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프 시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알렉산더 포프 지음, 김옥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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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4 매일 시읽기 6일

#고독부 Ode on Solitude(1717)
- #알렉산더 포프 1688-1744​

그 사람은 행복해라, 그의 바람과 근심이
부모가 남긴 몇 에이커의 땅에 국한되고,
그 자신의 땅에서 고향의 공기를
숨 쉬는 것에 만족하는 이는,

그의 소떼로부터 우유를, 그의 들판으로부터 빵을,
그의 양 떼로부터 옷을 얻고,
그의 나무로부터 여름철에는 그늘을 얻고,
겨울철에는 볼을 받은 자는,

축복받은 자로다! 근심 없이 시간과 날과 해가
부드럽게 흘러가고,
낮에는 조용히
건강한 육신과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자는,

밤에는 곤히 잠을 자고, 공부와 안식을
함께 섞어 즐기고, 달콤한 여흥을 누리고,
명상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인
순수를 즐기는 자는,

이렇게 나 살리라, 세상에 보이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채,
이렇게 나 슬퍼하는 이 없이 죽으리라.
세상으로부터 몰래 떠나, 비석 하나도
내가 누운 곳을 말해 주지 않으리라.

Happy the man where wish and care
A few paternal acres bound,
Content to breathe his native air,
In his own ground.​

Whose herds with milk, whose fields with bread,
Whose flocks supply him with attire,
Whose trees in summer yield him shade,
In winter fire,

Blest, who can uncercernedly find
Hours, days, and years slide soft away,
In health of body, peace of mind,
Ouiet by day,

Sound sleep by night; study and ease,
Together mixed; sweet recreation;
And innocence, which most does please
With meditation.

Thus let me live, unseen, unknown;
Thus unlamented let me die;
Steal from the world, and not a stone
Tell where I lie.

모든 번역이 쉽지 않지만 시 번역은 소설이나 인문서 번역보다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번역된 시를 읽기란 우리말 시를 읽기보다 더 버겁다. 번역이 덜컹거릴 때는 더 그렇다.

<고독부>는 <<포프 시선>>(김옥수 옮김)에 실린 시들 중 한 편이다. 2010년 첫 출간되었고 올해 개정판이 나왔다. 출판사는 '오랜 시간 그 작품을 연구한 전문가가 정확한 번역, 전문적인 해설, 풍부한 작가 소개, 친절한 주석을 제공하는 고급 시 선집'들 중 하나로 이 책을 펴냈다.

역자가 전문가라는 느낌도 물씬 들고, 번역을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한 흔적도 분명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시의 맛깔이 나지 않으니 독자로서 너무 안타깝다.

내가 이 책을 구매한 건 영문학을 전공했고 영문 관련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으로서 약간의 의무감이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주문해야지. 암만. 근데 ㅠㅠ.

대학원 시절 포프의 '머리 타래의 강탈 The Rape of the Lock'(1713)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 시절에는 알렉산더 포프라는 일개인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고, 관심이 1도 없었다. 그때는 작품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서야 그의 삶이 들어왔다. 포프는 열두 살에 결핵 합병증을 앓아 곱사등이 되었다. 다리를 절었고 편두통에도 시달렸다. 가톨릭교도여서 대학에 입학할 수 없어(당시에는 그랬나 보다) 독학으로 문학적 재능을 키웠다. 한마디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외모 컴플렉스가 있었고, 여성을 혐오했으며(사랑 받고도 싶어 했다), 독설을 서슴치 않았다.(요즘 세상이었으면 SNS 논객이었을 듯.)

그의 글은 '풍자와 해학'이 넘친다는데, 아뿔싸, 번역된 글에서는 그런 장점이 십분 살지 않는다. 아쉽다. 물론 번역만의 문제는 아니다. 독자인 내가 당시의 정치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을 잘 모르니 이해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번역가의 해설은 아쉽지 않다.

<고독부>(나였으면 '고독에 부치는 시'라고 했을 듯)는 포프 시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시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듯. 혹시나 해서 검색했는데, '평온한 삶'이란 제목으로 이 시가 인터넷에 떠돌고 있었다. 번역자가 누군인지, 출처가 어디인지는 찾지 못했다. 아는 이 있으면 알려주면 좋겠다. '평온한 삶' 번역도 올린다. 운율은 차치하고, 매끄러움으로 보자면 이 번역에 손을 들어 주고 싶다.

