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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학기 ㅣ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아임소리마마'에 이어 두번째 그녀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솔직히 '아임소리마마'를 읽고 받은 충격이 너무커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은 애써 피하려고 했었다. 이런류의 소설을 읽고나면 왠지 오랫동안 찜찜함이 남아 있는 그런 느낌이 싫어서였고, 당시에는 일본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를 못해 그들의 문화나 사고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였는지도 모른다.
10여개월만에 그녀의 작품을 다시 접했다. 하지만 예전의 그런 느낌보다 이작가의 작품세계와, 치밀한 구성, 세밀한 묘사 등을 찾아볼 수 있었다. '아임소리마마'가 나에게 충격적소설이 무엇인지를 처음 제시했다면, '잔학기'는 충격적소설이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잔학기'는 '기리노 나스오'라는 작가를 이상하고 정이 안가는 작가에서, 대단하고 각별한 작가로 돌아서게 만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작품은 잘 모르겠지만, '아임소리마마'와 '잔학기'를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느낀점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과 내용의 치밀함, 그리고 소름끼칠정도의 세심한 인물묘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분명 비정상적이고 사회의 지탄을 받아야 마땅한 그들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고, 오히려 연민의 정을 느끼게 만드는 소위 '스톡홀름증후군'을 유발시킨다는 점이다. 왜일까? 그게 이 작가의 특징일까...
'잔학기'는 약 200여페이지의 그다지 길지 않은 소설이다. 하지만 내용만큼은 200여페이지를 무색케 한다. 왠만한책 몇 권 읽은 느낌이다. 누가 그랬던가 "짧을수록 강하다고"... [잔학] 사전적의미는 잔인하고 포학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잔인하고 무엇이 포학하다는 말일까. 책을 읽으면서 나는 - 잠시 내용을 설명하자면 부모와 함께 사는 4학년 짜리 여자아이가 아빠가 일하는 옆 도시에서 유괴를 당한다. 유괴를 한 사람은 25살의 청년 겐지. 그는 어렷을때 보호시설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나온뒤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40대의 남자 야타베에 의해 길러진다. 1년여 동안 감금을 당한 게이코는 공장 주인여자에 의해 발견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어서 그를 납치한 겐지를 담당한 검사의 집요함에 그녀는 과거를 놓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서 밝혀지는 진실 진실 진실들...- 진정으로 누가 잔인하고 누가 포학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이야기는 내내 납치한 겐지와 야타베 그리고 검사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중간 중간에 게이코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소녀 게이코에 있어서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은 잔인하고 포악하게 보였을지 모르는 일이다. 납치자는 납치자대로 잔학을, 방관자는 방관자대로의 잔학함을, 찾는자는 찾는자대로의 잔학함을, 또한 그녀를 보살펴야하는 부모는 부모나름대로 소녀 게이코에게 보이지 않는 잔학함을 보이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도저히 4학년 여아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그런 잔학함을 말이다.
사건이후 어린 게이코에게 있어 인생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새로운 사실을 위해 덧입혀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나도 해 봐야지. 짧은 안도 속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상상의 식물을 키우는 일을 그만두고, 천진한 '어린이'로 돌아가기로 했다. 동시에 나는 스스로의 복잡한 어린 시절이 이 밤을 경계로 참된 의미에서 끝을 고한 것을 느꼈다. 그렇다. 나는 노인도 아니거니와 아이도 아닌, 성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p.142)" 라고 한것처럼 그녀의 어릴적 아픈 기억은 그녀를 여자가 아닌 트라우마를 간직한 새로운 인간으로 변하게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른이된 게이코의 심정은 어떠할까? "아무리 생각해봤자 결론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의 생각은 내일의 결론과 이어지지 않으며, 내일의 결론을 위해 오늘의 생각을 싸들고 갈 수도 없다. 매일 다른 바람이 불어 지상의 먼지를 어딘가로 옮겨 가는 것처럼, 공허한 사념이 내 몸 안에서 나선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었다(p.20)" 라고. 작가는 이 한 대목에서 게이코의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보다 어떠한 말이 필요할 것이가.
결국 유괴를 통해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가족, 아버지, 신뢰, 우정, 평온한 생활. 아니 그게 아니다. 내가 잃어버린것은 현실이다....(p.129)" 바로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그녀의 모든 것인 그녀의 현실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잔학기'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한 순간의 경험은 때로는 좋은 밑거름과 미래를 위한 약이 될 수도 있는 반면, 반대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할 아픔과 고통 그리고 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다. '기리노 나쓰오' . 이 작가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잔학하다. 그녀의 또 다른 작품을 집어들게 만들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