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련이 반값등록금 공약 실현을 위한 300인 삭발식을 가졌다 한다. 관련 기사를 읽으며 같은 대학(원)생으로서 가슴이 아리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기사에 달린 베플을 보자 분노는 희화화 돼 웃음이 빵 터졌다. 2010년에 개그맨 장동혁이 개그콘서트에서 친 개그란다. 

형이 짜증 안내게 생겼니?
뭔놈의 대학등록금이 그렇게 비싸
신문기사의 통계 자료를 보니까
10년 동안 물가도 36%가 채 안올랐는데
뭔놈의 대학등록금은 116%가 오르냐고
이거 왜 한번 오르면 내려올 줄을 모르냐고
대학등록금이 무슨 우리아빠 혈압이야?
아니 한학년 올라갈 때 마다 우리아빠 얼굴에 주름살만 팍팍 늘어
우리아빠가 무슨 번데기야?
대학 총장이 우리 아빠 얼굴에 보톡스 놔 줄거야?
이거 아니잖아~
형 개그가 어렵니?
형이 오죽 답답하면 이러겠니?
그리고 뭐야? 뭐, 학자금 상환제도? 아~
등록금이 비싸니까 돈을 꿔줄테니 취업후에 갚아라
그럼 취업 안되면 안갚아도 돼?
내가 만약에 돈 못갚으면 나 잡으러 쫓아 다닐꺼야?
니들이 무슨 추노의 장혁이야?
웃통까고 식스팩 보여주면서 말타고 올거냐고~ 따그다그다그닥
오지호랑 이다혜를 잡어. 언년이를 잡으란 말이야.
왜 불쌍한 대학생을 잡냐고~
근데 말이야 간과해서 안되는게 하나 있다.
학자금 상환제도. 이거 나쁜거 아니야.
제도는 좋아. 제도는 아주 쿨~해.
근데 인간적으로 말이야. 이자가 너무 비싸잖아. 이자가 너무 쎄다고
아니 대학이 세계적인 학자를 만드는데지, 세계적인 신용불량자를 만드는데야?
옛날에 우리 아버지들이 소팔아서 등록금 댔지만,
지금은 소팔아서는 택도 없어요.
왜 불쌍한 우리 아버지들이 소처럼 등록금 댈라고 죽을 때 까지 일해야 되냐고.
우리아빠가 무슨 워낭소리야?
어버이날에 가슴에 카네이션 대신 목에 방울 달아드려야돼? 딸랑딸랑~
이게 기쁘니? 어떻게 따뜻한 봄이 오면 쟁이질 하러 갈까?
이거 아니잖아. 슬프잖아.
가르침이 기뻐야지 슬퍼서야 되겠니?
형이 이야기하고 싶은 건 하나야
등록금 인상, 등록금 대출 이런 소리 하기전에
그냥 쿨하게 등록금을 깎아주란 말이야.
봐봐, 사람들도 원하잖아.
 

그래 좀 깍아 주란말이야~ 재단 적립금은 죄다 적립했다 어따 쓸꺼임? 
우리 적립한 포인트로 등록금 좀 깎아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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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을 하나 준비해보려 한다. 민주적 생명론이라는 이름으로 생물학적 민주주의 담론을 거칠게 나마 제안하고자 한다. 

  이 기획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발명품인가?'  

