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급판]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 실험 10장면, 특별보급판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현대 심리학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심리 실험 10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어려운 내용이 술술 읽힌다는 것에 있다. 저자 로렌 슬레이터는 쉽고 편하게, 설명하고 있다. 만약 교양 수업시간에 같은 내용을 배웠다면, 이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또한 이 책은 ‘통념에 대한 과학적인 반박’을 맛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책이 내용대로라면 (실험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의식 중에 굳건히 믿고 있는 생각들이 얼마나 약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 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위험에 처한 것을 보았다. 당신이 혼자일 때와 당신이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어느 때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이 높을까? 대부분 후자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반대이다. 이 책의 ‘달리와 라타네의 사회적 신호와 방관자 효과’를 읽어본다면 마지못해서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마냥 유쾌하지는 않다. 책 전반에 걸쳐 보여지는 실험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불쾌함이다. 어떤 진리를 얻기 위해서 매진하는 자세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수위의 차이는 있지만, 저자가 묘사하는 실험은 웬만한 공포영화는 저리가라할 정도 잔인하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동물에게 행해지는 실험장면의 묘사를 읽으면서 속이 메스꺼울 정도였다. ‘마루타’로 유명한 일본의 731부대도 ‘순수한’ 목적은 의학실험이었다. 당신이 피실험자라면, 진리추구를 위해 기꺼이 실험에 동참할 수 있을까? 어느 독자의 의견처럼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할 정도의 업적을 남긴 과학자나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백짓장 한 장의 차이일 뿐이다.’ 아마도 이 책이 던지는 가장 큰 물음일 것이다. 어떤 판단을 내리던 썩 명쾌하지 못한 것이 우리 삶의 복잡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명과 영혼의 경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오근영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11문자 살인사건>과 더불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악의 태작이다. 내가 보는 이 작품의 유일한 장점은 딱 하나. 의학분야를 다루면서도 술술 읽힌다는 것이다. 이도 원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점이니 그것 외에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좋은 작가일수록 기대치도 높은 법. 안타깝지만 전작인 <붉은 손가락>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의 격차를 보여준다.

<용의자 X의 헌신>이후, 감동코드가 잘 먹히는 것을 깨닫고 계속적으로 감동으로 매조지하는데, 점점 묽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추리고 뭐고를 떠나서 초반 100여페이지만 읽는다면 작품의 구도가 거의 손에 잡히는데, 놀랍게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간다. 너무 매끄럽게 흘러가서 <붉은 손가락>의 후반부에 논란이 되었던 작위성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인간의 증명>이나 <추운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처럼 감정의 극대화를 위해 작품의 구조를 일부 훼손하면서까지 결말부분이 작위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절실히 깨달았다. 절정부분의 긴박감과 결말부분의 메세지도 진부한 구조로 인해서 공허함이 남을 뿐이다.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언지도, 그것이 얼마나 숭고한 건지도 알겠는데, 이렇게 맹숭해서야..<좋은 생각>이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도 훨씬 좋은 실제사례가 많지 않은가?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위적인 만큼 최근의 작가군 중에서는 트릭을 상당히 정교하게 구사하는 축인데,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도 낙제점에 가깝다. 더 이야기하면 피곤하니 그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모를까, 솔직히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쉬이 읽힌 것+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서 겨우겨우 별 세게 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직접 말하는 돈과 인생이야기
박현주 지음 / 김영사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 <금융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진실>과 더불어 도서관에서 가장 빌리기 어려운 책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워낙 유명한 분의 이야기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박현주씨의 목소리를 통해서 자기 계발의 단서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 최소한의 지식밖에 없는지라 궁금하기도 했고, 취업에 도움이 될까하는 마음에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러웠다. 김영사의 뛰어난 마케팅 능력과 박현주, 혹은 미래에셋의 상품성이 결합된 트랜디 상품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억지로 장점을 말하자면, 미래에셋이 아닌 인간 박현주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과 정말 빠르고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이 책을 사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미래에셋이라는 거대한 금융회사를 일궈낸 박현주라는 인간에 대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들일 것이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나 이 점에서 이 책은 대단히 취약하다. 박현주씨가 소개하고 있는 개인적인 모습은 기존에 다뤄진 것들이 대부분이며,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일화는 거의 없다. 얼추 들은 이야기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빠르고 쉽게 읽히는 것도 워낙 원론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원칙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인데, 문제는 원칙을 뒷받침하는 실제 사례들이 너무 듬성듬성하다는 것이다. 그 원칙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발상을 전환하면 이 책은 원론적인 원칙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단순하고 당연한 원칙들을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야기의 밀도가 낮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전기초자의 서두칠 사장님의 <우리는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나 최근 가장 주목받는 이채원씨의 <이채원의 가치투자>에 버금갔으면 했는데, 내 기대를 완전히 벗어났다. 기대를 설정해놓고 그것에 따라주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은 지나치다는 느낌이다. 250페이지도 안 되는 얇은 두께에 담기에는 큰 분이셨을까?

