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금리의 의미와 최근 추이

 

지난 312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2%에서 1.75%로 인하했다. 그리고 49일에는 기준금리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은행은 매월 둘째주 목요일에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기준금리를 결정한다.) 앞으로도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사상 최초의 1%대 기준금리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준금리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주요한 수단들 중의 하나이다. 자본주의국가의 경제개입수단은 흔히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으로 분류된다. 재정정책은 정부가 예산지출과 감세를 통해 수요를 부양하는 것이며, 통화정책은 중앙은행이 통화량과 기준금리를 조절해 경기변동에 대응하는 것이다. 금리를 높일 경우 가계에서는 저축 성향이 높아지고 기업에서는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므로, 경기과열과 물가상승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반대로 금리를 낮출 경우 시중에 통화량이 늘어 경기부양과 물가회복을 돕는다. 1970년대에 미국, 서유럽에서 적극적인 재정정책에도 불구하고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는 스테그플레이션을 겪고 나서는, ‘작은 정부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슬로건 하에서 통화정책이 더 중요하게 대접받는 편이다.

 

최근 몇년간의 한국은행 기준금리 추이를 살펴보면, 미국발 금융위기 직전인 20088월에 5.25%, 그리고 월스트리스가 휘청거렸던 `0811월에는 4.00%, 12월에는 3.00%, `092월에는 2.00%로 가파르게 낮아졌고, 이후 서서히 올라 `116월에 3.25%까지 올랐다가 다시 낮아져 현재 1.75%에까지 이르렀다. 기준금리만 놓고 보면 `08년 세계경제위기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뿐더러 더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초저금리 시대에 관한 단상

 

물론 기준금리만으로 경제상황을 재단할 수 없다. 3월에 한국은행이 금리를 역대 최저로 인하한 것에 관해서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 우려에 대한 대응 또는 장기간의 경기하강에 써볼 건 다 써보는 식의 대응 등으로 평가하고 있다. 요는 경제전망이 비관적이라는 말이다. 이게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IMF는 최근 보고서에서 세계경제가 구조적 장기침체로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금리인하가 당장은 저금리 전환대출 등으로 기대효과를 보고 있다. 중산층과 서민의 이자 부담을 줄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채무자 입장에서는 이자부담을 경감시켜주는 금리인하가 한편에서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는 대외취약성의 증가이다. 현재 최대의 경제이슈는 미국의 연준이 언제 금리를 인상하느냐인데, 미국에서 금리가 오르면 자본유출과 이로 인한 자산가격 하락, 금융혼란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금리가 낮을수록 미국 금리인상의 충격과 후폭풍은 더해질 것이다.

 

둘째, 부채와 투기의 증가이다. 이자가 싸질수록 돈을 빌리려는 유인이 커지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지금도 가계부채 수준이 심각한 수준이고 저성장에서 빚낸 돈이 몰릴 부동산시장이나 주식시장이나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점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소득이 늘지 않는데 자산가격이 계속 오른 적은 없다. 부채로 커진 거품은 터지기 마련이다.

 

셋째, 금융약탈의 심화이다. 비관적인 경제전망, 경기침체의 장기화 가운데서 적당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유휴자본이 열을 올릴 곳은 뻔하다. 바로 서민의 주머니이다. 전 국민을 채무관계로 옮아매어 모든 소득에 빨대를 꽂아 밑천까지 다 털어먹도록 온갖 술수로 빚을 권할 것이다.

 

2008년 미국에서의 경제공황이 2000년대 초저금리 시대에 뒤이어 찾아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충분한 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금융기관들은 주택을 담보 잡아 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해주었고, 빚을 상환하지 못하면 매몰차게 집을 압류했다. 결국 대규모의 채무불이행과 주인 잃은 주택매물이 쏟아져 부동산시장이 붕괴하고, 악성채권 증가에 금융기관들도 연이어 도산하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정치적 권리가 없는 민중은 빚에 길바닥으로 내몰릴 것이고, 반대로 권력을 획득한 민중은 약탈자들을 몰아낼 것이다. 연대와 투쟁이 우리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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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 모멘툼 vol. 01
김민하 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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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극우주의Angry Review

 

 

저자들 중에 이택광박권일이라는 이름을 보고 내키지 않았지만 읽어는 보았다. 예전에 88만원 세대를 5페이지 정도 읽다가 어법도 안 맞는 문장들에 어이가 없어 덮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혹시나, 역시나였다. 겨우 1장만 읽었을 뿐인데 화가 나서 쓴다. 이택광이 쓴 창간사 첫 문장부터가 터무니없었다.

