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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 모멘툼 vol. 01
김민하 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Angry Review ①
저자들 중에 ‘이택광’과 ‘박권일’이라는 이름을 보고 내키지 않았지만 읽어는 보았다. 예전에 88만원 세대를 5페이지 정도 읽다가 어법도 안 맞는 문장들에 어이가 없어 덮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혹시나, 역시나였다. 겨우 1장만 읽었을 뿐인데 화가 나서 쓴다. 이택광이 쓴 창간사 첫 문장부터가 터무니없었다.
“위기의 시대는 기존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책 4쪽)
이게 무슨 말인가? 학교 다닐 적, 돈이 한푼도 없어 종일 자취방에 누워만 있었던 적이 있었다. 세끼를 굶어보기는 그 날이 처음이었다. 배고프니까 별의별 생각 다 나더라. 보통 사람에게 위기란 이런 것들이다. 돈이 없고, 직장을 잃거나 못 구하고, 큰 병 나는 게 바로 위기이다. 그리고 개인에게 닥친 불행에 정부가 뒷짐 지고 있고, 이런 정부를 사회가 무심하게 용인하는 상황이 “위기의 시대”의 단면일 것이다. 난 이택광이 말하는 “위기”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웃의 빈곤을 말로 드러낼 수 없어 해결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고매한 학문을 오래 하신 교수님의 고견이러니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진지전에 대비하여 “무크지는 유격전”이라는 표현에 또 기도 안 찬다. 그럼 신문은 전격전이고, 방송은 공중전, 덧글 다는 건 우주전일 것이다.
창간사 다음에는 박권일이 쓴 머리말이 나온다. 머리말 중에 요리조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이 나온다.
“일베는 소비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의 공백에 침투한 극단주의라기보다 소비자본주의의 극단에서 발생하는 주목 경쟁의 영역에 놓여 있다.” (책 9쪽)
“소비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의 공백에 침투한 극단주의”는 무슨 뜻이고, “소비자본주의의 극단에서 발생하는 주목 경쟁”은 어떤 의미인가? 골을 아무리 쥐어짜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어지는 부언도 없다. 머리말 다음 본문에 나오려나 보다. 그런데 박권일이 쓴 1장의 제목 역시 골 때린다. “공백을 들여다보는 어떤 방식 : 넷우익이라는 ‘보편 증상’”
이쯤 되니 정말 대단한 내용이라도 나오는줄 알았다. 마음을 가다듬어 한 장, 한 장씩 읽어내려갔다. “주체”라는 단어가 남발되고, “코호트”니 “남근주의”니 하는 개념이 불쑥 튀어나오는 거야 애써 참았다. 그런데 마지막 61쪽까지 읽고 나니 진심으로 화가 난다. “소비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의 공백”이니 “소비자본주의의 극단”이니, “보편증상”이라는 말은 낚시를 위한 미끼였던가?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과 논리가 없다시피 하다.
박권일이 쓴 글은 그냥 한 마디로 요약된다. 일베는 엇나간 방식으로 주목받고자 애쓰는 불만 많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 하나마나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별의별 개념들과 인용들을 끌어다가 책으로 만들었으니 무엇하러 이 짓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게다가 이처럼 단순한 주장을 하는데도 좌충우돌이다. 글 처음에 국정원 게이트를 지적한 건 좋았다.
“국정원 사태가 여기까지 밝혀진 이상 ‘우익 담론의 자연 발생 공간으로서의 일베’라는 가정은 기각되어야 한다. ‘자생적 담론’이라는 중요한 전제가 붕괴한 것이다.” (책 27쪽)
이쯤 말했으면 일베의 구성에서 ‘외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밝혀가는 게 당연한데, 어찌된 건지 이 뒤로는 ‘외부’에 대한 언급은 없고, 글의 결론은 자신이 앞서 기각한 ‘자생적 담론’과 다르지 않다.
“일베를 추동하는 ‘내기물’은 고전적 의미에서 ‘사회의 인정’이 아니라 ‘대중의 주목’, 다시 말해 개인이 불특정 다수에게 주목받는 것이다.” (책 56쪽)
아마도 글을 쓰다가 앞을 잊어버렸나 보다. 이 말이 농담이 아닌게 34쪽에 보면 “서두에 언급한 반유대주의에 관한 이야기”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1장 서두 어디에도 “반유대주의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저기에 쓴 글을 짜집기 했다는 증거이다. 앞뒤가 짝이 안 맞는 건 이게 끝이 아니다.
44~47쪽에서 표창원이나 진중권이 일베에 대해 루저가 된 “원한 감정”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 내용에 대해서 “지나치게 ‘약한 설명’”이라고 비판해놓고는, 54쪽에서는 “일본의 사회학자 다카하라 모토야기는 한중일 세 나라 청년 세대의 적대 의식을 분석하는 책에서 일본 청년 세대의 ‘원한 감정’이 사회경제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면서 중요하게 인용한다. 그러면서 57쪽에서는 “원한 감정”을 내포한 “상상된 착취”라는 개념으로 일베를 규정한다. 이처럼 기본적인 자질인 일관성도 없는 저자가 아래와 같이 어렵디 어려운 말들을 늘어놓으면 정말 자기가 이해나 하고 하는 말인지 불신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주체들을 특정한 언어의 사용자로 동결시키는 것, 또는 어떤 단어들을 특정한 주체의 도구로 규정하는 것은 담론 분석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관건은 적대의 배치와 효과를 포착하고 그것이 억압하거나 은폐하는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책 36쪽)
이 책이 가진 악덕, 즉 뜬금 없는 개념들로 부실한 내용 덧씌우기, 논리의 비약, 좌충우돌 등등이 모두 집약돼 있는 60쪽을 마지막으로 인용하면서 평을 마치겠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과연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 각자 판단하시라.