평온한 삶

​​​​물려받은 몇 마지기 땅 외엔
더 바랄 것도 더 원할 것도 없고
제 땅에 서서 고향 공기를 들이마시며 흡족한 자는
행복한 사람

소 길러 우유 짜고 밭 갈아 빵을 얻고
양떼 길러 옷 만들고
나무에서 여름철엔 그늘을
겨울철엔 땔감을 얻네

날마다 조용히 근심걱정 모르고
매순간, 매일, 매년을 스쳐보내는
건강한 육신, 평온한 마음을 가진 자는
복 받은 사람

밤에는 편히 자고, 배우다 때로 쉬니
더불어, 상쾌한 여유로움
그 순박함은 고요한 명상과 더불어
더욱 흐뭇해지네

나 또한 이처럼 흔적 없이 이름 없이 살다
미련 남기지 않고 죽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구나
내 누운 곳 말해줄 비석조차 하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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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 - 벗 2 [2CD]
나훈아 노래 / 아라기획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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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3 매일 시읽기 5일

테스형 
- 나훈아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
들국화도 수줍어 샛노랗게 웃는다
그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아 테스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세월은 또 왜 저래
먼저 가본 저 세상 어떤가요 테스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페친이 '테스형'과 '자야자야명자야'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해서 대체 뭐길래? 싶어 검색했다. 아. 나훈아. 시어머님이 시청하시고 너무 좋다고 했던 공연. 내가 차례 준비를 마치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커피숍을 찾았던 그 시각에 대한민국 시청자 22%가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를 보았다고 한다. 대 ~~~~~ 박.  노장은 죽지 않는다. 죽기는커녕 더 살아 펄펄 뛰시는 듯. 본 사람들마다 감탄 일색. 
모든 노랫말은 한 편의 시다. 
트로트는 즐기지 않지만 글은 즐기는 사람으로서 읽자면 이 노랫말은 독창적이고 유쾌하면서 짜안하다. 
내가 내 어미를 부르듯, 나훈아씨는 아버지를 부른다. 테스형은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다. 이리도 힘든 삶을 내 아비는 어찌 견디며 살았을까 묻는 동시에 '아버지, 나 좀 살려주소' 라는 구원의 호소다. 그것도 간절한 호소다. 여덟 번이나 반복되는 '아 테스형'을 보라. 
대학원 시절 노신부님의 조교를 한 적이 있었다. 조교 마지막날 신부님이 을지로 롯데호텔에서 근사한 저녁을 사주시며 '실소'에 대해 하신 말을 나는 잊지 못한다. 
"곽양은 실소를 해본 적이 있나? 배가 빠지게, 숨이 막히게, 웃는 실소 말이네.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면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긴다네." 
나훈아의 '테스형' 노랫말 첫 두 소절은, 신부님이 말한 실소의 힘의 시적 변형이다. "한바탕 턱 빠지게" 웃고 나면 아픔을 웃음에 묻을 수 있다. 그 어렵다는 삶을 버틸 수 있다. 인생은 날마다, 시간마다, 웃고 살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많은 시간을 고통스럽게, 눈물나게 살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살아내는 자들이 더 많다. 참 다행한 일이다. 
2020.09.30. 노익장 나훈아는 코로나19로 힘겹게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했다. 살아가는 힘 하나를 선물한 셈이다. 

곁가지. 테스형 BC470년생 / 나훈아형 1947년생. '테스형'은 2019년 8월에 발매한 '아홉 이야기'에 수록된 신곡이다. 작사. 작곡. 나훈아. 이 음반은 예스24에만 있다. 이런. 상품을 넣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저 앨범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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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2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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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2 매일 시읽기 4일

어떤 나무의 말
- 나희덕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관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어떤 나무의 말'은 나희덕의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 지성사/2014) 시집에서 첫 번째로 실려 있는 시이다. 2015년 올해의 첫 책으로 읽겠다고 구매한 시집이었다.

이 글은 내 어미가 치매 판정을 받기 전, 수술을 받기 전, 요양원에 입소하기 전, 하나뿐인 자식과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아직은 피울 수 있을 때 쓴 것이다.

