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쓰는 글로는 무척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2011년 하반기 결산도 그냥 슬쩍 넘어가 버렸는데 말이죠. -_-
늘 그렇듯 시간은 흘러가고 책들은 들꽃처럼 피고지는 중입니다. 못 보고 지는 꽃이 허다하고 책 또한 그렇습니다.
사실 놓친 책들의 대부분은 놓쳤다기엔 애매하죠. 앞으로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는 책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그렇게 된 것들은 대개 그렇게 되었을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그래도... 올해 상반기에 나온 장르소설들 중 개인적으로 아깝다고 판단되는 작품들을 모아 봤습니다. 이 페이지를 읽어 보셔도 대개는 다시 스쳐 지나갈 뿐이겠으나, 그중 단 한 권이라도 '아' 싶은 책을 발견하신다면 그걸로 저는 기쁘겠습니다. 원래는 그러려고 MD가 되었던 거니까요.
책들의 등장 순서는 무순입니다. 당연하겠지만 다들 유독 매력적인 구석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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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 44>입니다. '유독 매력적인 구석' 그런 거 없고 그냥 모든 면이 매력적이죠. 걸작입니다. 걸작 미스터리 스릴러예요. 2009년에 나왔다가 판매 부진으로 절판된 뒤 다시 올해 봄에 재간되었습니다. 장점을 열거하는 게 부질없는 작품이죠. 있는 좋은 말 다 끌어와 붙인 것처럼 보여서 허풍처럼 느껴질 거니까요. 이 작품은 스토리도 탄탄하고 그 배후의 메시지도 훌륭하며, 역사 및 사회에 대한 성찰이 소설 속 트릭과 캐릭터들의 관계 속에 이상적으로 녹아들어 있습니다. 보세요. 얼마나 부질없는 추천인가요. 그런데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만큼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출판사에서 화려한 홍보문구를 괜히 표지 상단에 박아놔서만은 아닐 거예요.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판매 담당자가 이런 말을 잘도 하는군요... 다 제 불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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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페니의 <치명적인 은총>입니다. 역시 미스터리 소설. 전작 <스틸 라이프>에 이은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두 번째 책이죠. 캐나다의 한적하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주로 살인)을 추적하는 이야깁니다. 21세기에 쓰여진 작품입니다. 앗. 도그빌 같은건가? 폐쇄적인 인맥으로 둘러싸인 시골 마을의 숨겨진 탐욕 같은...?
음, 그런 게 물론 없기야 하겠습니까만, 사람이 죽었는데 당연히 뭔가는 있습니다만, 이 시리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커뮤니티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케이스입니다. 최근의 미스터리가 비극의 장렬한 전개로 감동을 안겨준다면, 가마슈 경감을 비롯한 이 시리즈의 등장 인물들은 그 비극으로부터 서로를 지켜내려는 의지를 통해 감동을 제공합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그런 의지가 촌스럽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아요. 이 바보들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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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실 해밋 전집 세트입니다. 저는 이 시리즈가 최소한 레이먼드 챈들러 정도는 나갈 줄 알았습니다. 완벽한 클래식이니까요. 모든 미스터리 소설 안내서에서 찬양받으며, 일반 소설사를 아우르는 책에까지 심심찮게 등장하는 매우 드문 작가입니다. 그런 작가는 거의 없어요. 위대한 영도자이신 에드거 앨런 포를 빼면 레이먼드 챈들러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해밋이 챈들러보다 인기가 덜한 이유는 단지 해밋의 주인공들이 필립 말로보다 뻘소리를 자제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해밋을 더 좋아하지만요. 네? 아뇨, 무슨 말씀을. 저는 챈들러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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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사카 쓰마오의 <아 아이이치로의 사고>입니다. 역시 시리즈물이지만 단편 모음이라 읽는 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멍청해 보이는 미남인데 사실은 헐렁한 것뿐인 천재 미남이라는 박탈감 넘치는 충격적인 설정의 미스터리 단편집이죠. 트릭도 다양하고 터치도 가벼워서 읽는 재미가 좋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가벼울 리 없고요. 특히 몇몇 단편의 짜임새는 문장 장난질로 작가입네 하시는 분들이 무릎 꿇고 배우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설정이 독특해서인지 보는 사람만 보는 책이 되었습니다. 독특하다는 건 이상한 게 아닌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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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스트가 상시 업데이트 된다면 주기적으로 올라올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입니다. 그 이유를 여기다 두어 줄 써 봐야 슬프기만 하니까 넘어가겠습니다.
<그레이스>는 19세기 캐나다애서 일어난 실화를 배경으로 한 살인 미스터리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미스터리 소설과는 다릅니다. 전개가 싸이키델릭하죠. 19세기 캐나다의 풍경이나 관습 묘사가 인상적이긴 하지만 역시 맘편히 읽을 책은 아닙니다. 주인공 그레이스의 불안정한 심리를 둘러싼 정신과 의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수많은 징후만을 남기고, 결말은 그 징후의 발아를 독자에게 요구합니다. 무책임하다고요. 아닙니다. 프로파간다류 페미니즘 소설과 달리 아무 말 않고 독자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뿐이죠.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겁니다. 독자들에게요.
순문학(이 말 안 좋아합니다만)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섬세한 묘사와 어두운 성정의 조합이 좋습니다. 국내 출간된 애트우드의 소설 중에서 손꼽을 만한 작품이에요. 역시 올해 출간된 <홍수>도 주목할 만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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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키 시즈코의 <제3의 여인>입니다. '제3의 사나이'와 관계가 있을 것도 같지만 그렇진 않습니다.