“다소 주제에서 벗어나는 논의이지만 넷우익과 소위 촛불시민을 일종의 길항 관계로 파악해볼 수도 있다. 이는 ‘일베는 촛불에 대한 반작용’ 운운하는 인과적 설명과는 일절 무관하다. 넷우익과 촛불시위는 공히 사회의 반정치화라는 보다 상위의, 포괄적인 사회적 경향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길항 관계라는 건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나 서로 경쟁하고 대항하고 있다’는 의미다. 넷우익이 우파-기층 보수의 불만을 표상하는 ‘공백’으로서 출현했다면. 촛불시민은 좌파-운동권의 공백을 일거에 봉합하고 채워 넣으려는 ‘과잉’이었다. 과잉인 이유는 이들이 반정치적 정치와 정치적 반정치를 동시에 구현하려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정당정치의 지지부지한 과정을 생략하고 광장에서 주권자와 직접 대면하려는 모습은 반정치적 정치인 반면, 보수 우파와의 정치투쟁을 ‘선악의 아마겟돈’으로 파악하는 모습, 예컨대 새누리당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히 옳은 것이므로 우리는 찬성해야 한다는 식의 폐쇄 회로적 진영 논리는 정치적 반정치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책 60쪽)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Angry Review ②
형편없는 1장에 비해서 6장의 「다시 파시즘을 생각하자」는 다소 낫다
글쓴이인 이택광은 극우주의에 대해 하나의 가설을 제출한다.
“극우주의야말로 근대에 대한 열망 이외에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파시즘을 모태로 삼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221쪽)
“극우주의 뿌리에 파시즘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극우주의는 세계대전을 통해 극적으로 19세기 경제적 자유주의가 위기에 봉착함으로써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고전적 파시즘의 변용이자 귀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229쪽)
이택광은 극우주의의 모태로서의 파시즘에 대해 새로이 정의하기에 앞서, 파시즘을 전체주의로서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는 상투적인 어법을 비롯해 이른바 “발생적” 이론들을 검토하고 비판한다. 발생적 파시즘론의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로버트 팩스턴과 니코스 풀란차스가 있다.
그러나 팩스턴과 풀란차스의 이론에는 파시즘을 “특정한 정치적 시기에 발생한 특수한 사건으로 못 박아버리는”(223쪽) 한계가 있다. 파시즘은 전간기 상황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보다 보편적인 구조를 내포한다. 이택광은 파시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파시즘은 “포스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상품이자 이데올로기적 생산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시즘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상품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품은 단순한 사물에 그치지 않고, 대중에게 세계관을 부여하는 소통의 수단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기에서 소통이라는 것은 정동의 교환을 의미한다. 파시즘은 ‘신념’에 기반을 둔 절제된 자기 규율화를 요구함으로써 ‘불쾌한 쾌락’을 발생시킨다. ‘즐겨라’라고 속삭이는 자본주의 쾌락원칙과 이런 파시즘의 요구는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모순이 바로 파시즘을 대중에게 인준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범람하는 자본주의 쾌락에 맞서 자기를 규율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이중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규율적 정동의 효과는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정치에 대한 동의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파시즘은 바로 이런 대중의 원리에 근거해서 영웅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229~30쪽)
길게 인용한 건 특히나 이 부분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해서이다. 극우주의에 대한 해설서에 다시 해설서를 읽어야 할 판이다. 어쨌든 이택광은 이어서 칼 폴라니를 중요하게 인용하며 “자유주의는 파시즘의 인큐베이터”(231쪽)라는 걸 강조한다. 즉, 경제 요소를 시장화하면서 사회를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유주의에 반발하여 경제를 다시 재사회화하려는 운동으로서 파시즘을 정의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근래의 우익주의는 신자유주의가 일으킨 사회해체에 대한 반발이 될 것이다.
그런데 파시즘에 대한 이런 정의는 단선적이고 도식적이지 않은가? 전간기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했던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점, 그리고 고전적 파시즘이 보여주였던 극단적인 인종주의와 제국주의‧군사주의 및 반공주의 같은 복잡한 성격들을 그 정의로부터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점 등이 문제이다. 파시즘이란 개념을 역사와 지역을 초월할 정도로 확장시켜 남은 건 앙상한 추상일 뿐이다. 이제 파시즘은 모든 것이면서 무엇도 아니다. 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적 전통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게 파시즘일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뭐? 파시즘이라는 딱지 말고 무엇이 남는가? 자유주의의 위기 가운데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이든 ‘국가’라는 동일시의 대상이든, 이의 이름으로 다시 질서를 세우려는 게 파시즘이고 극우주의며 일베라고? 의외로 나쁘지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