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거 좀 블랙코메디잖아.  

 

 신문에 실린 <역사 사용설명서>의 서평을 보면서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하긴 괴상한 서평을 처음 본 건 아니지만, 마침 간만에 야심차게 띄우려는 책이 이렇게 되는 걸 보니 기분이 씁쓸하더라구요.

신문 서평이야말로 책 팔기에 참 좋은 수단인데, 그렇다면 그쪽이랑 우리는 유사 업계라고 해도 되는데, 말하자면 우리가 남이가. 그런데 죄송하지만 할 말 좀 하겠습니다. 우리 서평 좀 치사하게 쓰지 말아요. 

C일보가 이 책에서 인용한 구문입니다.  "다른 시대에 다른 신념에 따라 행한 일들을 사과한다고 과연 현재 사회에 도움이 될까? (45쪽)"

 J일보는 위의 문구에 더해서 이것도 실었습니다. "과거를 너무 많이 돌아보고 사과를 통해 어설프게 역사를 고치다 보면, 현재의 어려운 문제들에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할 위험이 있다. (51쪽)"  

한 줄씩 덜렁 들어내 놓으니 그럴듯해 보입니다. 역사는 이데올로기의 죽창으로 사용되니 '현실'을 사는 자들이여 주의하라, 역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에 부디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죠. J일보 서평의 제목이 말해줍니다. "역사가 판단한다? 오만을 정의로 위장한 사람들". 이쯤되면 공격 타겟이 너무 분명해서 눈 가리고 아웅. 신문 측에서는 무슨무슨 사전과 *파 세력에 대해 일타쌍피를 노린 모양입니다만... 

문제는, 위 인용문들은 서평들이 지시하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원래는 단순히 제스처로만 사과하고 그걸로 실제 사회 시스템의 문제는 슬쩍 덮어버리는 정치적 수사를 꼬집은 것이죠. 실제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비극을 해결하느라 악전고투하는 사회에서는 책임 인정과 참회 행위가 도움이 될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차별 정책이 철폐될 때...(43쪽)"  

45쪽 인용 문장(다른 시대에~)은 특정한 예시를 불순한 목적(오오 내가 이런 말을 쓰다니!)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책에 인용된 사례 중 하나는 영국군이 제1차 세계대전 중 '지시하지 않은 퇴각'을 한 병사들을 총살한 것에 대해 영국 정부가 추후 사면 복권한 것입니다. 저자는 이에 의문을 표합니다. 전시 상황의 강압적 행동은 정황의 특수성이 있는데, 이를 평화 시대의 '상식적' 윤리에 입각해서 사과할 수 있을까라고요. 게다가 피해자가 민간인도 아닌 같은 군인이라 문제는 더 복잡합니다. 저 딜레마를 해결 혹은 납득을 시킨 다음에야 사과든 뭐든 하자는 게 책 속 저자의 일관된 논지입니다.  

(저 정황논리를 우리의 식민 과거에도 대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 글의 주제와는 다르니 일단 패스)

저 고민 과정에 우리나라의 과거 청산 문제를 대입시키면... 냉소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될지 안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납득 가능한 과거 청산 가이드라인을 만들 필요가 있다 (혹은 그렇게 했으나 실패했다)" 라고요. 이미 시도했다가 실패라도 했으면 모르겠지만(반민특위는 실패가 아니라 해산된거구요), 그렇지도 않잖아요. 근데 피식 비웃고 지나가시면 어떡하나요. 이 책까지 덩달아 그래보이잖아요.

이 책은 사과고 뭐고 역사를 써먹으려면 제대로 빡세게 하고, 만약 대충 다른 (정치적) 목적을 둘러대는 데 쓰이는 걸 보거든 비판하라고 말합니다. 세간의 역사적 주장에 귀를 막으라는 게 아니라 더 많이 익히고 배워서 헛소리에 넘어가지 말라는 얘기요. "지금 와서 지난 역사를 들먹이는 자들은 위선자다"라고 비웃는 것과 이 책은 상관이 없어요. 오히려 이 책은 그 비웃음을 비웃습니다. 그 모든 '패스합시다'의 기저에 대중들의 무지가 자리잡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무지는 누가 써먹는다?

그릇된 서평은 책에 대한 폭력입니다. 그것도 갓 나와서 막 팔려야 될 애를 갖다가 아주... 이건 아동학대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신문 서평에서는 결론을 이렇게 냈어야 합니다-> 하려면 제대로 하고 아니면 말자. 좌파든 우파든 좋으니까 때마침 친일사전 발간 기념도 할 겸 크게 한 판 붙자. 변죽만 울리지 말고 일제 청산이라는 주제를 어디까지 수용하고 '현실적인 시스템 수정'에 이를 수 있는지도 고민해보자.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우리도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한 번 해 보자. 솔직히 친일인명사전 제작 과정에 우파가 전향적으로 참가해서 치고 받았어야 되는데 뒤늦게 불평만 해서 미안하다. 대신에 한번 거국적으로 2라운드를 제안한다. 덤벼라.

