인 주체화. 그리고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진리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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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쾃하라! 저항하라! 창작하라!


장면 #1

  2004년 7월, 철거가 예정된 청계천 삼일 아파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스며들었다. 그들은 ‘풍찬 노숙’을 하던 이들이다. 개발에 맞서 벌였던 철거 싸움도 끝이 나고 거주민들의 이주도 끝나버린 텅 빈 건물, 청계천 삼일 아파트가 10여 명의 노숙자들에 의해서 스쾃되었다. 깨어진 창문은 수리되고 쓰레기가 가득 담긴 집들은 말끔하게 청소되었다. 배관 기술을 가진 이는 화장실과 욕실을 수리하고, 목수였던 이는 문짝을 다듬었다. 자신의 몸에 익은 기술로 자신이 살아갈 집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이들에게 ‘남의 건물에 무단으로 들어가면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나와 있는 형법 319조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문제를 타인의 힘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지 않고, 스스로 현실의 벽을 넘어서는 그들에게 있어서, 법적인 테두리는 이미 의미가 없었다. (김강,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269-70쪽)

장면 #2

  드디어 2004년 8월 15일 오후 4시, (1998년에 공사가 중단된 채 약 7년째 53%의 건설공정만을 마친 채 도시의 흉물로 목동 한복판에 서 있던) 예술인회관 건물에서 “시민에게 문화를! 예술가에게 창작실을!”이란 현수막이 내려짐과 동시에 성명서가 낭독되었다. 20여 명의 예술가들은 15일 새벽 예술인회관 옥상으로 진입했고, 같은 날 오전 예술인회관 밖에서는 페스티벌이 개최되고 있었다. 예술인회관 외부에서 콘서트와 ‘출입금지’ 리본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페스티벌을 개최하던 예술가들이 회관의 입구 쪽으로 행진했다. 그들이 예술인회관 정문에 도착했을 때, 회관 내부에 있던 예술가들은 집단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같은 책, 251쪽)


스쾃은 불법행위에 불과한가?

  스쾃(SQUAT)이라는 말은 ‘무단점거’ 즉, ‘어떠한 허가도 권리도 없는 점유’를 의미한다. 앞의 장면들처럼 자기 소유가 아니지만 비어있는 토지나 건물에 들어가서 주거住居나 작업의 목적으로 그 공간을 사용하는 것이 스쾃이다. (장면 #2는 창작공간의 확보를 위한 ‘예술스쾃’의 한 사례인데, 예술스쾃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소개하겠다.) 과거에는 대도시 곳곳에 있었다가 지금은 사라진 판자촌이 한국에서의 스쾃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쾃은 부언할 필요도 없이 사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이다.

  그런데 스쾃을 단순히 불법행위로, 따라서 법 집행의 강화로 소멸시켜야할 범죄행위로 볼 수 없는 것이, 스쾃은 한편으로는 근대화 나아가 자본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스쾃은 개인의 일탈행위로 치부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현상이다. 스쾃을 사회적 해결을 요구하는 사회문제로서 인식하는 것은 스쾃을 이해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쾃이 타인의 소유권을 침해하고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얻고자 하고 또는 지키고자 하는 것은 비와 추위를 피하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주거의 공간이다. 그리고 스쾃은 인간이 인간 이하의 삶으로 떨어지기 전에, 아니면 나락에서 올라오기 위해 인간다운 삶을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즉 스쾃은 생존권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절박한 직접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스쾃의 존재 자체는 그 사회가 인간다운 삶의 최소조건인 주거의 권리를 안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스쾃은 기본적으로 도시에서의 주거공간 부족 또는 주거공간에 대한 접근성 악화로 인해 발생하는 도시현상이다. 도시의 정상적인 발전을 상회하는 급속한 도시인구 증가로 인한 주택부족이나 주거비용 상승은 종종 도심 곳곳이나 주변부에서의 대규모 스쾃을 야기한다. 주거공간에서 배제된 극한 상황에 직면하여 비어있는 사유지, 공유지를 점거해 살 집을 스스로 짓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스쾃은 유럽과 한국에서의 급격한 산업화 시기에 발견되며, 또한 현재의 제3세계 도시들에서 매일 관찰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현재 제3세계 도시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농촌의 붕괴와 이에 따른 대규모 이농, 그러나 이를 흡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 주택, 공공시설의 문제로 극심한 성장통을 앓고 있다(마이크 데이비스, 『슬럼, 지구를 뒤덮다』 참고)

