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두고 보려 했던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 2000)를 드디어 보았다. 이 영화를 보고야 말리라는 생각을 한 것은 공교롭게도 내 연구 때문에었는데, 우리 프로젝트를 프리젠테이션 할 때 항상 등장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 바로 캐스트 어웨이의 한 컷이기 때문이다.

 

   선충이 궁핍한 서식처를 탈출하기 위해 높은 곳으로 기어올라 벌이는 특이한 행동을 연구하는 우리 프로젝트에게, 무인도를 탈출하기 위해 산 정상을 오르는 척(톰 행크스)이 적절한 유비였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직접 본 적이 없었고, 보지도 않은 영화를 두고 유비를 한다는 모종의 부채의식 때문에 언젠가는 이 영화를 봐야지 하고 있었던 차에, 어젯밤 드디어 빚을 청산했다.

 

  이 영화를 보기 전 나는 캐스트 어웨이가 대략 무인도 생존기 혹은 탈출기 정도의 영화라고 추측했다. 톰 행크스가 무인도에 추락해 거기서 생존해서 탈출해나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했던 것이다. 실제로 영화 전개 대부분은 그의 생존 및 탈출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느낀 영화의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이 영화는 나에게 살아남냐, 살아서 나가냐의 문제를 넘어 살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 즉 실존의 문제를 던지고 있었다.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극적으로 살아남은 척은 잠깐 구조에 대한 희망을 걸지만, 이내 포기하고 생존 투쟁에 나선다. 불을 만들고 동굴에 거처를 마련하며 코코넛과 크랩으로 최소한의 생존 스킬을 획득한다. 그리고 영화는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3년 후로 넘어간다. 척은 완전히 원시인이 되어 바닷속 물고기를 창을 던져 손쉽게 잡아 낸다. 그에게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것은 더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런 그가 뗏목을 만들어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한다. 나름 안정된(?) 삶을 확보했는데, 아니, 태평양 한 가운데로 나무 뗏목을 타고 나아간다니, 대체 어떤 동기가 저런 무모한 행동을 하게 한단 말인가.

 

  뗏목을 만드는데 필요한 로프를 구하는 과정에서 그 실마리가 드러난다. 섬에 있는 모든 줄나무로 로프를 만든 뒤에도 여전히 로프가 부족하자, 그는 30피트나 되는 로프를 떠올린다. 1년 전, 그가 섬 정상에서 자살을 시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로프이다.

 

  생존의 문제, 즉 '살아남냐, 죽어나가냐'의 문제에서 해방된 척에게 그전까지는 생존투쟁에 가려져 있던 문제, '살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드러났을 것이다. 생존이 위협받을 때는 살아남는 것 그 자체가 맹목적인 지향이 되었지만, 막상 그렇게 살아남게 되자 '이 삶은 무엇인가'라는 자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구조가능성도 거의 없는, 탈출의 방법도 묘연한, 태평양 한 가운데의 무인도에서의 삶은 지난 3년과 마찬가지로 처절한 생존투쟁의 연속일 뿐, 그 이상은 없다. 그의 삶에 주어진 능동적인 선택지는 오직 하나 뿐이다. 언제, 어디서 죽을 것인가. 척은 아마 인간적인 삶은, 그의 자살로만 겨우 확보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완벽주의자인 척은 확실한 자살을 위해, 나무 인형을 만들어 로프에 건 후 정상의 통나무에 걸어 시험을 해보았다. 그런데 그 통나무가 나무인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부러져 버린 것이다. 그는 망연자실해졌다. 자살은, 나의 의지로 달성할 수 있는 '자유'라 여겼건만, 그것조차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 절망은 더 큰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죽음조차 그의 선택이 될 수 없다면, 그는 삶이냐 죽음이냐의 선택을 포기해버리고 그냥 무조건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처음 그가 무인도에 도착해서 맹목적으로 살아남았듯이, 이제 맹목적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전자와 후자가 다른 것은, 척에게 이제 죽음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삶은 죽음을 피하는 삶이지만, 살아가는 삶에서 죽음은 삶의 함수가 되지 못한다. 척이 뗏목을 이끌고 태평양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제 그에게 삶은 '살아갈' 대상이지 '살아남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음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므로, 그에게 어디에 갈 수 있는 가는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만을 결정하면 될 뿐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진대, 파도나 폭풍 따위가 어찌 그를 막아서겠는가.