왜 악전고투에 대한 내용은 빼먹고 냉소주의적 면모만 보여주냔 말입니다. 제가 괴상한 책을 추천한 것 같잖아요. 솔직히 이렇게 쉽게 읽히면서 정치적 밸런스도 괜찮고 나름 대중들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역사 교양서 요즘 보기 힘들잖아요. 왜 은근슬쩍 이 책을 싸구려 포스트모던 매뉴얼로 만드시나요? 이건 히스토리 매뉴얼이란 말입니다. 저는 책을 많이 팔고 싶고, 가능하면 괜찮아뵈는 책을 더 많이 팔고 싶은 장사치거든요. 좀 부탁드립니다. 정치사회사설에 하고픈 말 다 쓰시면서 북섹션에서까지 안그러셔도 되잖아요.

***홍보말씀*** 
<역사 사용설명서>는 비교적 짧고, 쉽게 읽을 수 있으며, 대신에 (불가피하게) 각 소재를 깊이 다루거나 분석하지는 않습니다.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었을 때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분께 우선 추천해 드립니다. 청소년 자녀 선물용으로도 추천해 드립니다. 대신에 기존에 역사에 관심 많고 책 많이 읽으신 분들이 읽고 나서 별점 짜게 주시면 섭섭할 거예요. 용도를 잘 생각해 주시라능..  

사족.

 -(자칭은 모두 정론지이므로) 타칭 편의상 진보로 분류되는 신문들에서는 이 책이 잘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보도자료를 보고 위 신문들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 책이 기존의 정통파 역사 해석을 비교적 옹호하는 편이라 그런 면에서는 보수적인 느낌이긴 합니다만, 그건 정치 포지션이랑은 상관없고, 어차피 교양서가 그렇잖아요... 책을 띄워야 할 신문들이 뒤바뀐 느낌이 드니 이것도 좀 블랙코메디랄까.

-이젠 국내 보수지에서조차 웃음거리가 되는 조지 W.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보고 있자니 토사구팽이라는 느낌이 들지 말입니다. 그 양반도 사냥개였으면 그럼 조선땅의 사냥꾼은 누구... 

-미국에서도 클린턴 시절에 역사 교과서 개정 때문에 난리가 났었고, 엉망진창 수준의 폭언(주로 빨갱이와 반미 소재로)이 퍼부어졌다는 본문 내용도 신문에서 실어줬음 좋았을텐데 말이죠. 대신 미국은 그러면서도 개정이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하달까.   

-저는 친북좌익세력이 아닙니다.

-저 우측의 책은? 그렇습니다. 공교롭게도 <역사 사용설명서>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 악마의 비급이 수록된 흑마술서, <프로파간다>죠. 권력이 인간의 인식체계를 어떻게 장악할 수 있는가를 가전제품 설명서마냥 너무 실용적으로 써놔서 오싹할 지경입니다. 철저히 합목적적인 의도로 운영되는 인간 감화 방법론은 조지 오웰스러운 써스펜스까지 선사하죠. 책 뒤에 보면 저자인 버네이스가 괴벨스의 서재에 자신의 책이 있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김완선이 오빠 저 오늘밤은 어둠이 무서워요 하는 격이랄까. 그도 본인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몰랐던 모양입니다...근데 갑자기 왜 지금 떠드냐구요? 다 아시면서 아니 뭐 그냥... 표지 멋지잖아요.

 

 

특집-괜찮아 너희들은 좋은 책들이니까 지금 여기가 아니라도, 어디에서든 살아남을 것이란다, 대신 너희의 이름을 한번씩 외쳐 부르마 

저는 정 있는 남자라서 누구처럼 차마 표지만 올리지는 못하고..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세계사의 큰 역학구도를 보기 위한 입문서로 좋습니다. 외지 않고 이해시키는 스타일.

<삼국지 기행>. 적벽에서 패퇴한 조조가 황급히 도망치던 길을 가 보니 참 아름다워 오히려 슬프구나. 인생사 공수래..

<사제와 광대>. 본격 중세 타나토스/에로스론이지만 왠지 어렵지 않아! 중세 민중 문화를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미모의 역사>. '루저'는 유사 이래부터 있었더래요. 새삼스러울 필요 없습니다. 포기하면 편해요.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국내 최초의 본격 호메이니 평전. 찬찬히 잘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폼나는 거 인정.

