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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雅歌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박현빈의 '곤드래 만드래'는 힘차고 역동적이다..
사뭇 발랄하기조차 하다..
하지만 난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오승근의 '장미꽃 한송이'를 더 좋아한다..
젊은 우리 작가들의 소설들을 주로 보다가..
오랜만에 만나 본 이문열씨의 글이 그랬다..
마치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오승근의 노래처럼..
어린시절 아버지는 내게 많은 책을 사주셨다..
세계문학전집 같은건 기본이고..
위인전이나 무슨 과학시리즈 등등..
그 책들을 다보고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내 생에 처음으로 용돈을 모아서 샀던 소설책이 바로..
이문열씨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대상수상작으로 실려있던..
1987년도 제1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었다..
그 책을 원체 재미있게 봤던지라..
그 후로 대구시립 중앙도서관에서 이문열의 책들을 발견하는대로 읽어 나갔었다..
대학생이 되어서..
이 삼국지 저 삼국지 많았지만..
이문열의 삼국지를 전공 수업시간마다 열심히 탐독하였고..
-_-
그렇게 제일 아끼는 작가로 내맘속에 자리매김 했었는데..
누차 말하지만..
이문열씨는 내가 자기를 아끼는 사실은 몰랐으리라..
-_-
어거지로 인연을 엮으려면 나와 같은 사투리를 쓰는 경상도 출신이란 사실 정도..
암튼 학창시절의 그 인연이 이어져..
뒤늦게 인터넷으로 도서를 구입하는 방법을 터득했을때..
예스 24에서 가장 처음 주문했던 책도..
새삼 다시 읽고 싶어진 이문열의 삼국지 10권 셋트였을 정도이니..
아가(雅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
우선 이 책을 보고있으며..
앞서 말했듯이..
그 문장의 유려함에..
역시 이문열 이구나란 생각을 하게된다..
워낙에 그 유명세 덕분에 구설수에 많이 오르는 편이긴 하지만서도..
그의 문장만은 역시 필자의 기대를 한시라도 져버리지 않는듯 하다..
특히나 내 고향의 정겨운 사투리라던지..
건어물상 혀 짧은 노인들의 대사 같은건..
참으로 놀라웠다고 해야하나..
마치 바로 옆에서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듯..
제목과 달리 내용은..
이문열씨가 성장하던 그 시절에..
옆집 감나무집 딸같은..
그런 문학소녀를 짝사랑한..
희미한 옛사랑의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작가의 고향에 존재했었던..
당편이란 이름의 소위 말하는 반푼이의 몇가지 에피소드에..
소설적 상상력을 더해 극화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당편이는..
몸과 정신이 정상이 아니다..
동네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으로 점차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잡일 이나마 소소하게 해내면서..
그런 공동체 사회에 나름대로 적응해 나가는 발전을 보이지만..
어릴적 버림받은 당편이의 괴이한 등장은..
보는이로 하여금 측은함과 동정심을 자아내고..
어떤 이들에겐 피하고 싶은 무서움으로도 다가왔었다..
글을 보면 마치 눈에 선해지듯..
오른팔 휘익.. 왼발이 철퍼덕하는..
당편이의 불편한 걸음걸이..
그런 당편이를 거두어준 최초의 사람은..
바로 가세는 점차 기울어가나..
그 양반으로서의 위엄만은 여전하였던..
녹동어르신 이었다..
'니가 아무리 미련하기가 소 같은 머슴놈이라 카지마는, 어째 주인 낯을 깎아내라도 이래 여지없이 깎아내롤라 카노? 나는 새도 궁해 품안으로 날아들믄 안 잡는다 카는데 니가 사람 껍데기를 쓰고서, 그래, 명색 사람이 찾아온 거를 어예 이래 박대할 수 있노?
보이 하마 내 집인 줄 알고 찾아온 거를, 그것도 살리달라꼬 찾아온 거를, 뭐라? 꺼다 매삔다꼬? 개 끌듯 끌어낸다꼬? 예라이, 이 숭악하기가 도척 같은 눔아!'
녹동어르신은 저렇게 당편이를 쫒아내려는 사람들에게 역정을 냈더랬다..
그리고는 이렇게 당편이를 자기 식구로 맞아들였다..
'어예기는 어예? 하마 내 품에 날아든 새를. 당편이는 우리 식구라.
그러이 여러 소리 말고 낑가조라. 너들하고 한 쌈에 여주라, 이 말이따.
타고난 게 들쭉날쭉해도 이래저래 빈줄랴 어울래 사는 게 사람이라.'
당편이가 그 허접하고 숱작은 머리채에 갑사 댕기를 했을 때..
'에, 그년 참 곱다. 우리 당편이 댕기 해놓이 한 인물 더 난다.'며..
꿈과 희망을 안겨 준 녹동어르신 이었으니..
그래서 였을까..
뒷날 녹동 어른이 운명을 달리했을때..
당편이가 보인 슬픔이 그리 유별났던 모양이다..
어떤 감상적인 집안 아저씨는..
세상에서 가장 굵고 맑은 눈물 방울을 그때 보았다고 단언했었다니..
그런 당편이와 당편이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하니..