차라리 미래에셋이나 박현주 씨를 이해하고 싶다면 신동아 9월호를 구해서 보기를 권하고 싶다. 출장시에 신동아나 월간조선 등을 사서 보시는 아버지 덕분에 나도 우연히 읽었는데, <미래에셋 10년, 빛과 그림자>라는 특집이 있다. 오히려 이 특집에서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박현주 씨와 김영사에게는 죄송하지만 같은 가격이라면 이 책이 훨씬 알차다.(미래에셋 외에도 다른 기사도 있지 않은가?)

오해를 살까봐 첨언하자면 박현주씨가 미래에셋을 통해 거둔 성과를 폄하하거나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원칙을 정하고 밤낮없이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본받을만한 분이다.(시장에 대한 견해는 논외로 치더라도.) 다만 너무 심심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오히려 내가 감탄한 것은 적절한 시기에 쉽게 읽히는 책을 낸 김영사의 기획 센스였다. 하기사 김영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지만, 영업력과 재정능력(계약금을 크게 지를 수 있는...)의 차이겠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11-22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상복의랑데뷰 2007-11-2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글 / 따끔하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천둥벌거숭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판단했군요. 앞으로도 제가 잘 모르고 함부로 말하면, 주저하지 마시고 말씀해주세요 ^^
 
백일몽
고을주 지음 / 연인(연인M&B)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읽은 한국미스테리입니다. 장편으로만 한정한다면 꽤 오랜만이네요. 무엇보다도 현직에 계시는 분이 쓰셨다는 광고글을 보고 그닥 좋아하지 않는 팩션이나 '자칭' 프로작가들의 어설픈 작품들 보다는 날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한국미스테리의 발전에 미스테리 시장의 확대의 '최고의 원동력이자 결정판'이라고 믿는 편이기에 현직에 계신 분이 썼다는 작품을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웠습니다. 읽고난 느낌은, 뭐랄까 독특하네요. 나쁜 의미의 '한국'미스테리와는 다른 위치에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전문적인 비평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이라고 함부로 말은 못하겠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독특함이 독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도 궁금하구요. 

제 경험상, 최근에 한국미스테리를 읽는 것은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단 팩션을 제외한다면 매우 거칠게 말해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존작가들의 작품입니다. 구체적으로 지목하자면 몇페이지마다 등장하는 기계적인 섹스신, 전무하다 싶은 트릭을 문체로 커버하려는 듯한 태도를 접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추리소설가 지망생들의 단편들입니다. 추리소설의 본령인 트릭에 충실하긴 하고, 기성작가와는 다른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지만-요즘은 이런 작품도 드물더군요.-문체, 특히 인물묘사나 사건전개에 있어서 아마추어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전형적이거나 세련되지 못한 느낌입니다. 당연히 어느 쪽이던 만족스럽지는 못한데다가 이 두 개의 카테고리를 벗어나는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적어도 이러한 전형성에서는 조금은 벗어나 있습니다. 이유를 추측하자면, 이 분의 두 가지 특징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직 경찰이라는 점-제 기억으로는 남도에서 나온 이형우씨의 <더거리 형사> 이후로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이 작품은 실화에 가깝죠.-과 글쓰기 특히 고전에 관심이 많다는 점입니다. 전자는 서술 방식과 관련이 있고, 후자는 문체와 관련이 있다고 추측해 봅니다. 

가장 특이했던 것은 문체였습니다. 독특한 옛날투의 문체를 구사하시더군요. 약력을 보면 가정교육의 지침서 <훈도목 선생>이라는 저서도 쓰셨더군요. '훈도목'이라는 표현에서부터 고전에 관심이 많고, 이러한 관심이 문체에 투영되었다는 짐작이 듭니다. 특히 작가의 말은 추리소설을 읽는 것인지 무협소설이나 대하소설을 읽는지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저자가 '백일몽(白日夢)'을 구상할 때가 2년 전 봄이었는데 벌써 해가 두 번이나 바뀌어 불볕더위를 쫓아내는 가을의 전령사들이 섬돌 밑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반겨 맞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계절이다.
일상에 찌든 때를 미련 없이 벗어던지고, 바람을 길동무 삼아 피곤에 지친 영육(靈肉)을 이끌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독자들의 심금(心琴)을 울려줄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서 …… .