  그런데 한국의 판자촌이 경제발전에 따라 점차 사라져갔듯이, 스쾃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빈터에 스스로 집을 짓는 방식의 스쾃은 여전히 비닐하우스 집이라는 모습으로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빈 건물의 점유와 같은 방식 등의 스쾃에 대한 유인도 여전히 강하게 존재한다. 이는 단적으로 노숙인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주거권조차 박탈당하는 최악의 도시빈곤이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항시적인 요소로 남아있다는 점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도시빈곤의 극단적인 모습들(가령 노숙)을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확대시키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할수록 도시로 경제적 기능 및 인구가 더욱 집중된다. 여기에 투기적 수요가 겹쳐 부동산이 지속적으로 상승한다. 그리고 부동산 상승은 대개 소득 증가를 앞지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도시빈민은 주거비용 상승에 갈수록 취약해진다. 이어서 경기침체로 인한 소득붕괴가 겹치면, 도시빈민은 주거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한국에서는 IMF위기 때 벌어졌으며, 현재 미국에서는 ‘서브프라임 난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택담보대출을 갚지 못해 거리로 내쫓기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부동산 상승과 함께 재개발사업 역시 도시빈곤을 악화시키는 주범이다. 재개발지역으로 대개 선정되는 낙후지역들은 보통 저소득 세입자들의 주거기능을 한다. 낙후돼 있는 만큼 임차료가 낮아, 저소득 계층이 도심에서 살아갈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들이 점차 상업용이나 고급 주거용으로 개발되면서 저소득 계층이 도시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공간들이 사려져가는 것이다.

  다음으로 무제한적인 공간소유로 인한 사용되지 않는 공간의 증가 문제가 있는데, 개인이나 기업 또는 자치단체, 정부가 직접 사용하려는 목적이 아닌 이윤추구, 투기의 목적이나 비합리적 정책의 결과로 토지, 건물들을 소유함으로써 이런 공간들이 장기간 사용되지 않은 채 방치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개인이나 회사가 당장 수익의 발생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이후의 개발이익을 노리고서 장기간 소유하는 부동산이나, 자치단체, 정부가 어떤 정책적 목적으로 매입했다가 집행이 취소되거나 미뤄지면서 사용되지 않는 공간들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공간들은 소유주에 의해서 사용되지는 않지만 배타적인 소유권으로 인해,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만큼 도시 빈곤층을 포함한 시민 전체를 위한 공간들은 축소돼 간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길 위에서 사는 시대’, ‘노숙자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사용되지 않는 공간은 오히려 늘어만 가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스쾃이 사회적으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득 증가를 상회하는 부동산 상승과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없는 재개발사업 그리고 무제한적인 소유로 인한 공간낭비 등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내재적 경향으로서 공간소유의 불평등과 극단적인 도신빈곤을 만들어내는 원인-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이러한 힘들은 더욱 강력해지는 것 같다. 지금도 수천의 노숙인들이 서울거리에서 고통받고 있다.


스쾃 - 자본주의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무단점유를 의미하는 스쾃은 사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이다. 그러나 스쾃은 공간소유의 구조적인 불평등과 불안정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질곡 가운데서 주거공간의 상실이라는 극단적인 도시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 유지와 생존권적 차원에서 제기하는 직접행동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불법으로 치부할 수 없는, 사회적 해결을 요구하는 사회문제이다. 사회적인 조건들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중의 하나인 주거권을 위협한다면, 주거권을 지키기 위한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는 정당하다.

  그리고 스쾃은 생존권적 요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자본주의에 대한 주체적이고, 도발적인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즉 스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의 불법적인 방식을 통한 쟁취를 통해, 주거의 권리조차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심각성에 대한 폭로를 수행하며, 또한 물건에 대한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로서의 사적 소유권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사적 소유권에 대하여 스쾃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소유권은 언제나 주거권 또는 사회적 필요에 대해서 우선하는가?
  둘째, 소유권은 사용되지 않는 공간에 대한 사용의 권리를 배제하는가?

