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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 - 자본주의와 환경에 대한 안내서
존 벨라미 포스터 & 프레드 맥도프 지음, 황정규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 서평
: 완전한 사회주의 = 완전한 생태주의
1. 생태주의자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사상이 반생태적이지는 않더라도 현대 생태주의와는 무관하다는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황정규 동지를 통해서였다. 노동해방실천연대가 2009년에 발간한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 제3호에 실린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황정규는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 속에 생태주의적 인식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이러한 맑스와 엥겔스의 생태주의적 인식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자 하였다.”고 평가하며 폴 버켓과 존 벨라미 포스터의 연구를 소개했다.
폴 버켓과 존 벨라미 포스터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초기의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자연은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과의 지속적인 [교호] 과정 속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자기 자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라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필수 불가결한 관계를 중심으로 한 유물론 철학을 표현한 바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신의 유물론을 후기에까지 심화 확대시켰는데, 당대에 자본주의 농업이 야기한 토양 비옥도 상실과 도시의 폐기물로 인한 환경오염에 대한 분석에서, 독일의 화학자인 리비히의 연구에서 착안해, 환경문제를 ‘물질대사의 균열’로 표현했다. 유기체가 외부의 환경과 물질 및 에너지를 교환하는 메커니즘을 의미하는 물질대사의 개념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하여, 자본주의에 의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에 균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결국 인간과 자연도 함께 파괴된다고 본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연과학에서 물질대사 개념을 빌려오면서, 여기에 자신의 유물론적 역사파악을 더하여 독창적으로 변형해냈다.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관계는 역사의 기초이고 토대이다. 그런데 이 관계는 각 사회구성체마다 서로 다른 고유한 형태를 갖는다는 것이다.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노동’인데, 이 노동이 역사가 발전해오며 함께 근본적으로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의 특징은 무제한적 이윤과 자본축적에의 종속과 이로부터 비롯하는 인간 소외인데, 그 결과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들과 자본주의적 생산 사이에 극심한 모순이 발생하고, 파멸을 인식하면서도 폭주를 멈추게 못하는 소외된 인간이성의 무기력함이 증대한다. 따라서 인류 생존의 위기를 부르는 물질대사의 균열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균열의 원인인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나아가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돼온 인간의 전면적인 발달의 재개와 이에 의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재정립과 질적 도약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한, 황정규의 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토막을 길지만 옮겨본다.
“인간 개개인의 다방면에서의 발전이 진행될 때에만 물질대사의 균열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의 발전과 이 지식을 올바로 이용할 수 있는 인간본성의 발전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의 맹목적 힘에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지식이 발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자연과 공존하는 관계를 맺는데 이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이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해가야 한다.
또한 이는 인간이 자연과 맺고 있는 노동의 형태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인간발전과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맑스는 인간노동이 자연을 자신의 목적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과정인 동시에 스스로의 본성 역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보았다. 여기서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노동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는 인간의 발전과 긴밀한 연관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에 치유하기 힘든 균열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인간발전을 왜곡시키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왜곡된 관계를 극복하는 것이 인간해방을 자신의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전망은 위의 인용문에서 “인간의 완전한 발전”, “인간의 힘을 목적 그 자체로서 발전시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전망은 모든 억압과 착취의 극복과 노동의 소외의 극복이라는 사회주의 본연의 목표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복원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함을 인식하게 해준다. 이는 “완전한 인간주의=완전한 자연주의”라는 1844년 초고에서의 맑스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황정규는 이 글 이후에도 ‘마르크스의 생태학’, 그리고 다른 생태주의 사상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는데, 그 노력 중 하나가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의 번역이다. 다양한 활동으로 바쁜 일상 중에서도 책을 번역한 노고에 감사한다. 또 이론과 실천을 함께 겸비한 사회주의자에 의해, 어느 범용한 교수들과는 다르게 인간해방의 이상을 위해 분투해온 존 벨라미 포스터와 프레드 맥도포가 공저한 글이 번역된 것에 다시 감사하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2. 자본주의와 환경에 대한 최선의 안내서
책은 서문과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고, 어렵지도 길지도 않다. 그러면서 저자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사상의 핵심은 모두 녹아 있다. 한 마디로 간명하며, 때문에 ‘마르크스의 생태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여행하기 위한 최선의 안내서라 할 만 하다. 앞서 말했듯이 마르크스의 생태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관계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균열을 내고 있는지의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생태학에 대한 최선의 안내서는 동시에 환경에 치유할 수 없는 충격을 가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본성에 대한 최선의 안내서이기도 하다. 실제로 책의 부제는 ‘자본주의와 환경에 대한 안내서’이다.