  나는 민주주의가 인간 정신 행동의 관념적 산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이 세계 어디에나, 특히 생명이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생명적 본성이라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결국 구성원에 의한 구성원의 지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 단위의 활동은 그 구성체들의 욕망과 의지의 합의 산물이다. 세포의 활동은 세포를 구성하는 다양한 세포 소기관과 생체 고분자의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개체의 활동은 마찬가지로 세포들의 의사결정과 행위의 총합이다. 또 이른바 직접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사회 민주주의와 같은 다양한 민주주의의 제도적 파생성 및 다양성 역시 생명계에서 쉬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획의 의의는 단지 이미 제시된 민주주의 담론에 대한 생물학적 관점에서의 유비(analogy)를 제공하는데 있지 않다. 각각의 인간 사회가 민주주의의 제 문제에 봉착해 있듯이 생명체들의 민주적 체계 역시 민주주의가 갖는 어떤 한계점들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생명체들은 그 문제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결해 왔기에 오늘날까지 자연선택의 거센 물살을 헤치고 살아남아 생명의 경이로움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생명체의 문제해결 방식으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모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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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전 다윈은 'origin of species'에서 모든 종이 하나의 원시 세포로부터 기원했을 것이라는 혁명적인 가설을 내세웠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그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21세기 생물학 최고의 과제는 신경생물학이다. 우리 인간의 두뇌를 이해하려는 여정이 전세계적으로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나의 학문적 꿈 역시 나의 뇌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의 관점은 '이보디보'이다. 이보디보적 관점이란 'the origin of specis'를 'the origin of neurons'로 변형한 격이다. 마치 최초의 원시 세포로부터 복잡한 인간이 탄생하였듯, 최초의 신경세포로부터 어떻게 이렇게 복잡한 두뇌가 발달할 수 있도록 진화할 수 있었는지를 진화발생생물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나갈 것이다. 이를테면 20세기 진화학자들이 종의 계보를 그려나갔듯, 나는 신경 네트워크들의 진화적 계보를 그려나갈 것이다. 최초의 원시 뉴런으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많은 뉴런들이 갈라져 나왔고, 또 어떻게 구조와 기능이 분화되고 변형되어 인간의 뇌가 진화될 수 있었는지를, 차차 추적해나갈 것이다. 전세계 수많은 신경생물학자들과 함께. 

 내가 연구하는 예쁜꼬마선충은 이런 꿈으로 나아가기에 굳건한 초석이 될 것 같다. 벌레의 이 갸냘픈 몸짓이 단지 벌레만의 것임이 아님을 오늘 절실히 깨달았다. 벌레를 연구하는 것은 진실로, 나를 연구하는 일이다. 오늘도 벌레들과 함께한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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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우리는 얼마를 어떻게 갚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미래를 훔쳐쓰고 있다(레스터 브라운, 도요새)』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은 여러가지 단어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중 하나가 '빚'이라고 생각한다. '금융'이라는 번드르르 한 말로 포장되고 있는 빚은 이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는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빚의 세계는 개인의 삶부터 전지구적 시스템까지 포섭한다. 주택담보대출이나 자동차 할부가 없었다면 많은 개인들이 지금의 물질적 기반을 갖추기 힘들었을 것이며, 전지구적인 통화 체계의 기축 통화인 달러는 모두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마이너스 통장에서 나온 순전한 빚이다.  

 빚의 두가지 본성은 '상환'과 '이자'이다. 갚아야 하는 돈만이 빚이며, 빚에는 당연히 이자가 따른다. 또 하나, 더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주체'이다. 빚에는 당연히 빚지는 자와 갚는자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주체의 분리 위에 서 있다. 국채를 발행해 경제성도 없는 대형사업을 하고, 자원을 과소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자들과 국채를 갚고, 자원고갈에 시달리고, 환경 오염에 몸살을 앓는 이들이 분리돼 있다. 이는 마치 태어난 아이에게 마이너스 통장과 주택담보대출금을 넘기는 격이다. 여기에 이자까지 복리로 불어나 후속 세대가 상환해야 할 몫은 점점 더 불어나고 있다.  

 그런데 빚은, 한도 끝도 없이 불어날 수 있을까? 상식적인 경제적 관념에 따르면, 빚이 너무 커지면 파산에 이른다. 두렵게도, 파산의 조짐은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자연의 역습이 매섭다. 지구온난화는 사막화, 식량생산 감소, 물 부족과 같은 다양한 칼날로 인류의 생존 기반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적 석학이자 37년간 기후변화 문제에 선봉장을 서고 있기도 한 레스터 브라운의 『우리는 미래를 훔쳐쓰고 있다(레스터 브라운, 도요새)』는 우리가 진 가장 무거운 빚을 진단하고 그것을 상환할 방안을 논의한다.  인류에게 '우리는 파산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제 필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파산을 막을 것인가'이다. 레스터 브라운이 위기에 처한 인류에게 어떤 상환법을 알려줄지 궁금하다. 