 

위기의 시대는 기존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4)

 

이게 무슨 말인가? 학교 다닐 적, 돈이 한푼도 없어 종일 자취방에 누워만 있었던 적이 있었다. 세끼를 굶어보기는 그 날이 처음이었다. 배고프니까 별의별 생각 다 나더라. 보통 사람에게 위기란 이런 것들이다. 돈이 없고, 직장을 잃거나 못 구하고, 큰 병 나는 게 바로 위기이다. 그리고 개인에게 닥친 불행에 정부가 뒷짐 지고 있고, 이런 정부를 사회가 무심하게 용인하는 상황이 위기의 시대의 단면일 것이다. 난 이택광이 말하는 위기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웃의 빈곤을 말로 드러낼 수 없어 해결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고매한 학문을 오래 하신 교수님의 고견이러니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진지전에 대비하여 무크지는 유격전이라는 표현에 또 기도 안 찬다. 그럼 신문은 전격전이고, 방송은 공중전, 덧글 다는 건 우주전일 것이다.

창간사 다음에는 박권일이 쓴 머리말이 나온다. 머리말 중에 요리조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이 나온다.

 

일베는 소비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의 공백에 침투한 극단주의라기보다 소비자본주의의 극단에서 발생하는 주목 경쟁의 영역에 놓여 있다.” (9)

 

소비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의 공백에 침투한 극단주의는 무슨 뜻이고, “소비자본주의의 극단에서 발생하는 주목 경쟁은 어떤 의미인가? 골을 아무리 쥐어짜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어지는 부언도 없다. 머리말 다음 본문에 나오려나 보다. 그런데 박권일이 쓴 1장의 제목 역시 골 때린다. “공백을 들여다보는 어떤 방식 : 넷우익이라는 보편 증상’”

 

이쯤 되니 정말 대단한 내용이라도 나오는줄 알았다. 마음을 가다듬어 한 장, 한 장씩 읽어내려갔다. “주체라는 단어가 남발되고, “코호트남근주의니 하는 개념이 불쑥 튀어나오는 거야 애써 참았다. 그런데 마지막 61쪽까지 읽고 나니 진심으로 화가 난다. “소비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의 공백이니 소비자본주의의 극단이니, “보편증상이라는 말은 낚시를 위한 미끼였던가?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과 논리가 없다시피 하다.

 

박권일이 쓴 글은 그냥 한 마디로 요약된다. 일베는 엇나간 방식으로 주목받고자 애쓰는 불만 많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 하나마나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별의별 개념들과 인용들을 끌어다가 책으로 만들었으니 무엇하러 이 짓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게다가 이처럼 단순한 주장을 하는데도 좌충우돌이다. 글 처음에 국정원 게이트를 지적한 건 좋았다.

 

국정원 사태가 여기까지 밝혀진 이상 우익 담론의 자연 발생 공간으로서의 일베라는 가정은 기각되어야 한다. ‘자생적 담론이라는 중요한 전제가 붕괴한 것이다.” (27)

 

이쯤 말했으면 일베의 구성에서 외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밝혀가는 게 당연한데, 어찌된 건지 이 뒤로는 외부에 대한 언급은 없고, 글의 결론은 자신이 앞서 기각한 자생적 담론과 다르지 않다.

 

일베를 추동하는 내기물은 고전적 의미에서 사회의 인정이 아니라 대중의 주목’, 다시 말해 개인이 불특정 다수에게 주목받는 것이다.” (56)

 

아마도 글을 쓰다가 앞을 잊어버렸나 보다. 이 말이 농담이 아닌게 34쪽에 보면 서두에 언급한 반유대주의에 관한 이야기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1장 서두 어디에도 반유대주의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저기에 쓴 글을 짜집기 했다는 증거이다. 앞뒤가 짝이 안 맞는 건 이게 끝이 아니다.