  소유권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쾃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운영원리를 건드는 것이다. 그리고 스쾃은 만약 주거권을 포함한 인간의 기본권과 소유권이 서로 배치된다면, 소유권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소유주가 정당한 사용계획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당장 그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사용이 허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스쾃은 소유주와 무단점유자 간의 법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공간과 권리의 분배에 대한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그리고 스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양에 대한 사회적 의지를 재는 바로미터가 된다.

  이와 관련된 프랑스 사회의 경험은 의미심장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대량의 파괴로, 전후 프랑스 사회는 심각한 주거지 부족문제를 겪어야 했다. 당시 프랑스 전체 인구의 28%에 해당하는 4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주할 공간이 없었다는 유엔 조사는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수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극한 상황은 대규모 스쾃운동을 낳았고, 또한 후일 더욱 중요해지는 법령을 낳았는데, 바로 45년의 ‘주거문제의 해결을 위한 임시 특별 법령’이다. 이 특별법의 주된 내용은 프랑스 전역의 빈 건물에 대해서 일정 정도의 조사 기간을 거친 후 정부의 권한으로 징발해 주거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주거권의 보장을 위해 소유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으로서, 이후 스쾃운동에 합법적인 성격을 부여하려는 활동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재해석된다.

  40, 50년대 이후에도 프랑스 스쾃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주거의 불안정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하며, 주거권의 보장을 위해 “할 수만 있다면 합법으로, 해야만 한다면 불법이라도” 계속 투쟁해왔다. 그리고 드디어 1995년에 ‘드라공가의 승리’를 쟁취한다. 95년의 대선을 1년 앞둔 시점에서, 여러 사회단체들이 파리 드라공가의 빈 건물을 점거하여 주거문제의 급진적인 해결을 요구했는데, 이에 당시 파리시장이었던 자크 시락(이듬해 대통령으로 당선됨)이 45년의 징발에 대한 특별법을 현실에 적용시킬 것을 결정한 것이다. 이로써 프랑스 사회는 주거 불안정성에 대한 최소의 사회적 안전장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스쾃운동이 프랑스 사회에 던진 소유권의 절대성을 향한 문제제기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합리적인 연대의 응답이었던 것이다(프랑스 스쾃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1장을, 한국에서의 스쾃운동에 대해서는 같은 책 5장 참고).


예술스쾃 -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주체적인 물음

  앞서 소개한 ‘장면 #2’는 한국의 스쾃 예술모임인 ‘오아시스 프로젝트’(이하 오하시스)가 2004년 8월 15일 목동 예술인회관을 스쾃한 사건의 한 장면이다. 오아시스는 2004년 3월에 발족했고, 첫 프로젝트로 부실한 문화행정으로 인해 7년간이나 방치되어 있던 예술인회관을 스쾃하여,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스쾃이 논의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어서 오아시스는 2005년에는 홍대거리에서의 ‘예술포장마차’와 마로니에 공원 주변의 문예진흥원 소유의 한 건물을 스쾃한 ‘오아시스 동숭동 프로젝트-720’을 기획하여, 스쾃을 통한 일상공간의 복합예술공간으로의 탈바꿈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그리고 오아시스는 2007년 스페인 아르코 아트 페어에 초청되어 마드리드에 오아시스의 예술공간을 설치하고, ‘예술스쾃 국제연대’(A.S.I.L)를 제안해 세계의 스쾃예술가들과의 교류와 연대를 강화하는 활동들을 펼쳤다(오아시스 대한 더 많은 내용은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5장을 참고).

  스쾃이 주거공간을 상실한 도시빈민에 의한, 생존권적 요구이자 자본주의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라면, 예술스쾃은 창작활동만으로는 생존을 이어갈 수 없는 예술가들에 의한, 비어있는 공간의 창작공간으로의 사용에 대한 요구이자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주체적인 물음과 태도이다.

