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시인선 54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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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1 #시라는별 18

불안도 꽃
- 이규리

누가 알고 있었을까
불안이 꽃을 피운다는 걸

처음으로 붉은 피 가랑이에 흐를 때
조마조마 자리마다
꽃이 피었던 걸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몸이 마르고
밤마다 어둠을 고쳐 보는 동안
불안은 피고 있었네

불안은 불안을 이해했을까
그 속에 오래 있으면
때때로 고요에 닿는다는 걸
그건 허공이니까
두드리면 북소리 나는 공명이니까

불안으로 불안을 넘기도 하는 것처럼
꽃은 그것을 알아보았고 그것은 꽃을 도왔으니

수많은 당신이 불안이었던 걸
이제 말해도 될까

흔들리면서
일어나면서

불안도 꽃인 것을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를 띄엄띄엄 읽다 날 잡은 듯 몰아서 다 읽어 버렸다. <<당신은 첫눈입니까>>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이규리 시인은 차가운 눈과 달리 속이 따뜻한 사람 같다. 인간을 보는 눈은 예리하나 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부드럽다. 삶의 속성을 날카롭게 파헤치나 삶을 살아내는 존재들은 다정하게 보듬는다. 예순에 이른(출간 당시) 시인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지는 시집이다.

이규리 시인이 보는 우리 인간은 ˝저마다 아파˝하고(<붕붕 한라봉>), ˝의심과 불안˝을 껍질째 먹고(<껍질째 먹는 사과), 슬픔이라는 ˝찬란에 눈이 베이며 살며 또 견디며˝(<비유법>) 사는 ˝흠 있는 존재˝(<청송사과>)이다. 한마디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당부한다. ˝넌 누굴 닮아 그 모양이니?˝ 같은 말로 누구에게나 있을 상처를 ˝꾹꾹 눌러 확인하지 마라˝고.(<그늘의 맛>) 왜냐하면 붉은 열매가 되지 못한 파란 열매는 파랗다는 사실만으로 생의 가혹함을 겪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나 불완전해서 인간은 또한 실수하고 실패하고 상처 입히고 산다.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을 놓치고(<벗꽃이 달아난다), ˝잘못 찾은 무덤 앞에서 통곡˝도 하고(<때가 되면>),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수 있다는 걸 모른 채 지낸다(<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불완전해서 불안이 점점 증폭될 수 있다.

어찌해도 가스통은 불안통
그 아슬한 불안들을 앞에 보면서

덜그럭 뭐, 그냥 간다.(<뭐, 그냥 간다>)

인생이란 불안을 싣고 가는 ˝가스통.˝ 불안의 용량이 초과하면 언제고 폭발할 가스통. 그럼에도 ˝덜그럭, 뭐 그냥˝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특별한 일> 중)

˝잘려나간 꼬리˝는 우리가 살면서 잃는 무엇일 것이다. 잃음으로써 얻는 것은 무엇일까. 젊음과 건강을 잃는 대신 지혜를 얻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대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에 대한 연민을 쌓는다(<특별한 일>). 모두가 최선을 다해 산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이 자기 나름의 최선으로 산다는 것쯤은 알게 된다. 최선이라는 것도 저마다의 역량과 경험에 따라 그 모양과 색깔이 다른 법이므로. 그러나 제 꼬리가 잘려 위태위태한대도 꿈틀거리며 기어코 어딘가를 향해 가는 존재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최선은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흔들리면서 / 일어나면서 / 불안도 꽃˝이 된다. 우리 모두는 ˝꽃˝이다.

봄이 성큼성큼 오고 있다. 꽃망울이 꿈틀대며 제 속을 톡톡 연다. 추운 겨우내 꽃을 피우지 못할까 얼마나 불안했을까. 아니 꽃들은 불안해하지 않는다. 불안해하는 것은 내 마음이다. 최선을 다해 줄기를 밀어올려 봉오리를 터뜨리는 꽃들을 지긋이 들여다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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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11 12: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흔들리면서 / 일어나면서 / 불안도 꽃 우리 모두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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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행복한 책읽기님 오늘 멍때리기 잊지 말귀 ~ㅎ시력 보호를 위해!

행복한책읽기 2021-03-11 12:56   좋아요 2 | URL
넹~~~~^^

희선 2021-03-12 0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안도 사람이 늘 느끼는 거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것도 좋게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죠 아니 사람 본능이 본래 위험이 찾아올 것을 많이 생각하기도 한답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12 12:50   좋아요 1 | URL
희선님도 시인이시라 역시 뭘 좀 안다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