<우리 문화재 나무 이야기>. 강산 곳곳에 사연 없는 나무 없더라. 글 소박하고 사진도 좋아요. 이 아름다운 책 한 번 읽어 보시길. 

<히틀러의 장군들>. 굽본좌 책 본 직후라 그런지 제목이 좀 야릇하지만.. 상당히 착실하게 쓰여졌습니다. 내용 자체가 드라마틱한 건 이미 진리. *굽본좌 책이란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 2차 세계대전 만화> 2권을 말합니다.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중->미로 바꾸면 하여튼 돌아가는 꼴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서 재밌죠.

 

 

 자 저는 이제 밀린 원래 업무들을 하러 이만. 뭘 하든 좀 더 행복해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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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사 사용 설명서
    from 자라나는 사람들의 마음세움터 2010-02-12 21:03 
    내 머리속 좀처럼 꿰어지지 않는 단편적인 역사 조각들은 마치 모래위의 집같이 타인의 역사적 선동 혹은 확신에 의해 쉽게 흩어지고 만다. 역사에 대해 상반된 두 주장 모두에 고개를 끄덕이며 쉽게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한다. 음치는 대중 앞에서 노래 부를 모든 자리를 본능적으로 피한다. 역사치에 가까운 나는 역사 관련 주에에 왠만해서는 입을 다물고 슬금슬금 적당한 거리를 띄우게 된다. 게중 다행으로 역사 인식의 중요성은 모르지 않아 역사치를 탈출할 기회는..
 
 
치니 2009-11-2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런 글은 추천을 한 10개쯤 한꺼번에 눌러야 하는데 말이죠.

외국소설/예술MD 2009-11-20 15:47   좋아요 0 | URL
그거 아시나요. 치니님께서 저의 서재를 살려놓고 계시다는 걸.. (감동)

마그 2009-11-20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포시 추천 누르고 갑니다. 재미있게 쓰시는데요 말씀을. 어투에 익숙해지는데 약간의 시간은 필요했지만. ^^
역사사용설명서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11-20 18:53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좀 재밌게 써보고 싶어서요. 지난한 키보드워리어의 생을 보냈더니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네요. 하하;

책 읽고 나면 꼭 리뷰 써 주세요. ^^

Francesca* 2009-11-21 0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을 읽다보니 '알라딘예술역사MD'님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뭐.. 조곤조곤.. 할말 시원하게 다 하시는. ^^
아동학대 비유가 매우 맘에 들지 말입니다.
이런 글은 추천 10개에 동의 ^^

외국소설/예술MD 2009-11-23 15:03   좋아요 0 | URL
그저 저는 아직도 소심하답니다..부끄

고랑이 2009-11-27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추천 예전에 누르고, 댓글은 지금 씁니다. 쓰고 싶어서 쓰는 거ㅎㅎ 책소개글 쓰면서 무심히 넘겼던 책들을 여기서 만나면 참 새삼스럽네요. 함부로 넘길 놈들이 아닌데 자꾸 무심하게 되네요ㅠㅠ 그래도 역사사용설명서는 책소개하면서도 쫌 읽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좋은 글 감사해요ㅋㅋ

외국소설/예술MD 2009-11-29 00:28   좋아요 0 | URL
그저 좋은 책들은 도처에 있고.. 마치 연애같은 게 아닐까요. 좋아뵈는 사람은 많고, 우선은 만나보는 수밖에 없고, 성패는 하늘만이 아시리라. 실패 역시 밑거름이 되고 말이지요. ㅎ

비로그인 2009-11-30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기한 글이네요. 반쯤 읽었을 때는 분명히 '역사사용설명서를 읽어보자스랴!'하며 마음을 굳혔던 것 같은데, 스크롤을 마저 내리고 나니 장바구니에 들어있는 건 프로파간다... 저 언니 등짝 참 멋져요!

외국소설/예술MD 2009-11-30 16:14   좋아요 0 | URL
표지가 엄청 카리스마.. 그렇다면 이미 표지에서 저 책의 프로파간다 전술에 넘어가신 겁니다?!

제가 배운 점 - 역시 책소개는 짧고 굵게?

happylady 2009-12-05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려고 구매한 책들이 "특집-괜찮아 너희들은 좋은 책들이니까~~" 에 여러권 있어서.. 괜히 뿌듯해지는..ㅎ

외국소설/예술MD 2009-12-07 00:34   좋아요 0 | URL
뿌듯한 건 오히려 저네요. 우리 잘 맞나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