  그런데 도시빈민들의 생존을 위한 스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식의 폭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 사회에서도, 예술가들에 의한 스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예술스쾃이 1981년의 ‘아르 크로쉬’라고 이름 붙은 스쾃을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먼저 고급스럽고 엘리트적인 것으로 알아왔던 예술가들이 도시빈민들처럼 스쾃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실상 최저생계비보조금(수입이 아예 없거나, 너무 적은 사람 등을 위해 국가에서 최저생계비를 제공하는 프랑스의 제도)으로 연명해왔던 것이다. 창작활동만으로 자신의 창작실과 생계를 유지하는 예술가들은 예술시장에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졌거나, 제도권에 안착한 소수의 사람들에 불과하다. 그렇지 못한 다수의 예술가들은 창작공간의 부재와 생계로 인해 창작활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항상 처해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창작활동의 계속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적으로 창작할 공간이 필요하고, 이런 필요성을 절감한 예술가들은 비어 있는 공간을 창작을 위한 사용의 권리를 요구하며 스쾃한 것이다.

  예술스쾃에 있어 무엇보다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이 예술가들의 창작할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이다. 주거권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중의 하나라는 데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그러나 스쾃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창작을 위한 공간사용의 권리를 스스로 정초해야 했다. 그리고 스쾃예술가들이 창작권의 정당성을 정초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 그리고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주체적으로 물음을 던져왔고, 자신과 예술의 정체성을 새롭게 재구성해왔다.

  스쾃예술가들에 있어 창작활동과 예술의 전제는 무엇보다 자율이다. 자율은 생명 그 자체이다. 자율이 없는 창작과 예술은 죽은 것에 불과하다. 자율에 의한 창작과 예술만이 생명을 갖으며, 그래서 생성할 수 있다. 그리고 생성하는 예술만이 예술의 전위적인 사회적 기능 즉, 낡고 병든 것을 혁파하고 새롭고 대안적인 사유와 감성을 창조해내는 역할을 온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예술가의 자율성이란 시장과 자본, 제도에 의해서 이미 포획되어 있는 기만적인 허상에 불과하다. 예술가들은 팔리기 위한 예술, 스폰서를 만족시키기 위한 예술, 제도에 의해 이미 틀지어진 예술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스쾃예술가들은 스쾃을 통해 시장과 자본, 제도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그래서 예술가의 진정한 자율을 정초할 수 있는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고 본다. 스쾃은 자본주의의 그 지배하는 힘이 무력화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스쾃예술가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의 전위적 기능은 스쾃이라는 형태를 통해서만 보존되고 발휘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스쾃예술은 반자본주의적이고 대안적인 생활방식의 구성에 기여함으로써 역시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스쾃은 예술가를 위한 자율적인 공간일 뿐만 아니라 누구나 일상에서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열려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스쾃예술가들은 예술스쾃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략적으로 스쾃에서의 자신들의 창작활동과 그 성과들을 지역사회에 개방하고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해왔다. 예술은 누구든지 참여하고 향유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 가운데서 예술공간과 일상공간, 그리고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예술을 규정해온 통념 즉, 고급스럽고 엘리트적인 면모들은 예술스쾃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해체된다.

  파리시에 위치한 스쾃 ‘알터나시옹’은 스쾃예술가들이 2000년 3월에 한 은행 소유의 빈 건물을 점거해 만든 것이며, 2005년 9월 철거에 의해 막이 내렸다. ‘알터나시옹’의 예술가들은 예술 장르들 간의 상호교류와 경험을 일상적 삶 속에서 나누며, 모든 이들이 예술과 문화에 친숙히 접근하는 것을 발전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찾아오는 미술가와 음악가, 연극가, 무용가들에게 창작하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을 무료로 제공했으며, 대부분의 전시와 공연 역시 무료로 개방했다. 또한 도서관, 채식주의 식당, 지역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연극 교실, 요가 교실 등 사회문화시설을 함께 운영했다. 이러한 노력들로 ‘알터나시옹’은 시민들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했으며, 시민들에게 사랑받았다(다양한 예술스쾃의 사례들은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3장 참고).