 

44~47쪽에서 표창원이나 진중권이 일베에 대해 루저가 된 원한 감정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 내용에 대해서 지나치게 약한 설명’”이라고 비판해놓고는, 54쪽에서는 일본의 사회학자 다카하라 모토야기는 한중일 세 나라 청년 세대의 적대 의식을 분석하는 책에서 일본 청년 세대의 원한 감정이 사회경제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면서 중요하게 인용한다. 그러면서 57쪽에서는 원한 감정을 내포한 상상된 착취라는 개념으로 일베를 규정한다. 이처럼 기본적인 자질인 일관성도 없는 저자가 아래와 같이 어렵디 어려운 말들을 늘어놓으면 정말 자기가 이해나 하고 하는 말인지 불신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주체들을 특정한 언어의 사용자로 동결시키는 것, 또는 어떤 단어들을 특정한 주체의 도구로 규정하는 것은 담론 분석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관건은 적대의 배치와 효과를 포착하고 그것이 억압하거나 은폐하는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36)

 

이 책이 가진 악덕, 즉 뜬금 없는 개념들로 부실한 내용 덧씌우기, 논리의 비약, 좌충우돌 등등이 모두 집약돼 있는 60쪽을 마지막으로 인용하면서 평을 마치겠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과연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 각자 판단하시라.

 

다소 주제에서 벗어나는 논의이지만 넷우익과 소위 촛불시민을 일종의 길항 관계로 파악해볼 수도 있다. 이는 일베는 촛불에 대한 반작용운운하는 인과적 설명과는 일절 무관하다. 넷우익과 촛불시위는 공히 사회의 반정치화라는 보다 상위의, 포괄적인 사회적 경향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길항 관계라는 건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나 서로 경쟁하고 대항하고 있다는 의미다. 넷우익이 우파-기층 보수의 불만을 표상하는 공백으로서 출현했다면. 촛불시민은 좌파-운동권의 공백을 일거에 봉합하고 채워 넣으려는 과잉이었다. 과잉인 이유는 이들이 반정치적 정치와 정치적 반정치를 동시에 구현하려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정당정치의 지지부지한 과정을 생략하고 광장에서 주권자와 직접 대면하려는 모습은 반정치적 정치인 반면, 보수 우파와의 정치투쟁을 선악의 아마겟돈으로 파악하는 모습, 예컨대 새누리당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히 옳은 것이므로 우리는 찬성해야 한다는 식의 폐쇄 회로적 진영 논리는 정치적 반정치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60)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Angry Review

 

 

형편없는 1장에 비해서 6장의 다시 파시즘을 생각하자는 다소 낫다

글쓴이인 이택광은 극우주의에 대해 하나의 가설을 제출한다.

 

극우주의야말로 근대에 대한 열망 이외에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파시즘을 모태로 삼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221)

극우주의 뿌리에 파시즘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극우주의는 세계대전을 통해 극적으로 19세기 경제적 자유주의가 위기에 봉착함으로써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고전적 파시즘의 변용이자 귀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229)

 

이택광은 극우주의의 모태로서의 파시즘에 대해 새로이 정의하기에 앞서, 파시즘을 전체주의로서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는 상투적인 어법을 비롯해 이른바 발생적이론들을 검토하고 비판한다. 발생적 파시즘론의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로버트 팩스턴과 니코스 풀란차스가 있다.

그러나 팩스턴과 풀란차스의 이론에는 파시즘을 특정한 정치적 시기에 발생한 특수한 사건으로 못 박아버리는”(223) 한계가 있다. 파시즘은 전간기 상황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보다 보편적인 구조를 내포한다. 이택광은 파시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파시즘은 포스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상품이자 이데올로기적 생산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시즘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상품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품은 단순한 사물에 그치지 않고, 대중에게 세계관을 부여하는 소통의 수단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기에서 소통이라는 것은 정동의 교환을 의미한다. 파시즘은 신념에 기반을 둔 절제된 자기 규율화를 요구함으로써 불쾌한 쾌락을 발생시킨다. ‘즐겨라라고 속삭이는 자본주의 쾌락원칙과 이런 파시즘의 요구는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모순이 바로 파시즘을 대중에게 인준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범람하는 자본주의 쾌락에 맞서 자기를 규율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이중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규율적 정동의 효과는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정치에 대한 동의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파시즘은 바로 이런 대중의 원리에 근거해서 영웅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229~30)

 

길게 인용한 건 특히나 이 부분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해서이다. 극우주의에 대한 해설서에 다시 해설서를 읽어야 할 판이다. 어쨌든 이택광은 이어서 칼 폴라니를 중요하게 인용하며 자유주의는 파시즘의 인큐베이터”(231)라는 걸 강조한다. , 경제 요소를 시장화하면서 사회를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유주의에 반발하여 경제를 다시 재사회화하려는 운동으로서 파시즘을 정의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근래의 우익주의는 신자유주의가 일으킨 사회해체에 대한 반발이 될 것이다.