  

  대한민국의 의사결정문화사
 『룸살롱 공화국(강준만, 인물과사상사)』 
 

  우리 사회의 성역을 허물어 온 강준만 교수가 장자연 친필 편지 논란으로 세상이 다시 한번 떠들썩해 진 때에 『룸살롱 공화국(강준만, 인물과사상사)』을 내놓았다. 이 책이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은 일종의 역사서라는 점이다. 강준만은 이 책에서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이름 지하에서 함께 역사를 시작한 이 땅의 룸살롱 공화국의 면면을 세월의 흐름을 따라 서술해나가고 있다. 요정에서 룸살롱으로, 룸살롱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 기업형으로 변화해나가는 동안, 접대부들이 호스티스에서 10대 소녀로, 연예인으로 다양화되는 동안 군사정권, 판검사, 언론, 정부, 심지어 청와대까지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라 부를 수 있는 거의 모든 집단이 이 지하의 역사를 써내려왔다. 그리고 강준만은 그 역사를 회고하고 증언한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압축성장을 거듭해온 지난 60여년간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중요 의사결정은 항상 밀실에서 소수에 의해 이뤄졌다. 그리고 그 밀실은 대개 룸살롱 이었을게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룸살롱 공화국의 역사 위에 쓰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거다. 그래서 『룸살롱 공화국』을 통해 룸살롱 문화를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 문화와 의사결정 주체들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이 될 것 같다.  

 

 부조리의 공장에서 그는 무엇을 기다릴까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황주환, 생각의나무)』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황주환, 생각의나무)』은 불편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한 평교사가 학교라는 창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다시 학교를 성찰한 책이란다. 학교는 체제의 생산, 재생산, 변혁이 모두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것들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학교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준비되고 있는 미래를 볼 수 있다. 반대로 어느 인간 집단에서나 발견되는 부조리가 학교에서 발견될때면 나는 한층 더 민감해진다. 학교 안의 부조리는 미래의 부조리로 재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속해있는 학교나, 내가 속해있던 학교나 이 시스템의 근간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경쟁을 통한 사회적 위계의 창출이다. 여기에 여러가지 외적인 요소들이 가미되면서 실제 현실은 사회적 위계의 '창출'보다 사회적 위계의 '재생산'에 가깝다. 솔직히 말하자면 학교는 계급 사회의 전초기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 사회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인 '국민교육'이 내세운 목표가 아니다. 근대사회는 계급사회를 떨치고 보편적 인간을 내세우며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전히 근대사회를 표방하는 대한민국 역시 인성을 함양하고 교양을 쌓으며 여러가지 덕목을 겸비해 행복한 주체적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의 겉목표는 여전히 표방되고 있다. 그 가식과 위선이 빚어지는 교육 현장에서 황주환 선생님은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내가 겪은 부조리들이 교육 수용자의 측면에서 느낀 것들이라면 교육 공급자의 측면에서 선생님들이 느끼는 부조리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래서, 그가 기다리는 아주 작은 것이 무엇인지, 왜 그것을 기다리는지 무척 궁금하다. 

  

 이 중생을 웃게할 치명적 농담
『붓다의 치명적인 농담(한형조, 문학동네)』 


 학부시절, 대학을 휴학하고 인도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 여파로 한창 인생무상을 느끼며 절에나 들어갈까 하고 방황하다 불교가 궁금해 금강경 해설서를 읽었다가 '아, 절에 들어가겠다는 생각 역시 허망한 것이구나'하는 깨달음을 얻고 방황을 풀었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새로나온 책 목록을 살펴보다 한형조 교수의 『붓다의 치명적인 농담(한형조, 문학동네)』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출판사 책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종교'가 아니라 '인문', 즉 오로지 '인간학'의 관점에서 불교에 접근한단다. 불교에 관심은 많았지만 엄두가 잘 나지 않았던 나에게 매우 매력적인 카피라이트였다. 

“삶의 목표는 쾌락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속 깊이 이상주의자들입니다. 로맨티스트들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왜 보살님네들이, 남편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아이들도 다 컸으며, 아파트 평수도 남부럽지 않은데, 왜 절을 찾아,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대웅전에 참배하고, 참선에 열중하십니까. 그것은 외면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리 내면은 여전히 가난하고, 불만족스럽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 교수의 전언에 전적으로 동감하기에 여전히 가난하고 불만족스러운 내면을 가진 이 중생은 그의 농담이 얼마나 치명적일지 한번 들어봐야겠다.  