​책의 제목인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시작으로 마음을 끄는 제목의 시들을 몇 편 훑다 1부 첫 시에서 가슴 저 밑바닥부터 차고 오르는 저릿저릿한 아픔에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내게 이 시는 '어떤 나무의 말'이 아닌 '내 늙은 어미의 노래'로 들렸다. 여든둘 생일을 얼마 앞두지 않은 내 노모는 살을 파고들고 뼈를 후려치는 강추위에 또 한 번의 생을 살 아 야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니,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두렵고 무섭다.

'늙음에 관하여' 내게 그 어떤 책보다 더 큰 가르침을 준 것은 내 어미의 존재라는 숨 쉬는 책이다. 예순이 되었을 때, 예순다섯이 되었을 때, 일흔이 되었을 때, 일흔다섯이 되었을 때 내 어미가 노상 하던 말이 있었다. "내가 5년만 젊었어도. . . " 5년이 젊지 않은 그 나이에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을 내 어미는 늙었다는, 그것도 많 이 늙었다는 이유로 꿈꾸지 않고 그냥 살았다.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

팔순을 전후로 내 어미는 "5년만 젊었어도" 라는 말을 더 이상 내뱉지 않는다. 어미는 온몸으로 안 것이다. 5년 더 젊어봤자 이미 늙은 몸뚱이고 별볼일 없을 인생이라는 것을. 사는 게 무재미인 내 어미를 울고웃게 하는 건 어린 날과 젊은 날의 즐겁고 아린 추억들, 마흔 고개를 한참 넘어 쉰 고개를 바라보는 딸의 인생.

하나뿐인 어미 떠나면 형제자매 없는 넌 고아가 돼서 어떡하냐고 울먹이는 어미 앞에서 난 퉁을 세게 놓았다. "왜 이러셔 엄마, 내가 엄마보다 훨~~~씬 부자잖아. 엄마 없는 남편도 있지, 아들딸 고루고루 있지. 걱정할 거 하나 없다니까!!!"

그 말에 어미는 눈물을 삼키고 나와 함께 허허실실 웃었다. 자식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모 앞에선 자식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나희덕 시인이 노래한 어떤 나무처럼 내 어미도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져 제 속에서 다시 꽃이 필까, 삶이 황홀해질까 두렵다. 아니, 시의 화자는 "관"이 아닌 "꽃"을, 죽음의 그림자 대신 "나부끼는 황홀"을 간절히 바라는 욕망을 역으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내 어미라고 어찌 그런 욕망이 없을까. 그러나 . . . 어미는 안 다. 이제는 정말로 피어날 수 없는 나이임을. 그저 시들고 또 시들고, 지고 또 져, 언제일지 모를 그 날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존재임을.

남진우 평론가의 해설 중 가슴과 머리에 꽂힌 한 구절. "상실을 살아내는 법." 상실의 대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육체든 인연이든 살면서 상실의 고달픔과 아픔을 비켜갈 수는 없는 노릇. 남진우 씨 말마따나 "대상의 상실이 남겨놓은 공백을 아물게" 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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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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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1 매일 시읽기3일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오늘은 음력 8월 15일 한가위. 코로나19 257일째. 요양원 면회 금지 하염없는 날째.

'엄마 걱정'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에 실려 있다. 이 책이 출판된 해는 1989년이고, 내가 기형도란 시인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1989년이다. 그러나 내가 이 시집을 산 해는 1995년 9월이다.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은 스무 살 중반부터 서른까지 내 암울했던 삶의 길동무 같은 존재였다. 시인은 이미 삼도천을 건너가고 없었지만, 그의 시는 살아, 나처럼 세상이 적막강산 같아 허우적거리는 젊은 영혼들에게 쓸쓸함이라는 유대감으로, 아니러니하게도 시인이 놓아 버린 생을 붙들고 살 수 있게 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엄마 걱정>은 오늘 문득 떠오른 시다. 코로나 19로 요양원에 계신 엄마를 보러 가지 못해서, 며칠 전 겨울옷들을 정리하다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할 엄마옷을 주섬주섬 챙기다 왈칵 눈물이 터졌던 기억이 나서.

