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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게으른 건축가의 디자인 탐험기
천경환 지음 / 걷는나무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 어느 게으른 건축가의 디자인 탐험기 | 천경환 | 걷는나무 | 2009.12
사소한 것에 집착할 때가 많다. 평소에 무심코 지나치던 것이 어느 순간 눈에 딱! 걸리면 그때부터 고민은 시작된다. 이건 도대체 왜 이렇게 해놓은 걸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 등등 남들이 보기엔 '쓰잘데기 없는' 그런 고민에 머리를 싸매기도 한다. 그런데 나만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이 남자, 나보다 더 강적이다. 한쪽 모서리를 '따낸' IXUS 70의 디자인에 대한 찬사는 시작에 불과하다. 알록달록 예쁜 스위스 지폐를 보며 달러와 엔화, 원화의 구판과 신판까지 끌어들여 기나긴 담론을 펼친다. 겨우 지폐 한 장에 대한 이야기로 열 장의 지면을 너끈하게 채워내다니, 그의 놀라운 오타쿠적 분석력과 입담에 혼이 쏙 빠진다.
자신을 게으르다고 하나 실은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부지런을 떨며 세상의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그 모습들을 끄집어내어 치밀하게 비교 분석하며 걸쭉한 입담으로 맛깔난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 남자, 바로 건축가 천경환이다. 그의 두 번째 책인 『어느 게으른 건축가의 디자인 탐험기』는 우리가 흔히 만나는 평범하고 사소한 풍경에서 찾아낸 특별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은근과 끈기를 자랑하는 저자의 집착과 몰입과 사유의 결과물이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이책은 건축 디자인에 대한 내용보다 세상 속 일상의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들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야기는 크게 mm, cm, m, km의 네 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각 단락의 이름이 뜻하듯 그의 세상 디자인 탐험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에서 모두가 공유할 만한 사회적인 담론으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건담에 대한 추억에서 회의테이블 설계로, 지하철 풍경을 살펴보다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이야기를 거론하는 식이다. 각 단락마다 저마다의 재미를 갖고 있었지만, IXUS 유저도 아니고, 건담의 추억도 없으며 돈의 디자인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며 분석하고픈 마음도 없는 내게 mm의 이야기는 그저 타인의 취향이었고, 그의 가산 패션거리 프로젝트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km의 세세한 작업 부분은 조금 지루했다. 그런 까닭에 너무 개인적이지도 전문적이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거리만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cm와 m의 내용들이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다.
특히 공공 시설물, 그중에서도 지하철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놓았다. 지하철 입구의 주변 안내도, 지하철 안의 비상용 손잡이, 엘리베이터 사이의 애매한 공간, 역사 계단의 손잡이, 지하철 내부의 의자 칸막이와 손잡이 구조, 의자 배치에 따른 내부 공간 디자인 등 지하철에 대한 거의 모든 내용을 다루면서, 저자는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프랑스, 뉴욕의 지하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것들의 장단점을 비교 분석하며 해결방안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한다. 저자가 소개한 뉴욕 역사에 설치된 인형이 전하는 작은 기쁨이나 일본 역사 손잡이에서 발견한 발상의 전환, 프랑스 지하철 14호선에서 접하는 작은 배려 등은 우리 지하철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꺼내기 힘든 비상용 손잡이나 지하철 승객들의 마음을 헤아린 좌석 칸막이나 손잡이 디자인 부분도 차차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외 길바닥과 볼라드에 대한 그의 고찰 또한 흥미로웠다. 우리 주변의 동시대적 문제를 함께 발견하는 느낌이랄까. 연말이면 남은 예산을 소비하려는 지자체들로 멀쩡한 인도를 뒤엎고 새로 치장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지만 바닥 다지기 같은 기본이나 마지막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들인 돈이 무색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길바닥이 꺼져 물이 고이거나 맨홀 뚜껑이나 가로수 테두리들과의 충돌로 울퉁불퉁하다. 평소에도 저걸 어떻게 좀 깔끔하게 할 순 없을까, 조금만 신경쓰면 훨씬 보기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했던지라 깔끔하게 마무리한 동경의 맨홀 뚜껑 주변 모습과 되는 대로 끼워맞춘 우리네의 것을 비교한 사진을 보는 순간 그저 긴 탄식만이 흘러나왔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길 위의 점자블럭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인도의 점자블럭은 중간에 맨홀 뚜껑이나 볼라드를 만나면 대부분 그 주변으로 둘러가게끔 설치되어 있다. 만약 자신이 점자블럭에 의존해 길을 가는 시각장애인이라면 과연 그것을 그런 모양으로 설치했을까. 책에는 맨홀 뚜껑에 점자블럭을 입히는 작은 수고로 장애인들을 배려한 일본의 사례가 실려 있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배려가 얼마나 부족한지 새삼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었다. 차량 진입을 막는 볼라드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머무르고 있다. 장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경복궁 근처의 볼라드처럼 원래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그외 디자인적인 면까지 함께 살린 조화로운 모습의 볼라드를 주변에서 더 많이 만나볼 수 있길 살며시 기대해 본다.
솔직히 처음에는 뭐 이런 것까지 따지고 드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스위스 지폐에 대한 심하게 세밀한 분석에서는 사실 조금 질리기도 했다. 그런데 읽다보니 남들이 쉽게 보지 않는 부분을 살피고 따지고 비교하며 또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그의 작업들이 은근 재미있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뭐 이런 것까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없지는 않지만, 또 너무 파고들어 조금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덕분에 다양한 디자인에 대한 지식 습득은 물론 그동안 편향되어 있던 시선의 전환까지 경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일상의 면면들을 보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책에서 '천경환스러운 게으른' 시선으로 찾아낸 일상의 이면을 만났다면 이제 자신만의 시선으로 또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보자. 또 아는가, 무료했던 우리의 일상이 한결 흥미진진해질런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