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밝혀졌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엮음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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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밝혀졌다 │ 조너선 사프란 포어 │ 민음사 │ 2009.03 


한 번 시작한 책은 가급적 끝을 보려고 하는 편이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면 어쩔 수 없이 중간에 덮게 된다. 먹기 싫은 음식 먹듯 안 넘어가는 책장을 억지로 훑다보면 글자는 읽었으나 내용은 전혀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몇 번을 고쳐 읽어도 안 될 때는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 싶은 생각에 다음을 기약한다. 세상에 읽을 책은 많고 재미있는 책을 읽기에도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그 '재미'라는 것은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또한 같은 책이라도 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으니 그때 즐겁게 읽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간혹 책을 덮으면서도 미련이 남는 책이 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독특하고 실험적인 데뷔작인 『모든 것이 밝혀졌다』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예전에 읽었던 『종이로 만든 사람들』에 이어 내 취향이 실험적인 소설과는 친하기 힘들다는 걸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소설이지만 조너선 사프란 포어에 대한 사람들의 찬사가 이책에 대한 괜한 미련을 남겼다. 또한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렇게 읽다가 멈추고 다시 펼쳤다가 덮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바뀌었고, '드디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이후 오랜만에 끝까지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 승리의 희열을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를 처음 알게 된 건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첫 책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통해서였다. 독특한 제목만큼이나 특이하지만 정말 괜찮다는 리뷰어들의 호평에 귀가 팔랑거려 책을 구입했는데 다른 책들을 먼저 읽느라 내내 책장에서 잠재우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데뷔작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접했고, 이왕이면 데뷔작부터 차근차근 읽어보자는 마음에 이책을 먼저 펼쳤다. 결과적으로는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거의 일 년에 걸쳐 힘들게 읽다보니 그의 다른 소설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단편 소설도 한 편 만났는데, 이책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결론은 그의 상상력과 내 코드는, 슬프게도, 그리 잘 맞지 않다는 거였다.


대학생이었던 조너선은 2차 세계대전 때 우크라이나에서 자신의 할아버지를 구해주었던 한 여성을 찾기 위해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들고 우크라이나로 떠났지만 결국 그녀를 찾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작가의 이런 실제 여행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소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미국인 대학생의 이름은 작가와 같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이고, 그도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들고 할아버지의 생명의 은인을 찾아 우크라이나를 찾는다. 그리고 그의 일정을 도와줄 여행 가이드 알렉스와 운전기사인 그의 할아버지, 불청객인 그들의 개 새미 데이비드 주니어 주니어와 함께 불편한 여행을 시작한다. 그렇게 이책은 작가의 경험과 허구의 경계를 오가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소설은 세 가지의 이야기가 교차 편집되어 있는 다층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조너선의 여행 가이드를 맡았던 알렉스가 들려주는 그들의 여행 이야기, 다른 하나는 알렉스가 미국으로 돌아간 조너선에게 쓰는 편지,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조너선이 할아버지의 고향 마을인 트라킴브로드에 대해 쓴 소설이다. 어설픈 가이드와 고집스런 운전사와 주책맞은 암캐와 그 모든 것이 낯선 미국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좌충우돌 그들의 여행은 알렉스의 수다스러운 글로 독자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특히 그의 엉터리 영어와 조너선에게 꼬리치는 새미 데이비드 주니어 주니어의 행동은 큰 웃음을 준다. 알렉스가 조너선에게 쓴 편지에서는 알렉스의 서툰 영어 실력을 보여주는 오탈자와 비문으로 또다른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극중 조너선이 쓴 트라킴브로드에 대해 쓴 소설은 세 가지 형태의 이야기 중 가장 읽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고향 마을인 트라킴브로드에 대한 전설을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허구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데, 솔직히 그 내용들이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아 몇 번을 되풀이해서 읽어야 했다. 그러나 다시 되돌려 읽다가도 어느새 정신이 까무룩해지기 일쑤였다. 옮긴이는 이에 대해 '허구보다 더 기막힌 현실을 환상적인 묘사를 통해 오히려 더욱 효과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리고 그에 대해 어느 정도는 동의하나, 그래도 읽는 내내 가장 괴로웠던 부분이었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책을 끝까지 읽은 건 작가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이렇게 독특하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소설을 이어가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는 그 힘든 여정에 대해 어느 정도 보답이 되어 주었다. 다행이었다. 조너선과 알렉스 일행은 트라킴브로드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그곳은 이미 우크라이나에서 사라져버렸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그곳에 대한 언급을 꺼려했고, 남아있는 흔적조차 거의 없었다.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철저하게 사라져 버린 걸까. 포기를 떠올릴 때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이 그들에게 힘들게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곳 사람들이 잊고 싶었고 지우고 싶었던 무거운 과거의 그 사건에 대해서.

2차 세계대전은 우크라이나의 작은 시골 마을에도 번져왔고 나치의 만행은 그곳의 유태인에게도 예외없이 행해졌다. 목숨 앞에서는 누구나 이기적이게 된다. 비겁해지기도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선을 넘기도 한다. 순박했던 트라킴브로드의 사람들 또한 그러했다. 대항할 수 없는 폭력에 의해 이유없이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할 때다. 한때 그들과 친구였고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배신했고 고발했다. 수많은 유태인들이 불 속으로 끌려갔고 죽음을 맞았다. 트라킴브로드에서 나치가 죽인 것은 유태인이었지만, 그들을 배신하거나 방조한 대가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을 새겨 놓았다. 

우크라이나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유태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조너선의 할아버지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치의 그런 만행을 무기력하게 방조할 수 밖에 없었던 알렉스의 할아버지. 양극단에 선 그들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누기에 앞서 그들은 모두 폭력으로 얼룩진 시대의 희생자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길고도 미로같은 소설을 통해 궁극적으로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 아닐런지.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한순간에 목숨을 잃고 삶의 터전을 빼앗겨 버렸다. 엄청난 사건이 지나간 후 급기야 그 흔적마저 사라져 버린 트라킴브로드를 통해 작가는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되살려낸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안타까운 슬픔까지도 함께.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해 준 작품인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미국의 9ㆍ11 테러를 주제로 한 소설이라고 한다. 유태인 대학살이라는 만만찮은 주제를 자신만의 실험적인 방식으로 능수능란하게 펼쳐낸 데뷔작인 『모든 것이 밝혀졌다』만 보더라도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또한 만만찮은 내공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어쨌거나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튀는 작가임에는 분명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과 과감한 형식에의 실험은 그의 수려한 글솜씨와 잘 어우러진다. 

독특한 상상력과 새롭고 실험적인 형식으로 씌여져 도전 정신을 한층 북돋워주는 글들을 즐기는 독자라면 이책 역시 실망스럽지 않을 것이다. 진중한 주제 의식 또한 한결 무게를 더한다. 그러나 기존과 다른 형식에 쉬이 익숙해지지 못하거나 초현실적인 이야기들과 친하지 않다면, 무엇보다 집중력이 약해 다층 구조의 복잡한 이야기를 읽어내기 어려운 독자라면 자신의 취향이 바뀔 때까지 이책은 잠시 보류해 두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명확히 갈려질 수 있는 책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묵직한 메시지와 파격적인 형식은 감탄스럽지만 읽기는 꽤나 힘들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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