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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빚을 져야 국민이 산다 -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위한 경제학
전용복 지음 / 진인진 / 2020년 8월
평점 :
재난지원금, 재정건전성, 포퓰리즘
전 국민에 줄 듯 안 주는 재난지원금 논의, 나아가 기본소득 논쟁에서 보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재정건전성’이다. 정부는 버는 만큼만 지출해야 한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정부가 빚까지 내는 건 불어 닥칠 부작용이 훨씬 크다. 이런 ‘상식’을 거스르고 돈을 퍼주며 표를 모으려는 게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에 사로잡힌 정부는 세입이 부족하면 빚을 내고, 더 이상 빌릴 데가 없으면 돈을 찍어낸다. 정부가 찍어낸 돈은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키며 경제를 막장으로 내몬다. 지폐로 공예품을 만들 지경에 이른 베네수엘라를 보라! 건전한 시민은 마땅히 재정적자 없이는 지속될 수 없는 정책과 이를 선동하는 정치인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를 거부해야 한다는 이론이 미국에서 불어오고 있다. 요즘은 미제가 명품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이것만큼은 주목해야 한다.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가 흥행하고, 40%의 미국인이 사회주의에 긍정적이라고 답하는 분위기 형성에도 기여한(?) 이것의 이름은 ‘현대화폐이론(Modern Monetary Theory)’이다.
현대화폐이론과 현대금융시스템
현대화폐이론(이하 “MMT”)은 재정건전성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념들에 대한 ‘팩트폭력’이다. 재정적자를 비판하는 주류경제학은 MMT가 보기에 현실과는 딴 판인 허상을 전제하고 있다. MMT는 현대금융시스템을 정확히 아는 것만으로도 주류경제학을 논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한 정부의 재정적자가 최악의 정책이라는 믿음은 중앙은행만이 화폐를 발행하고, 증가한 화폐는 시중에 직접 유통되며, 이러한 통화량 증가는 화폐가치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전개를 깔고 있다. 그런데 이는 두 가지 지점에서 잘못된 주장이다. 화폐는 민간은행도 창조할 수 있으며, 중앙은행의 통화는 실제로는 한정된 영역에만 머문다.
MMT에 따르면 현대금융시스템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뉘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은 민간은행(제1금융권)과 가계, 기업이 활동하는 무대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거래는 최종적으로 민간은행에 개설된 가계와 기업들의 계좌 간의 이체로 결제된다. 손에서 손으로의 현금거래에서나 쓰이는 지폐와 동전은 지불수단의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지불수단으로서의 은행예금은 저축뿐만 아니라 은행의 대출에 의해서도 창조되며, 그것도 매우 손쉽게 늘릴 수 있다. 왜냐하면 은행은 대출금을 자기 은행의 계좌로 입금해주기 때문이다. 은행 장부 차변의 대출자산 숫자와 대변의 고객 계좌 잔고(즉 부채) 숫자만 함께 늘려주면 된다. 이러한 회계 처리가 벽에 부딪치는 건 고객이 현금을 인출할 때나 다른 은행으로 이체할 때뿐이다. 민간은행이 중앙은행에서 지폐를 받아 오거나, 타은행으로 송금해줄 때는 상대에게 대가를 지불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대가가 바로 중앙은행의 통화, 지급준비금이다.
현대금융시스템의 두 번째 차원은 중앙은행과 민간은행, 중앙정부로 이루어져 있다(이하에서 정부는 ‘중앙정부’만을 의미한다). 민간은행과 정부는 중앙은행에 계좌를 가지고 있는데, 이 계좌의 잔고가 바로 지급준비금이다. 지급준비금의 역할은 은행 간의, 은행과 정부 간의 지불수단이라는 점이다. 은행이 중앙은행에서 지폐를 받아오는데, 고객의 타은행 이체 요구에 대응할 때, 은행으로 납부된 세금을 정부로 건네줄 때, 정부나 중앙은행이 발행한 채권을 사고 팔 때도 지급준비금을 사용한다. 그리고 어떤 은행이 지급준비금이 부족하여 중앙은행이나 다른 은행으로부터 차입할 때 형성되는 금리가 바로 언론에서 자주 나오는 그 기준금리이다. 민간은행의 지급준비금 차입 수요가 많아지면 기준금리 준수를 위해 중앙은행은 지급준비금을 공급한다(=공개시장운영. 언론은 이를 ‘유동성 공급’으로 표현한다). 민간은행과 중앙은행의 차이점은 중앙은행의 화폐공급에는 어떤 경제적인 장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민간은행에는 고객의 인출 요구 등에 대응할 수 있는 지급준비금 보유와 조달이라는 장애가 존재한다).