  스쾃예술가들이 요구하는 비어있는 공간의 창작활동을 위한 사용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동의는 스쾃예술가 자신들의 능동적인 활동에 의해 달려 있을 것이다. 스쾃예술이 전위적 역할을 온전히 실천하고, 일상으로의 침투를 통해 시민들의 예술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면 스쾃은 정당한 사회적 실체로서 인정받을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스쾃

  이미 살펴보았듯이 스쾃은 무엇보다 기본적인 권리의 쟁취를 위한 직접행동이다. (창작활동의 지속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창작공간의 요구 역시 기본권적 요구로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다운 삶의 안정적인 보장에 계속 실패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쾃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폭로이며, 이를 스스로 극복하고자 하는 투쟁이다. 또한 스쾃은 사회적 필요에 따른 소유권의 제한을 급진적인 방식으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반자본주의적이며,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성격 때문에 스쾃은 소유주와 무단점유자 간의 법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공간과 권리의 분배에 대한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따라서 스쾃에는 새로운 대안사회의 운영원리에 대한 맹아적인 논의가 이미 기입돼있다. 공간과 공간에 대한 권리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의 논의는 앞으로의 사회는 어떠해야 한다는 논의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스쾃운동은 앞으로도 사적 소유권의 절대성을 향한 문제제기와 공간과 권리의 분배에 대한 급진적인 요구를 특징으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의 저자는 스쾃운동의 잠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규격화된 삶이 ‘상품’으로 등장하는 시대에, 스쾃은 규격의 틀을 흔들리게 하며, 위엄있는 삶의 태도를 회복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빈민, 여성, 가족, 인종, 노동, 생태, 자율, 이주노동, 노숙인, 예술, 문화 등 모든 종류의 운동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것 또한 스쾃이다. 안주하지 않는 삶, 움직이는 삶, 인간전형을 끊임없이 재창초하는 것, 저항의 양식을 새로이 창안하는 것, 예술가의 정체성을 언제나 재구성하는 것 모두가 스쾃에 포함된다. 삶의 전 과정에서, 예술의 전 과정에서 ‘창작’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정체성의 다른 표현이라고 전제할 때, 삶과 예술은 스쾃이라는 실험실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실험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모든 종류의 생산은 주류적 가치에 대항하며, 새로운 문화를 출현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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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김수행.신정완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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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 포기되지 않는 이상
서평 :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노동자의 성경이라는 『자본론』의 국내번역자이자 손꼽히는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김수행 교수가 2007년 2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을 한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김수행 · 신정완 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는 김수행 교수가 정년퇴임을 맞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책이다. 김수행 교수를 포함하여 신정완 교수, 정성진 교수 등 총 16명의 글들을 모았다. 집필자들을 대표해서 신정완 교수는 책의 의의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

 “김수행 교수님의 정년퇴임을 더 뜻있게 맞기 위해 교수님의 제자와 후배들이 힘을 합해 정년기념책자를 발간하게 되었다. 5년 전 교수님께서 회갑을 맞으셨을 때에도 제자와 후배들이 함께 『현대 마르크스경제학의 쟁점들』을 발간한 경험이 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교수님께서는 논문집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대중적 책자를 발간하고 책의 주제는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로 정하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주셨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의례 있는 한 대학교수의 정년기념책으로 여기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에 관심있거나 공부하는 사람들치고 김수행 교수가 쓰거나 번역한 책들을 안 읽어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와 보급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김수행 교수이다. 그리고 최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자는 부쩍 그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하는 책들은 비례해서 나오지 않고 있는 환경에서, 여러 좌파 학자들이 참여한 책의 출간은 반가운 것이다.
 책은 총 4부 1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사회주의 이론’에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 문제와 관련된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논의들을 살펴보고, 2부 ‘사회주의의 역사와 현실’에서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경험(소련,중국,북한,유고)을 비판적으로 점검해본다. 3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제’에서는 독일과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운동의 이념과 실천을 살펴보고, 4부 ‘새로운 사회를 위한 초석들’에서는 부문별로 대안사회의 지향가치와 제도 틀 등을 탐색한다. 크게 보면 이론, 역사, 대안의 순서로 책의 구성이 짜였다고 할 수 있다.