 

닉 레인, 그 이름만으로도 기대되는 책
『생명의 도약(닉 레인, 글항아리)』

 『미토콘드리아』로 날 깜짝 놀라게 했던 닉 레인이 돌아왔다.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 필치로 진핵생물의 탄생과 성과 죽음의 진화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던 전작에서 나는 정말이지 지적인 전율을 느꼈다. 생물학도인 내가봐도 엄밀한 사실에 입각한 서술과 동시에 비전문가 대중들도 흡입시키는 서사전개와 탄탄한 문장력은 처음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맞먹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생명의 도약(닉 레인, 글항아리)』을 통해 지금 우리의 모습을 일군 진화의 10대 발명에 대해 논하겠단다. 나는 생물학의 궁극적 목표가 나 자신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진화론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 중에서도 역사학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우주의 먼지들로부터 어떻게 내가 탄생할 수 있었는지를, 화석을 뒤지고 세포를 들여다보고 유전자를 검사하면서 그 과정을 상상하고 또 증언하는 학문이다. '도약론'은 진화론의 대세이다. 인간 진화의 기반이 된 다양한 사건 중 '결정적 사건'이 있다는 것이다. 레인은 이 책에서 세포, 유전자, 생체 에너지, 진핵생물, 성, 힘, 감각, 의식, 죽음의 진화를 논한다. 모두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단순한 '썰'이 아니라 엄격한 과학적 증거들에 입각해 논증을 펼치는 그인만큼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로 나를 납득시키고 매혹시킬지 너무나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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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엽이 깔린 수풀 사이로 한 무리의 척후병들이 주변 지역을 정탐한다. 그 중 하나가 도시를 발견하고 정찰 활동을 벌인 후 자신의 도시로 돌아가 보고한다. 그날 오후, 해가 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신호로 수만의 병사들이 일제히 도시를 빠져 나와 목표 도시로 행군한다. 그들에게 더 이상 결전에 대한 결의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이웃 도시에 도착한 군대는 급급히 방어태세를 갖춘 도시를 쉽사리 공략한 후, 도시의 아이들을 빼앗아 다시 발길을 돌린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식량도, 보물도, 여자도 아니다. 그들은 오직 ‘아이’를 원한다. 아이를 빼앗긴 어미들이 절규를 하며 한 병사에게 달려들지만 그는 가볍게 뿌리치고 자신의 도시로 귀환한다. 아이들은 곧장 노예육성소에 넘겨진다. 여왕의 세뇌교육 아래 아이들은 머지않아 도시의 훌륭한 일꾼으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먼 과거의 어느 고대 도시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웃 도시들로부터 아이를 탈취해서, 그들을 노예로 키워 생산계급화 하는 어떤 도시의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고대 도시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이 지구상에 수도 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중 어떤 도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노예사냥을 위한 출병을 하고 있다. 이 도시는 바로, ‘개미’의 도시다.

        'Slave-making ants'로 알려진 Polyergus 속의 개미들은 Formica 속에 속하는 개미들을 노예로 만들어 그들의 노동력과 생산력에 기생하는 ‘노예화 개미’들이다. 이들을 소개한 다큐멘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는데, 나는 지난여름 미국 애리조나의 한 숲에서 그들의 행렬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당시 나는 미국자연사박물관 소속 야외생물학기지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두시간여동안 내가 목도한 노예사냥 장면은 가히 'Culture shock'이었다. 일체의 낙오자 없는 십여 미터의 대열, 부스럭거리는 낙엽 위를 행진하는 수만의 발자국 소리, 망설임이란 찾아볼 수 없는 돌격 장면, 잠깐의 전투 뒤 포획한 알과 애벌레를 문 개미들이 또다시 만들어낸 십여 미터의 대열. 노예해방의 나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미들의 노예사냥 관찰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고자 하였다. 그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지구상에는 인간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사회가 있으니 바로 ‘개미’의 사회이다. 1억년도 더 전에 개미들이 등장하였으니, 사회생활로만 따지면 이들이 인간의 선배라고 할 수 있다. 개미들은 인간보다 훨씬 전에 계급사회를 형성했으며, 생산의 분업화를 이룩하고 심지어는 Polyergus 속처럼 노예제도를 발달시키기도 하였다. 이들의 사회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어떤 면에서 환경을 개척하고 적응해나가는 능력은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가치판단 없이 Polyergus 속의 노예제도를 평가해보면 인간이 절대 이룩할 수 없었던 완벽한 형태의 노예사회를 이루어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개미의 생존 방식과 사회성 중에서도 가장 많은 주목을 끄는 것은 아마 개미의 ‘계급체제’ 일 것이다. 개미는 크게 생식개미와 비생식개미로 나뉘며 오로지 생식개미 계급만이 종족의 번식을 담당한다. 비생식개미 계급은 모두 암컷이며 이들은 역할에 따라 병정개미와 일개미 등으로 나뉘는데, 개미는 유일하게 전투계급의 개체를 생산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미의 계급사회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특별한 번식방법으로 인해 가능하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 모두 엄마와 아빠의 염색체를 반반씩 물려받는 데 비해, 개미는 둘 다 물려받았을 때 암컷, 하나만 물려받았을 때 수컷이 된다. 따라서 수개미는 염색체가 반밖에 없기 때문에 생식과정에서 그 반을 모두 자손에게 넘겨주게 되고, 모든 딸 개미들은 수개미의 동일한 염색체를 받게 된다. 그 결과, 자매들끼리 아빠 개미의 염색체는 100%, 엄마 개미의 염색체는 50%를 공유하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75%의 염색체를 공유한다. 반면, 일개미가 직접 자손을 낳으면 염색체의 반만을 물려주어 50%의 염색체만을 공유하기 때문에 자손을 낳는 것 보다 자매들, 즉 전체 군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더 이득이 된다.