1장의 제목은 「지구의 생태위기」이다. 저자들은 “최근 지구시스템과학에서 과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발전시킨 것 중 하나가 ‘행성 경계’라는 개념”(14p)이라며, 행성 경계의 개념에 근거해 생태위기의 심각성을 전달한다. 행성 경계란 인간이 야기한 다양한 환경변화들이 이미 넘어섰거나 코앞에 둔 각각의 마지노선들로서, 만약 그 경계를 넘어설 경우 돌이킬 수 없이 인간과 다른 생물종들에게 지극히 적대적인 새로운 환경에 직면해야 한다. 행성 경계의 대표적인 예들이 기후변화와 해양 산성화, 성층권 오존의 소진 등인데, 해양 산성화의 경우 과학자들이 제시한 경계는 2.75인데 산업화 이전에는 3.44였던 것이 현재는 2.90이다. 이와 같이 1장에서는 생태위기가 단지 수사가 아니라 이미 우리 문 앞에 도착해 노크하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2장 「현행유지 : 행성파괴에 이르는 길」은 제목 그대로, 우리가 현재의 경제체제를 유지한다면 금세기 내에 맞이하게 될 파멸을 말한다. 그런데 이 전 지구적 경제체제는 파멸로 치닫게 하는 경제성장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성장의 잠정적 목표에 도달하기 이전에 지구는 완전히 거덜 나고 말 것이다. “허먼 댈리는 전 세계가 미국 수준의 일인당 생산과 소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불가능성의 정리’라고 불렀다. 이를 위해서는 지구와 같은 행성이 6개나 필요하기 때문이다.”(43p) 그런데 현행유지가 행성파괴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엄청난 수준의 불평등이 함께 유지되는 것도 의미한다. 그리고 부자들은 생태위기에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도 빈자들에게 그 곤경을 전부 떠넘긴다. 바로 자본주의를 통해서.
3장 「자본주의와 성장지상주의」는 생태위기를 야기하고 있는 자본주의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한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소유자(자본가)가 직접 생산자(노동자)가 발생시킨 잉여생산물을 전유하고, 이를 통해 소유자가 자본축적(투자 및 부의 축재)을 할 수 있게 하는 경제적, 사회적 체제다. 생산은 이윤의 발생과 축적의 촉진을 목적으로 시장을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물질적 형태를 취한다. 이 체제에서 개인들은 자기이익을 추구하며, 오직 자신들 간의 상호경쟁과 시장의 비인격적 힘들을 통해서만 제재를 받는다.”(51p)
환경의 지속가능성과 충돌하는 면에서 자본주의를 고찰하면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자본주의의 추동력과 동기는 이윤과 축적을 향한 끝이 없는 추구다. 두 번째, 경쟁 때문에 기업은 지속적으로 판매의 증가와 시장점유율의 상승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56p) 즉, 더 큰 이윤을 향한 갈망으로 현재의 이윤을 새로운 자본으로 투자하는 내적 본질과, 경쟁을 낳고 패자를 도태시키는 시장에서 가해지는 외적 강제에 의해 자본은 성장과 축적을 멈추지 않고, 그 결과 경제는 지속적으로 팽창하게 된다. 그런데 체제로서 자본주의는 더욱 경제성장에 매달리게 되는데, 성장이 멈추는 순간 체제의 취약성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이를 저자들은 미국경제의 통계를 들어 “GDP 성장률이 노동인구의 증가보다 실질적으로 더 크지 않다면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점”(81p)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체제의 취약성을 줄여 줄지는 몰라도 환경에는 몇 배나 더 파괴적이다.