 

그런데 파시즘에 대한 이런 정의는 단선적이고 도식적이지 않은가? 전간기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했던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점, 그리고 고전적 파시즘이 보여주였던 극단적인 인종주의와 제국주의군사주의 및 반공주의 같은 복잡한 성격들을 그 정의로부터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점 등이 문제이다. 파시즘이란 개념을 역사와 지역을 초월할 정도로 확장시켜 남은 건 앙상한 추상일 뿐이다. 이제 파시즘은 모든 것이면서 무엇도 아니다. 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적 전통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게 파시즘일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뭐? 파시즘이라는 딱지 말고 무엇이 남는가? 자유주의의 위기 가운데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이든 국가라는 동일시의 대상이든, 이의 이름으로 다시 질서를 세우려는 게 파시즘이고 극우주의며 일베라고? 의외로 나쁘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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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도 자랑이다 2015-06-30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무식도 자랑이오.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인용한 구절이 그리 어렵단 말이오? 졸라 쉽구만.

eEe 2015-07-01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궤변이 궤변인지 모르는게 무식이지요
 

연말정산 대란, 타기 시작한 폭탄 심지?

 

 

  연말정산 논란에서 증세-복지 논란으로

 

  ‘13월의 보너스‘13월의 세금 폭탄으로 바뀌었다는 직장인들의 분노가 요동치자 박근혜 정부가 허둥지둥 진화에 나섰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증세-복지 논란으로 번져가고 있다. 연말정산 관련법을 개정하면서 기존의 소득공제 방식을 상당 부분 세액공제 방식으로 변경한 결과, 근로소득자들의 세부담이 크게 증가한 게 시작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사실상의 증세 조치라는 본질은 숨기고 사실이 아니라는 거짓과 뻔뻔함으로 일관하면서 힘없이 당해야하는 납세자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담뱃값 인상 때와 같다.

 

  연이은 증세 조치의 배경은 일차적으로는 세수 부족에 있다. 세입예산 대비 세수 부족분이 ‘12년에는 28천억, ’13년에는 85천억, ‘14년에는 111천억이 발생했다. 이처럼 세수 부족분이 매년 확대되자 담뱃값 인상과 연말정산 축소 같은 증세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증세의 방식이다. 기업이나 고소득 자영업자가 아니라 근로소득자와 서민에게 부담을 지우고 있다. 만만하다고 여기는 상대를 고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법인세 인상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새누리당이나 보수언론은 무분별한 복지예산 축소가 우선이라는 식으로 받아치면서 증세-복지 논란이 정계를 달구고 있다. 문재인 의원이 새로이 야당의 대표가 되면서 증세와 복지를 놓고 박근혜 정부와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다짐을 내보이면서 향후에도 계속 주요이슈로 자리잡을 것 같다.

 

  증세-복지 논란의 배경

 

  증세-복지 논란의 재점화는 때늦은 감이 있다. 그간 한국경제가 2008년 이후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심한 경제위기에서 한발 비켜서왔던 덕분이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재정위기가 터지면서 특히 취약했던 그리스나 스페인 등에서는 정치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다들 아다시피 얼마 전 그리스에서는 긴축에 반대하고 법인세 인상과 부유세 신설을 주장하는 급진좌파연합 시리자가 집권했다. 유럽의 재정위기나 새로운 좌파의 대두는 신자유주의의 파산에서 발생한 현상들이다.

 

  신자유주의는 미국과 유럽 같은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1970년대에 부딪쳤던 경제문제들을 돌파하기 위했던 자본의 구조개혁 운동이다. 그 정책은 자본의 자유화와 세계화로 요약된다. 돈벌기가 예전만 못해서 그간 용인해왔던 타협들을 장애로 여기기 시작했고, 노동조합이나 공공정책, 정부규제를 타도하려는 자본의 투쟁은 자유시장경제라는 멋진 신세계의 세례를 받아왔다. 그런데 30여년만에 자유시장경제는 만성 경기침체와 금융불안정에 시달리는 혼돈의 세계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동안 커질대로 커진 자본의 힘은 추락의 손실을 정부와 사회로 전가시켜버렸다. 신자유주의의 파산이 재정위기와 사회위기로 드러나고 있는 이유이다.