엄마가 되어 보니 '엄마'는 확실히 '아빠'보다 존재감이 세다. 이 강력함은 어찌할 수 없는 면이 있다. 나의 어미는 전혀 살갑지 않은 엄마였는데도, 엄마로 살다 보니 살갑든 살갑지 않든 엄마는 어쨌거나 독립적인 나를 있게 하기까지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더 나아가 살리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기의 내 어미를 내 경험으로, 내 상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내 어미를 존중하고, 어미의 삶도 껴안는다.

'엄마 걱정'이란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예전에는 막연한 감으로 느꼈고, 이번에는 확실히 알았다. 엄마 걱정은 나에 대한 걱정이다. 언제 오실 지 모를 엄마, 혹여라도 안 오시면 나는 어떻게 되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걱정이다. 시인의 말대로 그런 상상은 무섭고 두렵다.

나 또한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이였다. 그 아이는 쉰이 넘은 지금도 내 속에 틀어앉아 있다. 이런 걸 심리학 용어로 '내면아이'라고 한다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아이는 이제 웃기도 잘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엄마 없는 집에서 형제가 라면을 끓여 먹다 집에 불이 났다지. 3주째 중환자실에 있다지. 산호호흡기 단 채 추석을 맞았다지. 그 아이들이 엄마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을지, 불이 났을 때 얼마나 무서웠을지,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이런 아이들이 부디 조금이라도 적어졌으면 좋겠다. 

기형도의 시들은 아픈 영혼들을 위한 시다. 쓸쓸함은 때로 쓸쓸함으로 달래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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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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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30 매일 시읽기 2일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 메리 올리버

나는 학교에서 나온다 재빨리
그리고 정원들을 지나 숲으로 간다,
그리고 그동안 배운 걸 잊는 데 여름을 다 보낸다

2곱하기 2, 근면 등등,
겸손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법,
성공하는 법 등등,
기계와 기름과 플라스틱과 돈 등등.

가을쯤 되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다시 불려간다
분필 가루 날리는 교실과 책상으로,
거기 앉아서 추억한다

강물이 조약돌을 굴리던 광경을,
야생 굴뚝새들이 통장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노래하던 소리를,
꽃들이 빛으로만 된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을.​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시 읽기 100일 프로젝트 돌입.(과연 지켜질까??)
한가위 전날. 전을 부치고 김을 굽고 못다 본 장을 보고 저녁을 차려서 먹고 시댁을 벗어나 커피숍에 앉아 시를 읽는다.

메리 올리버를 이제야 알게 된 건 아쉬운 일이고, 이제라도 알게 된 건 다행한 일이다. <뉴욕 타임스>가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시인"이라 인정하고, 김연수 작가가 '나만 좋아했으면, 싶은 사람"이라고 한 시인을 여지껏 모르고 있었다는 건, 내가 그만큼 시와 먼 거리를 두고 살았다는 증거다.

이 시는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완벽한 날들>>에 수록되어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연을 이 시인처럼 멋들어지게 표현할 재간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 시인이 노래하는 글들을 감상하고 감탄할 마음의 준비는 된 독자 같다. 그 지점에서 작가에게 연대의식을 느낀다.

지금은 달력이 가을을 말하기 시작하는 때. 베란다로 투과되는 눈부신 가을햇살에 식물들이 빛꽃을 피우는 때. 이런 것은 추억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늘 가까이 있다. 다만 그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가 없을 뿐. 오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는 추석 전날이니, "통장에 돈 한 푼" 없어도 야생 굴뚝새처럼 시를 노래하련다.


"악천후 속에서 개인의 정신과 우주의 교감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 다만 감히 내 의견을 말하자면, 그런 교감은 푸른 하늘의 축복 아래 햇살 가득한 세상이 평온을 구가하고 바람의 신이 잠들었을 때, 그 조용한 순간에 몰입하는 사람에게 일어나기 쉽지 않을까 한다. 그런 때 우리는 모든 겉모습과 부분성의 베일을 들추고 그 속에 숨겨진 걸 엿볼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태양의 장미꽃잎들 속에 서서 바람이 벌의 날개 아래서 졸면서 내는 소리보다 크지 않게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가장 강력한 가정에(심지어 확실성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평온한 날씨도 엄연한 날씨이며 보도할 가치가 있다.(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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