4장 「환경과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주의가 환경에 가하는 충격의 구체적인 양상들을 살핀다. 규모가 커짐에 따라 기업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원과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펼친다. 그리고 기업은 인류의 보편적 관점과 공익이 아니라 오직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만 작동하고, 자연을 이윤 생산의 수단으로만 취급하며, 마치 자연에는 한계가 없다는 듯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고 더 많은 폐기물을 투기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거의 멸종 지점에 다다른 수많은 해양 어종의 감소는 어떻게 ‘재생가능한 자원’조차도 고갈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남획으로 인해 상업 어종의 1/3이 이전의 잠재어획량 중 단 10퍼센트만을 겨우 생산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상업 어종이 21세기 중반까지 이렇게 될 것이다.”(97p)
끝없는 성장 추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정부의 환경 관련 행위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탐욕과 이기심을 숭배하며, 이를 인간본성으로 여긴다. 그리고 정부는 기업에 사실상 포획돼 있는 지경이며, 기업과 성장 앞에 놓인 장애를 치워주는 역할에 충실하다. “따라서 지금의 체제가 지닌 본성 중에는 너무 늦기 전에 체제를 한 걸음 물러서게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132p)
5장 「자본주의는 녹색이 될 수 있는가?」는 ‘저탄소 녹색성장’, ‘지속가능한 발전’ 등의 표어가 대변하고 있는,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에는 기술적&시장 기반의 해결책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논박한다. 기술의 발전이 문제의 대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팽창을 본질로 하는 경제체제는 오히려 역설적인 결과를 발생시킨다. 에너지, 자원 저감 기술이 단위생산비용을 줄여줌으로써 실제로는 자본축적을 가속화시키고 소비총량을 더 증가시키는 식이다. 또한 탄소거래제 같은 시장적 해결책,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같은 기업 자율에의 의존도 환상에 불과하다. 저명한 보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회사의 주주들이 봤을 때 기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지 못하면서 환경 관심사를 추구한다면, 그때는 그가 부도덕한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148p)
이러한 상황에서 증식 핵반응로나 탄소격리 같은 재앙을 초래할지 모르거나 불확실한 하이테크놀로지까지 무책임하게 대안으로 선전되고 있다. 이런 해결책들에 공통된 심리는 이런 것이다. “자본주의가 환경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따라서 환경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구해야 할 대상은 지구의 환경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가 된다.”(143p)
반대로 자본주의가 아니라 지구를 구하는 길은 무엇인가? 6장 「생태혁명, 가능성을 현실로」는 자본주의 안에서 생태위기를 경감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현실적이지 못하며,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생태혁명’만이 유일한 출구라고 웅변한다. “생태혁명은 인간과 자연 모두에 대한 착취의 악순환을 끊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206p) 마르크스의 말처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제한된 태도는 그들의 서로에 대한 제한된 관계를 결정하며, 그들의 서로에 대한 제한된 태도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제한된 관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태혁명은 인간해방의 사회주의를 전제하며, 그 기본원칙에 생태적 성격을 가미한다. 그것은 “①자연에 대한 소유가 아닌 사회적 이용, ②연합한 생산자들이 행하는 자연과 인류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질대사의 합리적 규제, ③현재와 미래 세대를 포함하는 공동체의 필요 충족”(197p)이다.
우리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내버려두지 않으면서도, 생태혁명의 전망 안에서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도 지구적 생태위기에 맞선 급진적 운동들이 등장하고 성장하고 있다!
3. 지속가능한 미래를 말하는 오래된 신념
황정규는 역자 후기에서 ‘마르크스의 생태학’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연유에 대해 다음같이 전달하고 있다. “2000년 존 벨라미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사상 전반에 걸쳐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면서, 마르크스주의가 반생태적이라는 기존의 견해를 완전히 논박했다. 포스터는 책을 구상하는 초기 단계에서 책 제목을 ‘마르크스와 생태학’으로 정하려 했으나,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야말로 핵심적인 생태사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책 제목을 ‘마르크스의 생태학’으로 바꾸었다고 한다.”(269p)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은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가 생태주의적 인식과 비전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라는 인식 기반이 생태위기에 대한 고찰에 얼마만큼의 날카로움과 비타협적 투쟁성, 한결 같은 원칙, 총체적 대안을 제공해줄 수 있는지를 책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다시 책의 논리를 간단한 형태로 음미해보자.
① 인간이 야기한 다양한 환경변화들이 현재와 같이 지속된다면, 지구는 틀림없이 파멸에 이르는,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로 몇 년 안에 들어설 것이다.
② 자본주의는 제한 없는 팽창을 본성으로 가지며, 이로 인해 자연은 인간에 의한 착취의 관계 아래에 놓이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③ 생태위기에 기술적&시장 기반의 해결책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경제팽창과 자연 착취를 멈추지 않고서도 지구의 파멸을 막을 수 있다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믿음이다.