 
이 부분만 보면 완전 무협소설이죠. 본문에서는 서문보다는 덜하지만 요즘 보기 힘든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했다.'를 모두 '-하였다.'로 풀어서 표기한다거나  '-명하였다.', '치하하였다.' 등의 예전에 주로 쓰던 한자어 위주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신선하기도 하고 약간 닭살이 돋기도 했는데, 최근에 읽은 다른 작품들과는 분명히 다른 독특한 느낌이 있습니다. 게다가 특유의 문체 때문에 노형사가 끈질기게 사건을 추적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전체의 분위기는 달관한듯한 나른한 분위기로 흘러갑니다. 사건의 진행과 문체가 충돌하면서 묘한 효과를 내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그 덕분에 <끝없는 추적>류의 긴박한 느낌이나 주인공의 의지가 잘 느껴지지 않는 단점도 있긴 합니다.   
 
그리고 서술 방식, 이 작품은 특별한 묘사 없이 대부분 서사만으로만 이루어져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배경이니 배경묘사가 장황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이 작품은 유독 배경묘사와 심리묘사에 인색합니다. 300페이지가 안되는 소설이지만, 초반부의 사건 발생장소의 묘사와 범인의 심리묘사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주인공 고 형사의 집념어린 수사과정을 건조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과장섞어서 말하면 어디 갔다. 누구 만났다. 질문했다. 이동했다. 끼니를 때웠다의 반복이라고 해야할까요. 전통적인 하드보일드, 특히 챈들러나 맥도날드 같이 멋진 배경묘사나 심리묘사가 가득한 작품들을 읽다가 이 작품을 읽으면 추운 겨울에 여름옷 입고 나온 국민약골 이윤석이 떠오를 정도로 앙상한 느낌을 주긴 합니다. 물론 특유의 차분한 옛날 문체 때문이기도 하죠. 그러나 읽으면서 든 느낌은 어쩌면 실제 형사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건수사는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더군요. 현직에 오래계신 분의 암묵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디 가면서 책 몇페이지 분량의 생각을 한다거나 주변 환경을 꼼꼼히 살핀다는 것은 경찰소설에서나 가능할 일일지도 모릅니다. 사건 배정받으면 별 사명감없이 수첩들고 다니면서 질문하고 의심이 들면 더 돌아다니면서 질문하고, 그러면서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 우리네 경찰의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주먹을 불끈 쥐고 '널 잡겠어'라고 외치거나, 위악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거나 욕설을 퍼붓는 등의 전형적이고 작위적인 모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비슷한 사람을 찾자면 마쓰모토 세이초의 <모래그릇>에 등장하는 노형사님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호의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몰입감은 의외로 괜찮습니다. 풍성하지는 않지만 잠깐잠깐 등장하는 경찰관의 일상이나 생활들도 양념거리구요. 빈약하긴 하지만 뒤집어서 보면 엉뚱한대로 새지도 않습니다.

트릭 이야기도 해야할 것 같은데, 경찰소설 치고는 의외로 밀실트릭입니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스타일의 구식트릭이고, CSI를 한참 본 저로써는 '과연 이 트릭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아무리 봐도 허술한 구석이 있기는 한데 현직에 계신 분이 2년 동안 고민했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런 구식트릭이 작품의 전체적인 옛스러운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서 크게 문제삼지 않았구요. 쓰면서 생각해 보니 이 작품의 구성도 옛스럽습니다. 산장의 밀실에서 시체가 발견되고, 용의자는 극소수이며, 그나마 범인으로 짐작가능한 사람은 초반부에 등장하는데, 트릭을 짜맞추는 과정이 나머지 전부라는 점에서요. 그리고 경찰소설 답지 않은 결말도 괜찮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위에서 언급한 이유들 때문에 이 작품은 독특하다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선뜻 대단하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작품은 긴장감이 없습니다. 범인을 초반부에 너무 빨리 노출시켰습니다. 가뜩이나 이 작품은 긴장감이 약한데 초반부에 범인이 노골적으로 등장함으로써 긴장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물론 용의자가 극소수라 범인이 초반부에 등장할 수 밖에 없긴 합니다. 게다가 어차피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이 소설의 주된 목적은 아니었고, 나름 트릭을 짜맞추는 과정에 작품의 2/3을 할애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맛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실책은 범인의 어설픈 심리묘사를 삽입했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초반부는 이해하겠는데, 결말부의 심리묘사는 최악입니다. 덕분에 결말부의 의외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두번의 심리묘사로 인해서 가뜩이나 평탄했던 작품이 완전히 평탄로가 되어버렸습니다.  

