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리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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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머의 루머의 루머 ㅣ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5
제이 아셰르 지음, 위문숙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3월
평점 :

평범한 고등학생이자 소위 '범생이'인 클레이는 어느날 보낸 사람을 알 수 없는 수상한 소포를 받는다. 상자 속에는 앞뒷로 1에서 13까지 순서가 매겨져있는 7개의 테이프가 들어있다. 궁금한 마음에 1번 테이프를 재생한 클레이는 그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얼마전 자살한 해나 베이커임을 알고는 화들짝 놀란다. 게다가 그녀는 테이프를 건네 받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끝장낸 이유 중 하나에 해당된다며, 7개의 테이프를 모두 듣고 정해진 다음 사람에게 보내지 않으면 그 내용을 세상에 공개할 거라는 경고까지 잊지 않았다. 테이프를 재생한 순간 클레이에게는 그것을 계속해서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권이 없다.
테이프의 13개의 면에서 해나는 각 면 당 각각 한 명의 피의자를 지목한다. 그리고 자신의 자살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그들의 행동과 그것이 미친 크고 작은, 때론 치명적인 영향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 키스 상대이자 그녀를 병들게 만든 루머의 시발점인 저스틴 폴리에서 출발한 해나의 이야기는 미묘하게 얽히고설킨 다음 인물들 사이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와 함께 장난삼아 또는 자기 과시용으로 만들어졌던 해나에 관한 루머는 사람들의 입을 거칠수록 점점 더 크게 부풀러져 그녀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놓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괴소문은 서서히 그녀의 목을 조여오고, 종극엔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그녀를 내몬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테이프 속 과거와 테이프 밖 현재라는 두 개의 다른 시점이 서로 교차되며 전개되는 독특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테이프 속에서 피해자의 시점으로 루머 속 숨겨진 진실을 들려주는 해나의 이야기와 테이프 밖에서 주변인의 시점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방관해왔던 지난 풍경들을 곱씹고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클레이의 생각이 동시에 보여지면서 해나가 겪었을 아픔과 고통, 그리고 외로움을 안팎으로 보여주며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테이프 속에서 해나는 자신이 왜 자살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자신을 둘러싼 온갖 괴소문 때문에 얼마나 상처받고 괴로워했는지를 토로한다. 왜곡되고 변질된 소문 뒤에 묻혀있던 자신만이 아는 진실을 밝히며 해나는 말한다. 소문의 여러가지 버전 중에 가장 인기 없는 게 바로 진실 버전이라고, 사람들은 진실보다 소문을 더 믿으려 한다고 말이다. 그속에서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믿어주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아줄 사람을 애타게 찾는 해나의 절규가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여러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첨삭된 소문은 처음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각색된다. 심지어 여러 가지 버전으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진실이 밝혀도 사람들은 소문에 더 귀를 귀울인다. 진실은 소문만큼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과 상관없는 누군가의 소문은 흥미거리로 심심풀이 땅콩으로 돌고 돈다. 그리고 어느새 진실을 압도하며 새로운 진실로 굳어진다. 소문이 소문을 낳고 그 소문이 또다른 소문을 양산하는 것, 그게 바로 소문의 특징이다. 이책 <루머의 루머의 루머> 또한 그런 소문의 특성을 고스란히 제목으로 반영해낸다.
죽음을 결심한 해나는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 아이들에게 보낸 걸까.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온갖 루머와 사건들에 연관된 명단에 이름을 올린 아이들에게 평생동안 시달릴 죄책감을 남기기 위해서? 아니면 일종의 공범인 아이들에게 서로의 잘못을 까발리기 위해서? 어쩌면 그런 복수의 마음이 그녀에게도 조금은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해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러나 여전히 변함없는 '진실'을 그들에게나마 밝힘으로써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고 속박하던 루머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그들이 잠시나마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한창 꽃피워야 할 나이에 해나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아니, 그녀 주변의 아이들이 그녀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죽어 마땅한 짓을 벌였느냐? 그건 아니다. 알고보면 아주 사소한 행동들이 대부분이다. 일상에서 취하는 우리의 사소한 행동이 누군가의 삶을 포기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섬뜩해진다. 죽음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해나 역시 절박한 심정으로 주위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절망 속에 방치한다. 우리는 얼마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살고 있을까. 나는 다르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다만 누구든 각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기에 테이프를 통해 들려주는 해나의 이야기가 전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몇몇 외에 그녀의 테이프를 받게 될 다른 아이들은 해나와는 다른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도 있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또 그런 해석이 타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해나가 느꼈을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여전히 아쉽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좀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잘 찾아보면 그녀의 곁에는 손 내밀면 기꺼이 잡아줄 클레이같은 친구도 있었는데 말이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루머로 희생당한 십대 소녀와 그녀 주변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루머에 내재되어 있는 잔인한 폭력성과 누구든 루머의 피해자 또는 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의 메시지를 남긴다. 해나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내내 작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던 톱스타 故 최진실 씨가 떠올랐다. 그녀의 죽음 또한 인터넷에서 유포된 근거없는 악성 루머가 그 원인이었다.
장난삼아 던진 작은 돌멩이가 연못에 살고 있는 개구리를 죽일 수도 있듯이 별다른 생각없이 내뱉은 말 한 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나도, 당신도,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무심코 내뱉던 말에 대해, 말이 가진 보이지 않는 폭력성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분들이나 온갖 소문들로 인해 삶의 용기를 잃어가시는 분들. 그러나 누구보다 이책을 권하고 싶은 건 아무 생각없이 심심풀이 땅콩마냥 남들에 대한 소문을 만들고 부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그래, 뭘 듣고 싶니? 워낙 버전이 많아서, 어떤 게 제일 인기 있는지 모르겠더라. 그래도 가장 인기 업는 게 뭔지 알아. 그건 바로 진실 버전이야. 너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진실. (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