④ 물질대사의 균열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착취를 매개로 하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서로를 제한하지 않으며 하나의 발전이 다른 하나의 발전에 전제가 되는 생태혁명, 사회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①에 대해서는 모든 환경주의자가 동의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환경주의자들은 생태위기의 심각성과 시급성을 알리고 반대의 행동을 조직하는 데 앞장서왔다. 그러나 파멸적인 환경변화들이 자본주의 그 자체에서 기인하며, 때문에 이런저런 수선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경제체제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②, ③, ④에 대해서는 환경주의자들 사이에서 공통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세 가지 명제들이야말로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비타협성이 없이는 ③이 말하는 비현실적인 믿음으로 퇴보할 것이며, 이는 결국 지구를 파괴하는 길이다. 그리고 지구를 파괴하는 길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서는 데 있어 가장 확실한 빨간불이 돼주는 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와 그 생명력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어느 사상보다도 자본주의에 대한 일관되고 총체적이며 근본적인 비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를 노동자계급과 화해 불가능한 체제로 규정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노동자계급의 노동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의 세계와 흔히 비견되는 아담 스미스의 세계를 보자. 스미스는 재화를 교환하려는 성향이 인류의 본성이라고 했다. 따라서 사회가 발전할수록, 즉 교환하려는 본성을 제약하는 장애물들이 제거될수록 교환의 빈도와 범위가 늘어나고, 또한 이로 인해 분업이 발전한다고 했다. 그리고 분업의 발전은 생산성을 향심시킴으로써, 교환의 확대는 결국 국가의 부를 풍요롭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장사회에서 부의 형태는 상품이다. 저마다 각자가 생산한 것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이를 타인의 소유물과 일정한 비율로 교환하기 때문이다. 한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일정한 비율을 교환가치 또는 가격이라고 한다. 경제주체는 바로 이 교환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생산활동에 종사하는데,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은 동시에 타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용가치이기도 하기 때문에, 각자의 이익을 위한 상품생산이 결국 사회 전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게 된다. 시장은 이기심을 이타적 역할로 이끈다. 스미스는 바로 이 조화로운 손이 국부를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웅변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영원불변한 인간의 본성 같은 게 아니라 스미스가 문제 삼지 않는, 오히려 시장사회의 건전한 기초로 파악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특수한 사회제도로부터 시작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은 대부분의 핵심적인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다. 이로 인해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배제된 노동자계급은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계급에게 판매한다. 노동력도 어느 상품과 마찬가지로 교환가치를 갖게 되며, 이 노동력의 교환가치가 바로 임금이다. 자본가는 임금 비용의 지출을 통해, 즉 노동력 상품의 구매를 통해 비용 이상의 이득을 취한다. 가장 먼저는 상품생산의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이윤을 획득한다. 이윤은 일단 형성되면 자본의 생산성이든, 경영의 생산성이든 환상적인 외관을 취하지만, 그 근원은 노동력 상품의 구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연이 정한 노동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시간은 숱한 사회적, 역사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만약 노동시간의 길이가 겨우 건물, 기계, 도구, 원료, 연료 등의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를 충당할 정도의 상품가치밖에 생산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이윤이 유일한 목적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성 상, 자본주의도 임노동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시간은 결국 그 이상으로 연장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임금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의 연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윤은 바로 이 노동시간의 연장, 초과노동의 흡수로부터 나온다. 자원과 기술, 경영 등 무엇도 노동을 흡수하지 못한다면 상품을 결코 생산해내지 못한다. 반대로 노동도 자원과 기술, 경영 등과 결합하지 못한다면 무엇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노동이 어느 생산요소와 같지 않고 다른 점은 자유의 존재라는 것이다. 다른 생산요소들은 자본의 의도에 철저히 종속되며, 그 사용가치가 완전히 소모될 때까지 자본의 일부로 기능한다. 이에 비해 노동은 자본의 일부이면서 일부가 아니다. 노동은 어느 때든지 인격체로서, 자유의 존재로서 자본에 대립한다. 