잘 씹히는 소화 잘 되는 책, 그러나 더해져야 할 점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대중적 책자’를 발간하고자 했다는 기획의도는 성공한 것 같다. 이론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사회주의 용어에 조금은 친숙한 사람이나, 다양한 경제체제에 관심을 가져왔던 사람들이라면 읽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요컨대, 관심의 문제이다). 또한 대안사회를 큰 줄기로 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하나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다. 게다가 각 부문의 전문연구자들에 의해 쓰인 글들을 말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아쉬운 점들 가운데 하나는 사회주의의 역사와 현실을 다룬 장들이 다소 불만족스럽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들 중에 중요한 하나는 사회주의 체제들이 자본과 계급사회로부터의 인간해방의 이상을 (명목상일지라도) 내세웠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인간해방의 이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이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의 원인들은 무엇이었는지, 이로부터 어떤 교훈을 이끌어내야 하는지를 궁금해 한다. 그런데 역사적 사회주의를 다루고 있는 장들의 관심은 상당히 협소하다. 서술이 현실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의 자원배분의 효율성, 성장, 경제적 유인구조 등의 양적, 구조적 측면에만 한정돼 있다. 그래서 그 경제체제 아래에서 노동했던 사람들의 ‘실존’은 느낄 수 없다. 사람들의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된 노동’과 어떻게 같고 달랐을까? 체제는 사람들에게 어떤 욕구를 심어주고, 어떤 충족수단을 얼마나 제공했을까? 사람들은 체제에 어떻게 실망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물음들에는 메아리치지 않는다. 물론 이 책이 경제학자들에 의해, 대안적 경제체제를 모색하기 위해 쓰인 책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불만은 괜한 트집잡기인 것 같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이상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정교한 경제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경제체제의 메커니즘에만 골몰해 (결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 사람과 경제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체제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있는가?)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신고전파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는 변별선이기도 하다.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의 분발이 요구된다.
 다음 아쉬운 점은 책을 다 읽고도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은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유를 탐색해본다면 하나는 대안사회 상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점, 다른 하나는 같은 책에서조차 다양한 조류의 대안들이 충돌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첫 번째와 관련해서는 책 자체의 한계라기보다는 현실 사회주의 붕괴로 위축된 대안사회의 모색이 이제야 다시 기지개를 피기 시작한 정세의 한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대중운동이 발전하고, 대안세계의 모색이 대중운동과 상호교통하는 과정에서 극복될 것이다. 새로운 사회의 상이 모호한 두 번째 이유는 오히려 책의 장점이 될 수도 있는 요소이다. 책에는 대략 사민주의 경향(스웨덴 모델), 시장사회주의 경향, 사회주의 계획경제 경향 등의 대안들이 (조용하게) 경합하고 있다. 다양한 대안사회의 상들을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집필자의 말을 인용하면,

 “필자들은 글의 내용에 관련하여 전적인 자유재량권을 가지고 집필에 임했다. 필자마다 이념적 입장이나 학문적 관심사에서 작지 않은 편차가 있었기에 사전 협의를 통해 각 장의 내용을 조율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이 책의 주제에 비추어볼 때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시장사회주의인가? 사회주의 계획경제인가?

 특히 시장사회주의론과 사회주의 계획경제론 사이의 이론적 경쟁이 눈에 띄는데,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지는 독자들이 해야 할 판단일 것이다. 시장사회주의론은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사회주의의 자명한 요소라고 보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계획경제론을 비판한다. 중앙집중적 계획은 경제의 복잡다양성이 증가할수록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심각하게 왜곡시킬 수밖에 없고,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필수적이라고 시장사회주의론은 바라본다. 따라서 시장사회주의론은 국유화나 계획경제가 사회주의적 요소라고 파악하지도 않으며, 대신 시장(즉 분권적 의사결정)과 사회형평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형태를 모색한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몰락은 시장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근거로 활용되곤 한다.
 반면에 사회주의 계획경제론은 시장과 사회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한다. 시장이 강요하는 무정부적인 경쟁은 경제단위로 하여금 투입/산출의 효율성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게 해, 결국은 축적을 위한 생산 즉 자본주의로 회귀시킬 것이다. 따라서 시장을 지양하기 위한 생산수단 소유의 집중, 이에 조응하는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의 불변요소라고 주장한다. 또 생산의 의식적인 통제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소련경제의 몰락이라는 조건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론은 소련의 교훈을 반영해 스스로를 보완해가고 있다. 이러한 보완의 노력 중의 하나로 참여계획경제론이 있다. 소련경제는 비민주적인 명령경제 부류였다고 비판하는 참여계획경제론자들은 ‘참여’를 지렛대로 삼아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계획을 활성화하려 한다. 그래서 보다 더 많은 사회구성원의 참여를 끌어내며 효율성을 유지할 아이디어들을 다양하게 내놓고 있다.


