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자

 

 

두 벽 사이에

길이 있다

포위당했다

 

물이 흐르지 않고

시간도 떠내려 간다

덩그라니 남겨졌다

 

화살 한 발 툭 놓아져

나를 관통한다

화살도 머물지 않는 골짜기

 

 


 

 

동전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프소리

성당

성모와 아기 예수

먹구름과 찬 바람

 

나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나는 감추려 한 것이 아니라

지키려 한 것이다

 

하프 소리

잉카 전통 옷

유모차와 아기

 

비가 오고

무덤은 녹아내릴 것이고

나는 여기 표지석을 세웠다

 

돌은 천천히 부스러질테니

나 여기 편히 잠드노라

 

 


 

 

열역학

 

 

우리는 모두 울부짖는 분자들이다

 

거리를 가로 지르는 걸음들

자전거가 남기고 간 바퀴들

가만히 진동하는 눈빛들

 

불안한 분자들의 움직임에서

집단적으로 온도가 발생한다

온도는 운동의 평균

 

나를 둘러싼 것들과의 거리가

나를 차갑게 만든다

누가 나를 스쳐 지나갔으면

 

분자가 충돌하는 사건을

반응이라고 부른다

PV=nRT

 

 


 

 

진실

 

 

뉘른베르크 최고의 소시지집에

다시 찾아왔다

 

비밀을 찾아 홀에 들어갔다

 

중국인 넷이 소시지를 뒤집고 있네

 

쉐쉐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이 욕망은 오로지 한 여자에게만 관련된다.)

-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 프란츠는 속수무책이었다.

-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우리의 인생은 단 한번 사는 것이기에 참을 수 없이 가볍다. 이것은 한번뿐인 삶이므로 신중히 살아야 한다는 통념에 반하며, 파르나데스 식의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의 전이다. 어떤 선택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선택에 더 신중을 기할 것이나, 그 선택이 단 한번의 사건에 불과하다면 어떠해도 좋을 것이다.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니. 십자군 전쟁에서 해자에 뛰어들던 병사나, 지뢰를 밟고 갈갈이 찢긴 사진기자나, 그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워 지상에서 금새 휘발돼 버린다.

 

  어떤 무거운 것은 키치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을 은닉한다. 혐오스러운 것은 우리 자신, 인간 그 자체이므로 그 은닉은 혐오스럽다. 완전무결한 키치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밖에 없으며, 무대가 좁아져 더 이상 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어질 때 대장정은 종료된다. 아니, 종말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시는 키치에 저항한다. 키치가 은닉하는 것을 들추어낸다. 그래서 시는 똥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똥. 똥은 아무 쓸모 없지만 그것은 필사적으로 은폐된다. 시는 은폐된 똥에 대한 증언이나 르포다.

 

  인간, 그리고 그 삶 그 자체는 필연적으로 시적이다. 똥을 싸지 않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은닉하거나 배제한다. 예수가 똥을 싸지 않았을 거라는 신학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경박스럽게 똥을 싸는 현장은 은폐된다. 시는 거기에 있고 우리는 시를 훼손한다. 어디선가 대장정을 시작하는 무리가 있고 그 무리는 수많은 시들을 휩쓴다. 희생당한 시는 찬란하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다. 그 가벼움이 거의 무한히 반복된다. 먼지들이 굴러다니며 거대한 먼지 덩어리를 형성한다. 지구도 먼지들이 뭉쳐 탄생했다. 훼손된 깃털같은 시들이 뭉쳐 행성이 된다. 인간은 그 행성에 산다.

 

  인류사는 대장정의 역사가 아니라 문학사이다. 비열한 자들은 살아남았고 기록되었다.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시들이 화석도 남기지 않고 지구를 점유했었다. 시는 오염된 언어의 최소한의 오용이다. 기록된 것은 적으며 그것은 기록되지 않은 것을 의도치 않게 호출하는 통로일 뿐이다. 시는 트로이 목마가 되어 오염된 언어의 세계에 똥을 던진다. 그 똥이야 말로 언어로 조형된 어떤 인간보다 인간답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인간이란 존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운 행성에서 살아간다. 그 중력에서 늘 비극이 발생한다. 키치라는 중력. 키치는 질서를 만들며 질서있게 인간을 살해한다. 살해는 치욕적이며 탈옥은 치명적이다. 아직까지 지구를 떠난 인간은 한 명도 없다. 폭발한 우주인의 잔해는 슬프게도 지구로 추락했단다. 다만 누군가는 그 동안 시를 쓰거나, 시를 살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가능한 전부이다.

 

  누구도 스스로를 장사 지내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자신의 추도사에 흡족해할 시체는 어디에도 없다. 장례는 조악한 번역과도 같다. 그것은 시를 훼손할 뿐 아니라 거짓을 씌운다. 그래서 한 번 더 우리는 한없이 가벼워진다. 장례를 치르며 우리는 완벽히 증발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의 슬픔은 기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귀신이 잇다면, 모든 귀신은 묘지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슬픔을 두고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다.

 

  모든 시는 자기 손으로 쓴 묘비명이다. 묘비명이 없는 자들은 풍화되는 백골에 희미한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귀신을 믿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슬픔을 찾아오기 위해 손수 묘비명을 남길 이유가 없다. 우리는 모두 공동묘지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나와 세계의 본질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나는 그저 실려갔다 실려오고 올라탔다 내려갈 뿐이다. 나의 의지는 무엇도 해소할 수 없다. 그저 바람따라 날려다니는 먼지 같이 한없이 가벼이 대기 중을 떠돌 뿐이며, 그 궤적이 바로 운명이며 먼지의 숙명이다.

 

  남은 의문은 먼지의 숙명이 법칙에 따른 운동인 것처럼 우리의 운명 역시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냐는 것이다.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우리의 존재가 한없이 가볍다는 사실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다만 그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순 있다. 인간은 필연 앞에서는 희망을 거두므로. 희망 없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절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길이다. 혹은 우연 앞에 웃고 또 웃는, 그리하여 삶의 문턱을 넘나드는 삶이 인간의 것일지도.

 

  하여간에 나는 지금 절망할 기력도 없으므로 교체될 비행기를 희망없이 기다리도록 한다.

 

 



위로

 

 

언어의 느낌, 느낌이라는 언어

마음의 여백은 곧 신의 영역, 비어 있는

자만이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나니

사랑은 낯선 이에게도 혼신을 다해 어떤

느낌을 전달하려는 것

느낌은 따뜻하나니

세상엔 아직 온기가 남아있고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으니

이 밤 잠들고 싶지 않아라

목소리는 찾아야만 들리는 것이었네

목소리는 어쩌면 찾으면 들리는 것일 수도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찾아 헤메이니

그 목소리를 빌어 달래주기 위함이네

괜찮아 사랑 받고 있어 사랑 할 수 있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