        이렇게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심으로 똘똘 뭉친 개미들은 농업 혁명을 일궈내기도 하였다. 농업 혁명을 통해 본격적인 정착 생활이 시작되고, 잉여생산물로 인해 계급사회가 형성 되었던 인간과는 반대로, 개미들은 이미 형성된 자신들의 도시에 안정적인 식량 수급을 위해 최초로 농사를 시작하였다. 잎꾼개미 혹은 가위개미로 알려진 개미들은 중남미 지역의 열대림에서 서식하는 ‘버섯재배’ 개미들이다. 일개미들이 식물의 잎을 잘라 거대한 지하 도시의 버섯 배양실에 옮기면 기능개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잎을 잘게 씹어 모아둔다. 잎꾼개미들은 이 잎더미에서 균사체를 배양하고 그 성장을 관리하며, 그로부터 균포를 수확하여 먹이로 이용한다. 더군다나 이들은 가슴과 배 부분에 방선균을 키우는데, 이 방선균은 항생물질을 생성해내는 대표적인 미생물로, 버섯이 세균에 감염될 경우 그 부분을 몸으로 문질러 항생제를 ‘투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간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기 수만년 전부터 개미들이 이미 항생제를 사용해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농업 혁명의 중요한 한 측면인 목축도 이미 개미들이 먼저 일궈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많은 개미들은 진딧물과 공생 관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진딧물은 자신이 소화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액을 빨아들이기도 하는데, 이때 잉여 수액이 배 끝에서 새어나온다. 개미는 이 진딧물들을 조직적으로 보호하며 잉여 수액을 빨아들여 식량으로 이용하는 농장을 오래전부터 운영해온 것이다. 어쩌면 도축을 일삼고 새끼에게 줄 젖을 억지로 짜내기도 하는 인간들보다 개미들이 훨씬 더 진보한, 환경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한 목축업을 운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류의 과학기술이 축적되고 발전하면서 인간은 좀더 적극적으로 자연을 개발하고 환경을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우리가 자연의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지구의 주인이라는 생각까지 품게 되었다. 인간의 사회가 곧 세계이며, 자연환경은 인간 사회를 떠받들기 위해 존재한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작은 미물에 불과해 보이는 개미와 개미 사회의 존재는 이 인간중심의 사고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인류문명의 소산이라 여겨지는 많은 역사적 성과들이 실제론 인류가 생겨나기도 전 개미들이 벌써 일궈낸 것들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오만함을 비웃고 있는 듯 하다. 어쩌면 수천만년 동안 지구의 주인으로 군림해온 개미들 앞에서 우리는 ‘주름 잡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원자폭탄 투하에도 개미는 살아남았다지 않는가.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라는 오만함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혁명의 시조이자 사회생활의 선배인 개미들에게 지혜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최재천, 개미 제국의 발견 - 소설보다 재미있는 개미 이야기, 사이언스북스, 1999
Howard et al., BEHAVIORAL ECOLOGY OF THE SLAVE-MAKING ANT, POLYERGUS BREVICEPS, IN A DESERT HABITAT, THE SOUTHWESTERN NATURALIST 30(2):289-29 
베르베르 베르나르, 이세욱 역, 개미, 열린 책들, 2001
오태광, 개미가 키우는 두가지 미생물, 중앙일보, 2006년 1월 20일자 20면 기사
<獨 생물학자, 1억2000만 년 전 개미 발견…진화연구에 단서>, 2008년 9월 17일자 이남진 기자 뉴시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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