 

  2류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의 작금의 상황도 세계의 흐름과 다르지 않다. IMF 구제금융을 빌미로 전면화된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에 힘입어 반짝하던 시절도 잠시, 실업과 고용불안, 저소득의 범람으로 사회안전망에 대한 수요는 높아지는데 탐욕스런 재벌은 제 배만 불리고, 정부의 재정건전성은 악화되고 있다.

 

 

 

  다음은 우리다!

 

  그리스 등의 사례처럼 재정위기의 발발, 이에 대한 서민증세와 복지, 공공부문의 해체라는 집권세력의 대응은 커다란 정치적 변화를 낳을 수 있다. 이 정도의 위기와 변화가 한국에서도 벌어질 것이라고 당장은 예상키 힘들지만, 심각한 수준인 가계부채나 지방자치단체 재정악화가 뇌관이 되어 연쇄 폭발이 벌어지면 예상을 뒤엎을 수 있다. 지금 벌어지는 증세-복지 논란에 대해 뚜렷한 입장과 방향, 실천을 가져야 할 이유이다. 대중을 반자본주의 의식으로 견인할 수 있는 분석과 요구를 내놓고 투쟁해가야 한다. 이에 대한 많은 논의와 토론이 벌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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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한국경제? 재벌이 문제!

 

 

초이노믹스라며 기승전부동산의 정책들을 남발하고 한국은행은 역대 최저로 금리를 인하하며, 이런 식의 대응이 적절한지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은 한국경제가 정말 위기에 직면해 있는지, 위기가 다가왔다면 어떤 정책이 유효한지 따져보는 대신에, 보다 구조적인 문제와 그 극복방향을 강조하고자 한다. 핵심을 비껴가고서는 백약이 무효라서이다.

 

 

한국경제의 모순 : 대박의 비밀이 쪽박의 이유

 

투자한 자본과 이로부터 벌어들인 소득 사이의 비율을 의미하는 이윤율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성과와 한계를 측정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표이다. 자본주의의 목적은 최대한 많이 버는 것이고, 이의 지표가 바로 이윤율이기 때문이다. 홍장표 교수의 한국 제조업의 이윤율 추이와 변동요인(2013)에 따르면, 1991~2009년 동안의 제조업 분야 18개 업종 패널자료를 사용해 분석한 결과, “외환위기 이전(1991~1998)에는 설비투자 확대에 따른 자본-노동비율 증가와 시장개방이 이윤율을 하락시켰으며, 외환위기 이후(1999~2009)에는 생산자본의 세계화와 연구개발투자가 이윤율 상승을 주도했고 노동조합 조직률 하락이 이를 뒷받침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적 분석결과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을 더해보면 아래와 같은 결론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모두 알다시피, 한국 경제성장을 특징짓는 것은 수출제조업’, ‘재벌이다. 2008~9년의 미국발 세계경제공황 속에서도 한국경제가 비교적 견조한 성장을 유지한 건 재벌이 지배하는 제조업 분야에서의 수출경쟁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세계시장에서도 통한 수출경쟁력은 IMF구조조정으로 반등시킨 이윤율로 해외직접투자 및 연구개발투자를 늘리고, 이게 생산합리화와 더 많은 이윤으로 이어지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내면서 형성됐다고 분석할 수 있겠다. 문제는 재벌 입장에서의 생산합리화 즉, 해외공장 증설과 생산성 향상 및 노동 압박 등이 한국경제의 구조적 결함들을 키워왔다는 것이다.

