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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위기의 시대 왜 사회주의인가?
앨런 마스 & 하워드 진 지음, 유정.이원웅 옮김 / 책갈피 / 2012년 7월
평점 :
[서평]『자본주의 위기의 시대 : 왜 사회주의인가?』
: 대선패배의 힐링을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이틀 전, 제 18대 대통령으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됐다. 문재인 후보에게 표를 던진 지지자들은 멘붕 상태에 빠져있다. 이번 대선의 프레임은 ‘보수 대 진보’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보후보는 왜 패했을까? 그리고 비록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왜 진보후보를 지지했을까? 진보의 사전적 의미 중 하나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이다. 이 의미를 따르면, 문재인 후보와 그 지지자들은 사회 발전을 원하는 마음으로 서로 연결된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 : 왜 사회주의인가?』(책갈피, 2012)는 “투쟁 없이 진보 없다.”고 단언한다. 누군가가 선출되는 것만으로는 어림없다는 말이다. 책의 저자인 앨런 마스(Alan Maass)는 미국의 사회주의 조직 중 하나인 국제사회주의자단체(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의 활동가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했다. 한국정치가 점차 미국과 같이 양당정치로 수렴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현실은 우리에게 꽤 참고가 될 듯하다. 사실 미국과 같은 양당정치는 서구민주주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경우인데, 공화당과 민주당 말고는 전국적 규모의 정당이 부재하고, 또한 같은 말이지만 사회(민주)주의정당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때문에 미국의 급진주의, 진보주의자들은 항상 선택을 강요받는데, 소극적이게는 보수적인 공화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냐의 문제이고, 적극적이게는 민주당을 통해서 개혁을 추구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한국에서도 전자의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건재했을 때는 선거 시 사표 논란으로, 후자의 문제는 진보 인사들의 민주당 입당이나 야권연대 논란으로 비슷하게 재현된 바 있다. 이런 선택, 문제들과 관련해 앨런 마스의 입장은 단호하다.
“공화당과 그들의 추악한 말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우파를 저지하고자 하는 심정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민주당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민주당이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더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라는 것은 상식인 듯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 잘못된 방법이다. 사람들은 공화당이 발의한, 희생자를 비난하는 잔인한 법안들이 싫어서 클린턴에게 투표했지만 민주당 대통령은 공화당과 똑같은 조처를 취했다. 사람들은 조지 W 부시가 세계 곳곳에서 벌이는 전쟁에 신물 나서 버락 오바마에게 투표했지만, 똑같은 전쟁 정책을 더 조리 있게 설명하는 말만 듣게 됐을 뿐이다.” (128p)
즉,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결국은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말이다. 어째서일까?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바로 악을 잉태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공화당도, 민주당도 진정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자본주의이다.
제 1장 “자본주의는 왜 고장났는가?”와 2장 “그리 자유롭지 않은 땅”, 3장 “전쟁의 참상”에서 저자는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인 제프 패럴, 애디 포크, 바버라 하비 등과 그리고 이라크의 파라 파드힐 등이 겪은 잔인한 삶을 전하며 어쩔 수 없는 빈곤과 억압, 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내고 있는 빈곤과 억압, 전쟁을 이야기한다. 이어서 4장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는 아래의 문장들로 시작하며, 대안을 설득한다.
“사회주의의 기본 사상은 간단하다. 사회의 자원이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데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가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이룩한 엄청난 성과는 소수의 사람들을 부자와 권력자로 만드는 데 쓰일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빈곤과 억압, 폭력에서 벗어나 풍요롭고 보람찬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모두 제공하는 데 쓰여야 한다.” (95p)
그렇다면 체제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질문과 같은 제목의 5장에서 저자는 개혁을 추구하겠다던 오바마의 ‘말 따로 행동 따로’ 행각, 그리고 공화당과 다르지 않은 민주당을 폭로하고, 이어서 선거로 체제를 고쳐 쓸 수 없는 까닭을 밝힌다. 20세기 초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당신이 워싱턴에 가서 정부 관리를 만났다고 치자. 당신 이야기를 공손히 듣고 있는 그 관리가 실제로 받아들이는 조언은 금융계·제조업계·상업계 거물들의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미국 정부의 주인은 미국 자본가와 제조업자 전체다.” (132p)
20세기 초의 미국정부와 21세기의 미국정부, 그리고 현재의 한국정부가 얼마나 다를까? 다르지 않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런데 진정 달라진 게 있다면, 이는 “투쟁”에 의해서만 그렇게 됐다. 6장의 제목은 바로 “투쟁 없이 진보 없다”이다.
"학교에서는 정치적·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평화롭고 점진적으로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불의에 대한 반감을 조직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조급하게 굴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즉, 체제가 작동해서 문제가 해결될 테니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와 평등을 위한 투쟁의 역사 전체를 돌아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세기 전반기에 미국 남부와 북부의 정치인들은 거의 모두 남부 노예제를 가만 놔두더라도 결국은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틀렸다. 면화 생산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에 노예제는 점점 더 강력해졌다. 이 참상을 끝내는 데는 남북전쟁이 필요했다.
미국 역사에서 벌어진 운동들을 보자. 공민권운동, 여성참정권 운동, 8시간 노동제 운동, 반전운동 등 모든 운동은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고 온건하게 행동하라는 요구에 직면했다. 마틴 루서 킹은 “버밍햄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랫동안 나는 ‘기다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모든 흑인은 이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을 것입니다. 이 ‘기다려’라는 말은 거의 언제나 ‘결코 안 된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우리는 ‘정의를 너무 오래 지연시키는 것은 정의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저명한 법조인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다리지’ 않기로 작정한 활동가들의 결단력이 공민권운동이 승리한 비결이다.” (144p)
마지막 장인 “사회주의와 투쟁 그리고 여러분”에서는 잘못된 세계와 쟁취할 세계 사이에 놓인 길을 말한다. 이 길을 걷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분노와 저항 사이의 간극을 이어 줄 지름길은 없다. 기성 체제를 대체하는 데 필수적인 지지와 광범한 동원 기반을 가진 사회·정치 운동(공민권운동처럼 현재 상태를 정말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운동)은 완전히 성숙한 형태로 갑자기 출현하지 않는다. 자유와 정의를 위한 모든 투쟁의 역사는 이런 운동이 하나하나 차분히 건설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로자 파크스가 1955년 12월 [버스에서]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내주기를 거부하다 체포된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처럼 투쟁에는 절정의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절정 이전의 순간들도 기억해야 한다. 로자 파크스가 몽고메리에서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 지부를 만들었을 때, 테네시 주의 하이랜더 포크 스쿨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해서 투쟁의 미래를 토론했을 때, 인종 격리 반대 시위들에 참가했으나 시 전체의 흑인 반란으로 번지지는 않았을 때 같은 그런 순간들 말이다. 이런 순간들이 다가올 절정의 토대를 놓았다.” (175p)
우리가 진정으로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바란다면, 우리가 시작해야 하는 일은 모든 빈곤과 억압, 폭력에 반대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저항들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기다리지 말고 지금 불의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없어도, 투쟁이 없어도, 기성 제도로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약속을 믿는 대신 나의 참여와 행동으로 새로운 세계를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는 것이다.
대선에서 정말로 진 걸까? 그것은 정말로 우리의, 우리를 위한 싸움이었나? 지금 우울하다면 힐링의 시작이 될 이 질문에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 : 왜 사회주의인가?』가 답해줄 것이다.
- 붉은수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