때문에 이윤은 오직 노동을 노동시간의 형태로 물적 존재화해 자본에 통합시키는 정도, 즉 경제적 강제에 의해서만 비로소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윤은 노동에 대한 착취자로서의 자본의 승리와 지배, 그리고 생산수단의 독점으로부터 나오는 권력의 표현이다. 반대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사회에서는 착취와 이윤이 사라지고 공동의 소득에서 얼마를 분배하고 얼마의 잉여를 다음 해의 투자를 위해 남겨놓을 것인지를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새로운 사회과정이 대신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노동을 착취하는 권력, 자본과 노동 사이의 지배-피지배의 사회적 관계로 일반화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비판력을 피워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마르크스에 대해서 많은 환경주의자들이 노동착취의 이론은 인정할 수 있지만 자연착취에는 맹점을 갖는 것으로 비판해왔다. 이러한 오해에 통렬한 반박을 내놓은 게 바로 버켓과 포스터 등의 연구업적인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바를 다시 강조하자면, 마르크스가 놀랍게도 시대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의한 자연착취라는 문제의식을 형성할 수 있었던 바탕은 그의 유물론 철학 덕분이었다. 인간과 자연을 서로 다른 두 원리로서 파악하는 이분법적인 관념론 철학과는 반대로, 마르크스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그리고 자연을 인간의 확장된 몸으로 파악하였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는 자기 이전의 유물론을 따르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자연을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의 실천에 의해 변화 발전하고, 다시 역으로 자연의 변형이 인간 역사에 새로운 가능성과 제약을 제공하는 존재로 바라보았다는 점에 마르크스의 고유성이 있다. 즉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는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창조하는 기초가 된다. 이처럼 자연을 역사를 갖는 존재로 파악하면서 마르크스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는, 자연의 원래적 의미를 초월한다. 이 초월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즉 노동(생산)이 역사를 창출한다는 유물론적 역사파악의 전제가 마련된 것이 하나이고, 또 인간에 의한 자연의 새로운 변형이 인간과 자연에 부정적인 변화를 낳을 수도 있다는, 오늘날 가장 시급한 인식이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역시 서두에서 소개했듯이, 마르크스는 실제로 후자의 인식을 당대의 자본주의 농업이 낳은 토양 비옥도 상실과 도시의 폐기물로 인한 환경오염에 대한 분석으로 구체화시켰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자연착취에는 맹점을 갖고 있다거나 생태주의와 무관하다는 생각은 깊은 오해인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사상이 단지 생태주의적 인식을 포함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확고한 생태적 비전을 제공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생태위기는 바로 자본주의에 의한 물질대사의 균열이다. 즉 인간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자연을 이용하고 개발하면서 인류가 생존하고 번성하는 토대 중의 토대인 생물들 사이, 생물과 비생물 사이의 물질 순환이 파괴되고, 이로 인해 환경은 인류는 물론 대다수 생물종에게 적대적인 시공간으로 변해왔다. 따라서 생태위기의 극복이란 물질대사 균열의 치유이고,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방식이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방식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 바로 자본주의라는 총체. 자본은 노동을 착취함으로써만 이윤을 생산하고 축적할 수 있다. 그런데 자연으로부터 재료를 취하게 되는 생산수단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의 수단이 아니라 반대로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자본의 도구가 된다. 자본은 노동을 흡수하기 위한 도구와 촉매로써 생산수단을 운동시킨다. 더 많은 착취와 이윤을 위해서는 상응하는 더 많은 생산수단이 투입돼야 한다. 이에 더해 자본주의 특유의 노동절약 기술의 발전은 노동 한 단위 당 생산수단 양의 비를 비약적으로 늘림으로써 생산수단의 투입과 집중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왔다. 저항이 아니고서는 노동의 착취에서 제한을 모르는 자본은 역시 자연의 착취에서도 한계를 보지 못한다. 자연이 노동 착취의 도구로 전도되는 자본주의에 물질대사 균열의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당연히 자본주의의 극복을 말한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생태적 비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관계 균열의 뿌리를 보았듯이, 마찬가지로 물질대사의 치유는 반드시 새롭고 평등한 사회적 관계의 형성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완전한 사회주의만이 완전한 생태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가 형성되고 발전하면서 새로이 만들어가게 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생적 관계는 다시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등과 인간의 전면적인 발달을 촉진할 것이다. 완전한 생태주의만이 완전한 사회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마르크스의 생태적 비전은 동시에 사회적 비전이며, 사회적 비전이 곧 생태적 비전이다. 이러한 인식과 대안에서의 총체가 바로 마르크스를 자본주의와 투쟁한 불온한 사상가로뿐만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미래와 그 원리를 그려낸 선구적 사상가로 미래의 세대가 기억하게 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