문득 한 편의 단편소설이 떠오른다..
이혜경씨의 '틈새'라는 소설집에 들어있던..
'문밖에서'란 단편 소설이었는데..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모르는 사이에..
'우리'라는 이름으로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게 되는..
'집단의식'에 의한 폭력과 억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예를 들면..
어떤 모임이나 단체에서..
우리 모두가 귀를 뚫었으니 너도 귀를 뚫어야 된다는 권유 아닌 강요..
보다 더 흔하게는..
점심시간에 식당엘 가서 우리 모두 짜장면을 먹으니 너도 볶음밥 시키면서 유난떨지 말고..
그냥 짜장면 먹어라 그러는 것들..
하지만 시대가 달라서 그랬던건지..
역설적으로 이 책에선..
그런 우리가 '우리'로서의 테두리안에서..
우리의 역할을 다하게 서로 다독여 주고..
챙겨주고 아껴주고 보살핌으로서..
이 풍진 한세상을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깨우쳐 주고 있다..
그렇게 비록 우리라는 집단의식에서 발로한..
그것은 폭력과 억압의 다른 이름인 강요와 강권 이었지만..
그런 우리라는 단체에 꾸역꾸역 엮어 넣음으로써..
몸과 정신이 온전치 못한 당편이도 우리와 같은 다같은 사람이고..
우리편이라는 의식을 고취시켜주었기 때문에..
그 작은 동네에서 수많은 에피소드를 만들며..
수많은 관용구를 만들어낸 주인공이 될 정도로 슈퍼스타(?)가 되고..
책을 읽으면서도..
그 슬픈 운명을 타고난 그 여인의 질곡많은 삶을..
슬픔대신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흐뭇하게 관조할 수 있었던 이유였던것 같다..
돌이켜 보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의 철없던 어린시절의 무리들은..
당편이에게 몹쓸 장난도 하긴 했었는데..
그것 마저도 여성으로서 당편이의 삶에 있어 하나의 재발견을 해주게끔 했던..
그런 긍정적인 요소도 있었던것 같기도 하다..
비록 결국엔 아기도 갖지 못하고..
남편과 성도 제대로 공유하진 못했지만..
황장군과의 첫번째 결혼과..
말미에 혀짧은 건어물상과의 동거등으로..
조금이나마..
당편이가 사랑을 느꼈던 사실들도..
약간은 다행스러운 사실들이었다..
특히 아직도 눈에 아른거리는 이 장면..
당편이와 혀짧은 건어물상이 단오날 데이트 하는 장면..
'아이고, 당편아, 니 어데 가노?'
'히이잇, 신촌에 약물 먹으로 간다, 우리'
'에헴, 우이야꼬(우리라꼬) 맨얄(맨날) 집구석에 트에박혜(틀어박혀) 있을 수사 있예껴(있니껴)? 돈 얌가(남겨) 죽을 때 싸가지고 갈 거도 아이고오....'
그리고 이 날의 기억을 끝으로..
화자가 기억하는 당편이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 후 당편이의 말년의 삶은..
그녀를 박대했던 장애인 보호감호 시설로 자기발로 다시 찾아간다는..
뭐 그런 이야기였던것 같다..
이제 당편이에겐..
유일하게 그녀를 '우리'로 인정해 주었던..
그 '우리'가 더 이상 주변에 남아있지 않았었기에..
처음에 기대했던..
옆집 문학소녀와의 아스라하고 풋풋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아니었지만..
그 보다도 더 아름다웠던..
우리 동네 반푼이 당편이에 대한 모든이들의 따스한 사랑..
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꽤 오랜만에..
재미있고도 감동적인 소설을 본 것 같았다..
암튼..
감히 추천하고픈 책이다..
특히 인상깊었던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옮겨 적으며 마무리 짓는다..
그렇게 당편이가 이해되자 처음 노여워하는 집안 아저씨를 달래기 위해 벌인 그 술자리는 뒤늦은 이별의 의식으로 바뀌었다.
해장술과 낮술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독특한 취기에다 십년이나 무의식 속에서 숙성된 추억의 취기가 상승 작용을 일으켜 꼭지가 돈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탈을 벼르며 기다리고 있을 서울을 까맣게 잊고 대낮부터 삼거리 방석집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밤늦어 제자리에 꼬꾸라질 때까지 마시며 저마다 당편이에게 때늦은 별사를 바쳤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일품은 아무래도 시인 지망생이 부른 노래일 듯싶다.
달이여, 너는 내 사랑을 알고 있는가
무덤도 없이 떠난 그녀를
어느 하늘가를 떠도는지
부서진 가슴으로 내 사랑을 찾아 한없이 헤매었네
만일 그녀를 만나거든 내가 울고 있다고 전해 다오.
달무리 슬픈 그 밤 이별의 눈물
안녕히, 안녕, 내 사랑아
다시 만날 날을 믿으며
헤어져 멀리 있더라도 언제까지나 잊지 않으리라
달빛 속에 사위어가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만약 그 이국 민요의 가사가 그가 번안한 것이고, 그 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 당편이에게 바쳐진 것이라면, 그는 젊은 한때의 지망생이 아니라 진작부터 시인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