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장하준 교수의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서점가 1위 자리를 휩쓸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가 일으킨 지각변동이 서점가로도 퍼져가고 있는 셈이다. 장하준이 책에서 말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2008년 금융위기의 재앙은 “결국 따지고 보면 1980년대부터 세계를 지배해 온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그 원인이 있다.” 또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자유시장 정책은 금융위기 전부터 대부분의 나라에 성장이 둔화되고 불평등과 불안정이 심화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 이제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은 자본주의를 더 나은 시스템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만들 방법이 있음을 보여 준다.”

자유시장 이념에 대한 장하준의 23가지 비판 중 첫째가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라는 것이다. “오늘날 시장 바깥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은 시장과정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의해 시장에서 제외되었다. 인간을 비롯해 공직, 판결, 투표권, 대학입학 자격, 무허가 약품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즉 시장은 시장참여자의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칙과 한계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며, 이 규칙과 한계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 또는 역사적으로 형성돼온 사회규범(인권, 보통선거권, 공정성, 건강권 등)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개입이 거의 언제나 시장의 효율적인 자원배분 기능을 왜곡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은 실상 “규제를 통해 보호될 권리들을 부정한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신자유주의의 거짓과 기만을 알아채게 돕는 데에 굉장히 유용하다.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대안적 논리와 역사적 경험, 실증자료, 재치있는 비유를 통해 저변에서부터 무너뜨려간다. 그리고 그의 문체는 많은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하다. 장하준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위협적인 신자유주의 저격수라는 점에 이의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장하준에게는 시장경제의 심장에까지 펜을 겨눌 배짱은 없는 것 같다. 장하준은 윈스턴 처칠의 명언인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정치제도를 제외한다면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제도이다.”를 언급하며, “자본주의는 나쁜 경제 시스템이다. 문제는 다른 모든 시스템이 더 나쁘다는 것이지만.”이라고 말한다. 장하준은 “수많은 문제점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좋은 경제 시스템이라고 믿는다.”라고 하지만,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제까지 가장 나았던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인류가 앞으로 더 나은 시스템을 만들지 못할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반문해왔다. 물론 이러한 반문에 대해 장하준 같은 이들은 이상주의에 불과하다고 그 가치를 격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장하준과 우리의 이상주의 사이의 거리만큼 장하준의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실제 사이에도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하준이 시장주의자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점 하나는 “20세기에는 특히 기업가 정신을 구현하려면 공동체 차원의 집단적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 나라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의 노력이나 재능보다 공동체 차원에서 효율적인 조직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경제발전의 사회적 성격을 정당하게 지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가 쌓고 있는 막대한 부와 권력은 자본의 소유를 통해 ‘공동체 차원의 집단적 노력’을 도둑질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이 점이 장하준은 말하지 않지만 역사상 자본주의 비판가들이 말해왔던 자본주의적 ‘착취’이다. 자본주의 비판가들은 이러한 착취가 어떻게 경제발전이 가져다준 인간성의 전면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억압하는지를 말해왔다. 또한 이들은 단지 소수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자신들의 집단적 노력의 성과를 고루 전유할 수 있는 사회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인간해방의 이상주의가 헛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약진과 복지국가의 건설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회주의 운동이 서구민주주의와 복지국가 발전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인정한 책은 넘친다). 실은 장하준 자신도 반자본주의 운동 가운데서 제기된 아이디어들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를 그나마 더 낳게 만들어온 동력은 ‘착취 없는 사회’라는 이상과 정의에 대한 많은 이들의 헌신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필요로 하는 정치경제학자가 되기에 장하준은 보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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