차라리 1인칭 시점, 최소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하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어차피 이 작품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 가까울 정도로 주인공 고 형사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범인의 심리나 수사를 막기 위한 노력 등을 전혀 모르는 채로 이 작품을 끌어갔다면 훨씬 긴장감이 있고, 최소한 결말부분의 의외성은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책을 만든 것이나 보도자료로 내놓은 것을 보면-트릭에 중요한 단서가 언급된 부분을 '책속에서'에 버젓히 인용해놔서 깜짝 놀라서 알라딘에 그 부분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입니다. 참고로 지금은 삭제되어 있습니다.-해당 출판사가 그리 관심이 많아 보이지는 않던데, 추리소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분이 편집자였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시점에 대한 아쉬움이 드는 이유는 저자가 주인공과의 거리두기에 어느정도 실패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다면 차라리 이해가 될법한 서술도 3인칭 시점이 되니까 상당히 어색하고 아마추어 같습니다. 주인공보다 어린 여성이라지만, 수사때문에 만난 여성에게 성도 부르지 않고 이름만 호칭한다거나, 나이어린 여성이 주인공에게 '수고를 치하하였다.'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입니다. 1인칭이었다면 '이 아저씨 특이하네.'하고 웃어넘길 부분들이 3인칭이 되면서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거리두기의 실패가 서술 전반에 걸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못내 아쉽더군요. 어차피 주인공(과 범인)외에는 심리묘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1인칭 시점에서 서술하는 것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주인공을 제외하면 작품 전반적으로 구성이나 심리묘사 등이 어설픈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경찰이시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통찰은 부족한 느낌도 듭니다. 제가 호의적이라서 그렇지, 냉정하게 보시는 분들이라면 늙은 고참형사의 애환도 별거 없는데다가, 3류 사회파 수준의 심리묘사와 행동-역시 이것도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만-에 놀라실 수도 있습니다. 저도 심히 안타깝더군요. 엉뚱하게도 기존의 작품을 읽을 때 못 느꼈던 부분들이 툭툭 튀어나오더군요. 

간만에 두서없이 길게 썼는데, 위에서 언급한 여러 이유들 때문에 '독특한 수작내지는 범작'이상의 평가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300페이지도 안되는 얇은 두께에 만원이라는 가격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쏟아지는 일본미스테리를 생각하면 감히 일독을 권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읽어보시면 의외의 재미를 맛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미스테리의 전형성에 질리셨다면-솔직히 전형성을 경험하신 추리독자도 이젠 없다고 봐야죠.-그리고 작가가 아닌 현직경찰이 썼다는 느낌을 맛보고 싶으시다면 감히 추천합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을주 2007-11-23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소름끼치도록 통렬하게 비판을 하셨군요. 저도 간과한 부분을 예리한 통찰력으로 찾아서 비전을 제시해 주니 고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자는 전문적으로 글 쓰기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저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일과후 습작을 하는 정도이며 또한 작품을 사장시키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발간을 하였습니다. 책 가격은 출판사에서 책정을 한 것인데 저자도 8천원 정도로 하였으면 적정하지 않나 생각은 하였지만 뭐라고 말을 못하였습니다.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07.11.23

상복의랑데뷰 2007-11-26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길기만 한 리뷰에 댓글까지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제가 잘 모르고 쓴 글에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을까 걱정도 되네요 ^^; 뭐, 저같은 평범한 독자와 대화를 나누시는게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영광이죠. ^^

이동규 2013-05-06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잘 읽었습니다.내용중에 <더거리형사>에 대한 언급 감사드립니다. 저의 돌아가신 할아버지시거든요. 그 책을 읽어보셨다는데 감사를 드립니다.
 
독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흑소에 이어서 읽었다. 괴소소설만 읽으면 끝.

각설하고 만족도는 <11문자 살인사건>과 함께 제일 낮은 편이다. 면접 준비 때문에 힘들어서인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이 단편집의 주제가 사회비판적인 성격을 띠다 보니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흔쾌히 웃기에는 약간 씁쓸한 면이 있어서 같기도 하다. 물론 흑소에 비해 단편들이 재미없기도 하고...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으면 그럭저럭 본전은 하는 책이다. 

너그럽게 봐주자면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읽히는 맛과 다양한 관심사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뇌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는 단편도 있고, 트랜드를 적절히 반영한 단편과, 트릭을 잘 만들어내는 재주도 엿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속죄>가 마음에 들었다. 아직까지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늘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피켜스케이팅 동호회에서 활동하시는-직접 스케이팅도 하신다!-중년분의 눈물어린(?)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게이고 특유의 작위적인 공감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다만 작품집의 성격에 맞게 재분류를 하자면 <임계가족>은 이 단편집에, <여류작가>는 <흑소소설>에 실려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출판계 이야기는 <흑소소설>에 많은 관계로...

추신) 책 소개는 너무 많은 스포일러 노출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