반자본주의의 파토스는 꺼지지 않는다

 어쩌면 글을 읽다 사회주의라는 단어에 눈을 뗀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사실 동구권 붕괴 이후에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은 없다는 생각은 너무나 널리 퍼져 있다. 새로운 사회, 사회주의에 대한 모색은 쓸모없어 보인다. 새로운 사회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질문에 선뜻 답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렇지만 대신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의 몸짓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하지만, 이것을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 지지의 표현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불만을 표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주의는 불만족, 불안정, 고스트레스 사회이다.
 우리는 도처에서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며 살아간다. 매일 새로워지는 상품들의 목록, 모든 공간과 시간을 점거하고 있는 상품들의 광고. 자본주의 사회는 거대한 상품진열장이다. 자본은 사람들에게 새롭고, 더 많은 욕망을 심어준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은 자신이 토해내는 상품들을 화폐뭉치로 바꿔내지 못하고 파산한다. 자본은 상품과 함께 (상품에 대한) 욕망도 생산하는 것이다. 반면에 자본은 욕망을 충족시킬 수단을 뺏어간다. 경쟁력강화라는 명목으로 임금을 억제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일자리를 줄인다. 그 결과는 곧 다수대중의 상대적 결핍이다. 힘껏 욕망을 부풀리고서는 터트린다. 그리고 남는 것은 쭈글쭈글해진 불만스런 마음이다. 욕망의 과잉과 충족수단 과소의 자본주의적 비대칭은 불만족을 일반화한다.
 또한 자본주의는 불안정을 일반화한다. 언제든 가능한 기업의 파산과 주기적인 경기변동이 강요하는 실업의 위협, 그리고 자기 일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의 압박 앞에서 우리는 항시적인 불안정을 느낀다.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는 불안정 고용형태인 비정규직이 느낄 위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가며 산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이지 않을 수가 없다. 회사, 공장에 있는 동안 자본의 통제에 군말없이 따라야 한다. 진정 화나게 하는 일, 자존심을 상처입히는 일, 불공정한 일 등에 일일이 인간적인 반응을 보였다가는 사표를 써야 한다. 자본은 자율적인 인간을 원하지 않는다. 자본의 목적에 제 삶을 동일시하는 타율성을 요구한다. 인류가 쌓아올린 위대한 문화적 성취들에 무관심한 워커홀릭의 전성시대이다. 이뿐인가. 보다 비싼 값으로 흥정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자기계발 경쟁은 캠퍼스를 사막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전반적인 불만족, 불안정, 고스트레스 상태는 자연스럽게 반자본주의의 파토스를 만들어낸다. 반자본주의의 파토스는 자본주의의 산물이자 떼어낼 수 없는 샴쌍둥이이다(불만족, 불안정, 고스트레스를 낳는 고욕구 저소득, 실업, 경쟁, 자본의 통제 등은 자본주의의 불변조건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고민과 요구는 이러한 반자본주의의 파토스를 양분으로 삼아 자라난다.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대안사회에 대한 모색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대안은 없다는 유령이 지나가고 다시 변혁과 대안을 요구하는 운동들이 분출하고 있다. 다시 대안사회가 모색되고 있다. 그리고 대안사회를 모색하는 가운데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영감을 주고 있다(『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역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주는 영감에 크게 기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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