생소한 내용이지만 이건 꼭 기억하자. 민간경제에서 대부분의 지불수단은 은행예금이다. 예금은 은행의 대출에 의해서도 창조된다. 중앙은행과 민간은행, 정부끼리는 그들만의 통화인 지급준비금을 사용한다. 금융시스템 속에서 은행예금과 지급준비금의 창조는 규제만 없다면 무제한적이다. 관련 실무자라면 당연시 여기는 이런 사실을 주류 경제학자들은 외면한다고 MMT는 꼬집는다.
공공재로서의 화폐, 정부의 역할
현대금융시스템의 두 가지 차원과 각 차원의 상이한 지불수단에 대한 MMT의 설명은 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를 바로 연결 짓는 믿음이 잘못임을 보여준다. 만약 정부가 재난지원금을 신용카드 등의 결제대금 방식으로 지급한다면, 정부가 보유한 지급준비금이 중앙은행에 개설된 민간은행의 계좌로 이체될 것이고, 민간은행은 이체 받은 지급준비금만큼 카드회사 계좌의 예금을 늘여줄 것이다. 정부지출은 이렇게 통화량(은행예금)을 증가시킨다. 반대로 납세자들이 은행예금으로 세금을 납부하면 예금은 사라지고 정부의 지급준비금이 늘어나므로 민간부문의 통화량은 줄어든다. 따라서 통화량이 실제로 증가하려면 세출이 세입을 초과해야 한다.
그런데 재정적자만이 아니라 은행이 대출을 상환액 이상으로 늘려도 통화량은 늘어난다. 실제로는 민간은행의 무분별한 신용공급(은행에게는 대출자산, 반대편에게는 부채)이 인플레이션과 버블을 일으킨다는 증거가 많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재정적자에도 국가부도 운운 등 온갖 반대에 직면해야 하는 정부보다 대출을 늘릴수록 돈을 버는 은행이 통화량 증가에 항구적 이해를 갖는다. 한국에서 부동산이 급등하는 동안 함께 나란히 급증한 건 가계부채였다. 손쉬운 대출과 레버리지 투자가 자산버블의 주 원인인데도 언론은 엉뚱한 곳에 책임을 전가한다.
만약 정부가 실제로 돈을 펑펑 쓴다면 어떨까? 정부는 부족한 세입 대신 국채를 민간은행에 팔아 적자를 메울 것이다. 민간은행은 지급준비금으로 국채를 매입한다. 대량의 국채 발행이 은행의 지급준비금을 빨아들이며 국채금리를 인상시키면 중앙은행이 나서서 민간은행이 보유한 국채를 사들이며 지급준비금을 공급한다(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직접 국채를 사는 건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제 민간은행 대신 중앙은행이 국채를 보유한다. 그런데 정부가 중앙은행에 지급하는 국채이자는 다시 정부로 돌아온다. 중앙은행은 정부기관이기 때문이다. 정부부채가 아무리 커져도 채권자가 자국의 중앙은행이라면 부도날 일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부채는 장부상의 숫자와 역사적 기록(적자액의 누적)에 불과하다. 90년대 이후 일본과 2008년 이후 미국에서 벌어진 양적 완화의 실제 의미이다. 정부부채 증가와 국가부도를 동일시하는 건 국채와 외채를 구분하지 않는 무지 탓이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아무리 많이 들고 있더라도 그 나라 정부는 파산하지 않는다.
MMT는 화폐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현대 화폐는 민간에서는 금융상품(채권-채무관계) 또는 세입·세출의 매개로서 형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그리고 화폐의 탄생과 죽음을 조절하기 위해 중앙은행은 자신의 발권력을 행사한다. 화폐는 재화와 용역을 거래하고 분배하기 위한 사회적 수단이라는 점에서 공공재의 일종이다. 총생산물이 증가하는 만큼 원활한 거래와 분배를 위해서는 화폐량도 늘어야 한다. 그런데 화폐공급을 이윤 동기의 민간은행 대출에 맡기는 방식보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곳에 정부가 재정적자로 직접 지출하는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고 정의롭다.
이제까지의 논의와 결론을 더 유익한 내용들과 함께 쉽고 상세하게 접하고 싶은 분들에게 『나라가 빚을 져야 국민이 산다』(저자 전용복)를 추천한다. MMT가 뭔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유명한 학자들도 헛소리라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존재한다. MMT를 부당한 대우에서 구해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