 

국내 설비투자보다는 해외투자와 연구개발에 돈을 풀면서 고용창출은 부진을 면치 못했고, 구조조정을 밀어붙인 자리에는 하청과 비정규직을 채워 넣으며 일자리의 질 또한 현저하게 떨어졌다. ‘고용없는 성장양극화를 키워온 것이다. 그런데 세계경제공황 이후에는 투자부진까지 겹치면서 그간 재벌이 해고자와 비정규직, 국내소비자를 희생시키면서 가꾸어온 이윤율 상승은 사상 최대의 사내유보금 적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제출한 자산규모 10대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상장사 이익잉여금 현황에 의하면, 최근 3년간 이익잉여금이 3123천억원에서 3955천억원으로 832천억원이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395조원의 이익잉여금은 내년도 국가예산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액수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경제는 한 놈만 쓸어 담는 도박판과 다를 바 없다. 몽땅 쓸어 담고서는 풀질 않으니 다른 편에서는 빚과 가난이 쌓여간다.

 

 

쪽박을 깨는 법

 

요즈음 여러 인사들이 소득 주도 성장을 들먹이는데, 가계소득 증가를 촉진시키고 복지를 늘려 내수를 살찌워 경제를 살리자는 이야기이다. 노동조합이 열심히 투쟁해 임금을 높이면 경제에도 좋다는 말도 같은 맥락의 주장이다. 노동자, 서민의 생활수준 향상이 곧 경제성장이라는 아름다운 생각이지만, 그간 재벌이 IMF구조조정과 세계화를 등에 업고 경쟁력을 키워온 비법-자본수출과 비정규직 사용 등-과 국가예산이 넘는 잉여금을 끌어안고 있는 행태를 고려하면, 타짜 옆에 앉혀 놓고 판 벌여보겠다는 어수룩함이 묻어난다.

 

누구 말처럼 재벌몰수가 정답이다. 물론 재벌몰수를 실제로 추진해갈 힘이 없는 냉엄한 현실에서는 뜬 구름 잡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맞는 건 맞는 것이고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재벌이 소유한 생산력을 민주적 통제 아래 사회화하는 길 말고는 어느 길로 빠지든 결국 제자리걸음이다. ? 자본이 제 몸을 불려나가는 지배적인 사회현실, 그 자체가 바로 불평등과 실업, 빈곤 등 온갖 재앙을 쏟아내는 시대라서이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시대를 거스르는 용기와 지혜만이 길을 열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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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 마르크스 : 역사를 움직이는 힘 지식인마을 24
손철성 지음 / 김영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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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마르크스, 역사를 움직이는 힘(손철성, 2008)김영사에서 기획한 지식인마을시리즈의 24번째 책이다. 앞으로 보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을 책장에서 골라내다가 예전에 읽었던 기억을 반추하며 훑어 다시 보았다.

 

몇 년 전에 이 책을 샀던 이유는 변증법이 무엇인지 손쉽게 알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흔히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고 평가하는데, 변증법 하면 떠오르는 두 사람인 헤겔과 마르크스를 모아 입문서로 만든 게 기대감을 부풀려주었다. 저자는 헤겔을 변증법의 철학자로 소개하면서 변증법의 의미를 중심으로 헤겔에 대해 서술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변증법에 대해 잘 알게 된 건 없었다. 저자가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드는 예들은 다소 유치해서, 읽다보면 이런 게 변증법이란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헤겔을 직접 읽은 게 아니라, 헤겔을 조야하게 소개했던 책들에서 내용을 꾸어온 게 아닌지 싶을 정도이다.

 

한편, 마르크스를 설명하는 데 이르러서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변증법을 어떻게 적용했는지에 대한 (내가 기대했던) 별 내용은 없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철학과 경제학 및 사회주의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소개하는데, 자의적인 해석과 잘못된 설명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먼저는 아래와 같다.

 

마르크스는 후기 저작에서 유적 존재’, ‘인간 본질등의 용어를 핵심 개념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초기 저작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유적 존재의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했다. ‘유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적 측면은 노동이며, 인간은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인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유지한다.” (헤겔&마르크스, 역사를 움직이는 힘, 109p)

 

저자의 이런 설명은 소외론을 중심으로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입장이다. 소외론은 자본주의에 의해서 인간이 자신의 본질로부터 소외되고, 이러한 인간소외가 근대사회의 가장 큰 병폐라는 주장으로서,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을 대표한다. 여기서 소외만큼 중요한 개념이 인간 본질인데, 본래의 성질이 없다면 소외된 상태라는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기 마르크스가 인간 본질을 어떤 내용으로 규정했든 이보다 중요한 점은 이후에 마르크스가 유적 존재라는 개념을 버리고 대신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의 새로운 개념은 바로 인간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라는 규정이다. 이 말은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어떤 본성을 타고났다든지, 경험들 이전에 미리 정해진 존재라든지 등의 생각을 일체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가 살아가는 사회를, 그리고 이 사회와 개인들이, 개인들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남김없이 알아야 한다. ‘사회적 인간에 대한 해부절차 없이 인간 존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철학과 직관으로 얻은 본질에 대한 앎이란 결국 피상적인 관찰일 뿐이다.