실제로 작품이 좀 오래되기도 했지만, 고풍스런 느낌이 좋습니다. 처음에 이 책 소개할 때 불란서 느와르 영화들을 연상케 한다고 했었는데요, 트릭이나 반전이 굉장하다기보다는 서서히 침잠해 가는 주인공의 정신상태를 바라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인물 심리가 직접적으로 서술되기보다는 주위 경치나 사물 묘사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되는데, 이게 복고풍 영화를 떠올리게 해요. 장 르누아르나 끌로드 샤브롤 같은. 그러니까 본격미스터리만 편식하시는 분들은 그냥 지나치셔도 됩니다. 이건 공기를 느끼는 소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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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러브시의 <다이아몬드 원맨쇼>. 미스터리가 껴 있긴 하지만 서스펜스 + 휴먼 드라마라고 봐야겠죠. 역시 재밌습니다. 꼼수 부리지 않고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느낌이 좋죠. 육체의 무게가 느껴진달까. 드라마 '추적자' 같은 느낌이죠. 사회 부조리랑은 별로 관련 없지만요. 음모가 있고 달리고 싸우고 협박하고 협박당하고 서로 머리를 굴립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사람답게 살자'는 슬로건이 있고요. 네 그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죠.
드라마로 만들기에 좋은 소재입니다. 작년 <인간의 증명>도 드라마 성공했는데 하나 또 만들어 주시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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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드밀의 <와일드 파이어>입니다. 군사-스파이 스릴러는 이제 한국에서는 별로 각광받지 못하는 분야입니다만, 그래도 게리 올드만님께서 스마일리 요원이 되어 나름 분위기를 살려 주셨죠. 어쨌든.
군사 스릴러는 장르 특성상 대개 보수적인 내용이기 마련이고, 자국에 우호적이게 마련입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나 다 그렇죠. 그래도 이 작품은 그런 냄새가 좀 덜합니다. 그래서 추천하는 건 아니고요. 설정이 재밌습니다. 일종의 본격 입배틀 스릴러랄까. 영화 '8마일'에 나오는 에미넴 랩배틀을 방불케 하는 왁자지껄한 논쟁이 이 '스릴러'의 중심이거든요. 물론 그 입배틀의 최종 결과가 핵무기 사용이기 때문에 흥미가 배가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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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첸바크의 <마지막 증언>. 이 작가 얘기 하자니 마음이 너무 아파서 안되겠습니다. 이런 작가를 못 알아보니까 나라가 무너지고 문학계가 무너지고 그런 거 아닐까요.
대표작 <하트의 전쟁>을 그따구 영화로 만들어 버린 영화 제작진과 주연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너무 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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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입니다. 그 프랑켄슈타인인가? 네 그겁니다. 아니 무슨 구닥다리.. 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물론 막 소름 돋고 그런 내용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는 구닥다리 맞습니다만. 그러니까 일종의 환상소설로 읽으시면 됩니다. 구스타프 마이링크의 <골렘>처럼요.
왜 태어났는지 자문해 본 적 있는 분들께 추천합니다(모든 분들께 추천한다는 얘깁니다). 박사님이 대답해 주실 거예요. 차갑지만 슬프고, 연민에 차 있지만 어쩌지는 못하는 그 대답, 그 순간의 눈빛이 신의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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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벨랴예프의 <물고기 인간>입니다. 20세기초에 전성기를 누렸던 어드벤쳐 SF의 대표작 중 하나죠. 한국에 완역판이 등장한 건 처음이고요, 그나마 어린이판 일어 중역 축약판이 나온 것도 수십 년 전.. 이런 책 안 나오고 뭘 하고 있었던 걸까요.
아가미를 달고 물 속에서 살게 된 소년이 청년이 되고.. 나만 왜 바다에서 살아야 하나 이런 질문도 하게 되고, 뭍에 있는 처녀를 좋아하게도 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다의 왕자죠. 고독한 곳에서라야 그는 가장 아름답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스토리는 클리셰에 가까울 정도입니다만 백 년 남짓한 세월동안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유가 다 있습니다. 슬픔에서조차 맑고 곧은 힘이 느껴지죠. 명작을 내 주신 출판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책 좋아하는 소년소녀들아 너희도 감사 드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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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 발라드의 종말 3부작이 올 상반기에 모두 나왔습니다. 아방가르드한 표지 디자인이 인상적이죠. 내용도 그렇습니다. 소위 종말 소설에 기대되는 스펙터클은 정말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근데 그래서 좋은 거예요! 세계종말과 스펙터클을 세트메뉴로 만들어 버린 헐리우드가 원망스럽습니다.
이 시리즈는 세계가 어떤 요소에 의해 갑작스런 환경 변화를 맞게 되었음을 선언한 뒤, 그 상황에 대응하는 이 세계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기만 하죠. 일종의 사고 실험 같습니다. 그 전개도 결론도 각자 다른 이 세 권을 한데 엮어 생각하면 무척 풍부한 종말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인류와 지구 앞에 펼쳐져 있음에 감동하실 겁니다. 이 시리즈는 스펙터클의 자리에 꿈의 노래를 집어 넣었습니다. 진짜로 종말이 올 때 아마 우리의 기분이 그럴 거예요. 꿈과 노래 말입니다. 저는 정말 헐리우드가 원망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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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실 해밋이 이렇게 허우적대는 마당에 필립 K. 딕이 주목받을 가능성은... (이 시리즈의 가장 신간인 <티모시 아처의 환생>은 SF라고 하기엔 좀 그래서 뺐습니다)
PKD는 수많은 SF 팬들과 대부분의 순문학 팬들이 놓치고 있는 암흑물질입니다. 언젠가 이 물질의 질량 측정이 이루어질 때 깜짝 놀라실 겁니다. 정말 놀라실 거예요...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