 

  죽음을 넘어선 척이 뗏목을 이끌고 태평양을 건너 닿으려고 하는 곳은 어디일까? 그 곳은 분명 그의 사랑 켈리이다. 그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와중에도 구명조끼를 포기하고 켈리의 사진이 담긴 시계를 선택한다. 그렇게 그의 사랑은 맹목적이다. 사랑이 수단이고, 연인이 조건이었다면 삶을 포기할 수도 있는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없다. 맹목적인 사랑은 맹목적 삶을 지탱하고 이끌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보루이다. 그의 뗏목은 그가 단 하루도 잊지 않고 바라본 시계 속의 켈리를 향해 나아간다. 그에게 켈리를 다시 만날 수 있냐 없냐는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켈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그의 삶의 전부이며 그것 만으로도 충분한 삶이라고 받아들인 척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이 정도에서 망망대해에 떠있는 뗏목을 배경으로 끝이났어도 훌륭했을텐데, 이 영화의 진면목은 그 이후의 전개에서 드러난다. 척이 구조돼 켈리를 만난 것이다.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린. 그가 나무 뗏목으로 태평양을 헤쳐 멤피스로 돌아왔는데, 그의 모든 여정을 감내해내게 한 그 켈리가 없어진 것이다. 척의 환영리셉션이 끝나는 장면에서 나는 조마조마했다. 그가 자살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켈리를 만나러 간다. 어쩌면,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러 간 것일게다. 켈리를 만난 척은, 왜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냐고 추궁하는 대신, 무인도에서 몇 년간 척의 켈리였던 시계를 돌려준다.

 

  이제 삶의 모든 것이자 단 하나의 것이었던 켈리를 청산한 척이 아마도 죽음의 길을 향해 떠날 때, 빗속을 뚫고 켈리가 척에게 달려온다. 그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키스한다. 척이 찾아온 켈리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다만, 3년이라는 시간 전에 멎어버렸을 뿐. 켈리는 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기다렸고, 그를 사랑했다. 다른 남자와 꾸린 집에서 그는 여전히 척의 차를 타고 다니고, 척의 구조 정보를 수집했다. 척의 실종 이후, 모든 게 멈춰버린 켈리는, 척의 귀환과 함께, 잠시 동안의 혼란 후에 다시 척의 켈리로 돌아온 것이다. 생명이어라, 척!

 

  놀라운 것은, 3년 전과 같이 척의 차에 탄 켈리와 척이 둘의 사랑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한 키스를 나눈 뒤, 척은 켈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켈리는 별 말 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켈리는 다른 남자의 아내로서 살아가고, 척은 또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지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척을 사랑하는 켈리가, 켈리를 사랑하는 척이 살고 있을 것임을. 그 사실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살만하며 아름다운 것임을!

 

  그렇게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 켈리를 집으로 보낸 척은, 무인도에서 건져온 천사의 날개가 찍힌 택배물을 배달하러 떠난다. 천사 날개의 주인공은 부재중. 아쉽게 소포만 두고 메시지를 남겨 놓고 길을 떠나는데, 북미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네거리에서 천사 날개의 주인공을 만난다. 그녀가 소포가 기다리는 집으로 떠날 때, 척은 네거리 위에 서서 세상으로 뻗은 네 갈래의 길을 바라본다. 그리고 미소짓는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나는 안다. 척이 천사의 날개를 좇을 것임을. 그는 삶을 긍정하는 존재이기에. 살아가는 한 끝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할 척이기에. 켈리든, 천사든, 중요한 것은 사랑이오, 문제는 사랑이다. 사랑이 있는 한 삶은 가능하다.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한다면, 사랑을 삶을 가능케 하리라.

 

  사실, 이 영화가 내게 큰 위로를 주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내 영혼이 조난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에게서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꿈도 없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살아있다는 것의 무참한 맹목이 너무나도 버거웠다. 나에게 허락된 것은 그저 쾌락을 좇는 삶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기력이 나의 마음을 지배했고, 일상과 습관만이 내 생활을 지탱했다. 그저 나뿐인 시간은 최대한 피하려 했고, 불가피할 땐 술 없인 버티기 힘들었다.

 

  무인도에 떨어진 척처럼, 우리는 '타자'라는 '바다'로 둘러싸인 '삶'이라는 '무인도'에 불시착한 조난자들이다. 망망대해에서 뗏목을 타고 탈출에 성공한 척의 이야기는 영화일 뿐이다. 현실은, 진실은, 삶이라는 무인도는 기껏해야 탈출하려고 시도할 수 있을 뿐, 영원히 탈출할 수 없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나는 저 바다의 타자성에 압도되고 고립되어 왔다. 내가 띄운 뗏목들은 난파되어 해안으로 돌아왔고, 지금도 불안하게 파도들을 맞닥뜨리고 있다. 새로운 뗏목을 띄우는 일은 갈수록 버거워진다.

 

  이대로 무인도에서 늙어 죽는 일밖에 남지 않은 건가, 하고 털썩 주저앉아 있던 나에게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조난자들에게 사랑을!

 

  오직 사랑만이, 나와 너, 나와 세계 사이에 놓인 이 아득한 대양 위에 뗏목을 띄우는 힘이다. 뗏목 위에서 적어도 우린 서로 다른 무인도에서 왔지만 같은 바다에서 절망하는 존재다. 타자라는 바다 위에 절망의 공동체를 꾸리는 사랑이라는 작업은 얼마나 눈부시게 행복한 행위인가. 나는 기꺼이 그 절망을 위해 뗏목을 띄우겠다.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것은 삶 그 자체이므로. 무인도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사랑뿐이므로.

 

  그래, 다시 난파되어 무인도로 돌아올지라도, 저 시꺼먼 바다를 향해 뗏목을 띄울거야. 지금,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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