 

덧붙여 마르크스가 초기의 소외론을 넘어서기 시작했던 건 역사를 유물론에 근거해 파악하면서부터였다. 여기서 유물론은 대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한다는 의미에 가까운데, 책상 앞에서 이런 관념을 저런 관념으로 전개해가는 방법으로 세계를 재단하는 모든 추상적인 이론을 거부함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경험만이 모든 앎의 원천이며 판단근거라는 경험주의로 경도됐던 건 아니다. 영국 경험주의를 비판하며 발달해온 독일 관념철학을 철저히 파헤쳤던 마르크스였던 만큼, 현상의 운동이 내적인 법칙과 일치한다는 경험주의의 전제도 거부했다. 경험은 합리적 방법에 의해 조직되지 않고서는 참된 앎의 자료가 될 수 없다. 이 합리적 방법이란 바로 변증법이다.

 

그리고 이처럼 마르크스가 유물론적이고 변증법적인 방법을 통해 벼려낸 역사관이 흔히 사적유물론’, ‘역사유물론으로 불리는 것으로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행하는 첫 번째 사회적 행위인 생산을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한다. 마르크스가 생산 중심의 역사관을 구체화시키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점도 변하는데, 더 이상 인간소외에 근거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본의 운동이 어떻게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늘려가고, 사회의 빈곤과 타락을 부추기는지에 대한 규명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려 한다. 인간이 고통받는 건 어떤 본질로부터 소외돼서가 아니라 현실의 사회관계가 강요하는 굴종과 빈곤(부로부터의 소외!)에 의해서라는 게 마르크스가 새로이 도달한 지점이었다. 관련하여 다른 저자의 설명을 인용해보겠다.

 

경제학-철학 초고를 쓴 이후부터 공산당 선언을 저술하기 전까지 맑스의 사상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특히 두 개의 텍스트가 과도기적 역할을 하는데, 그중 하나가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입니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경제학-철학 초고가 쓰인 직후인 1845년이나 1846년에 쓰입니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6번 테제는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입니다. 이것을 경제학-철학 초고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으로서 유적 본질이라는 생각과 비교해 보세요. 같은 사람의 말이라고 보기 힘들죠. 인간의 본질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현실의 사회적 관계가 앙상블을 이루고 여러 사회적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항상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변화할 수밖에 없겠죠? 이 단계에서 맑스는 인간이 어떤 관념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인식을 하면서 경제학-철학 초고의 입장과 멀어집니다.” (맑스주의 역사 강의, 65-66p)

 

소외론에 대한 자의적인 평가 말고도 142쪽에서의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 서구 마르크스주의 등에 대한 잘못된 분류와 설명 같은 비교적 사소해 보이는 실수들도 더러 보인다. 이 정도는 가벼이 넘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설명이 도리어 마르크스를 희화화 하는 건 심각해 보인다. 지나친 도식화가 문제인데, 123쪽에서의 투자 증가로부터 시작해 이윤율 저하경제공황을 거쳐 자본주의 붕괴에 이르는 일련의 연쇄는 앙상하고 성기다. 책 앞쪽에서 저자가 변증법의 핵심내용으로 정리한 상호연관성대립물의 통일등에 비추어 보아도 상호결정과 긴장, 투쟁이 소거된 도미노식의 인과론적 자본주의 붕괴이론은 얼마나 비-변증법적인가? 아무리 입문서라도 과도한 단순화는 도리어 본래의 사상을 독자로부터 소외시킨다.

 

이 책을 읽어보려는 건 아마도 예전의 나와 같이 입문서가 필요해서일 것 같다. 마르크스에 대해서라면 이 책보다 적합한 입문서들이 있다. 더 두껍지만 독서의 가치는 훨씬 두텁다. 두 권 소개한다.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알렉스 캘리니코스

맑스주의 역사 강의, 한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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