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서 너무 반가울 때, 주변에서 이상하게 쳐다보건 말건 팔을 붕붕 흔들어 여기, 여기! 하고 소리질러 불러본 적이 있습니다. 경험이 있거나 없거나, 대부분은 이 이야기를 하면 웃어요. 아 그거- 알지. 그렇게 동조해 줍니다.

 

며칠 걸러 한 번 정도 근처 도서관의 신간 서가 앞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책등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요조씨의 이 책을 발견했거든요. 책을 쓴 작가들의 이름 뒤에, 아무 저의없이 무의식적으로 어떤 호칭 또는 존칭이 갖다 붙곤 하는데 (제 경우) 요조씨라는 호칭이 그냥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네요. 팟캐스트에서 너무 자주 듣다보니 혼자 친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모를 일이지만요. 나이도 나보다 어리니까 안 되진 않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ㅎㅎ

 

 

엄밀히 말해서 출간일을 보면 신간 코너에 있는 게 의아할 지경이었지만 이 도서관에서는 신참일 수도 있긴 하죠.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것 같고요. 이미 팔에는 과연 대출기간 안에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걱정되는 분량의 책이 안겨 있었지만 한 권 더하나 빼나 무슨 차이겠나 싶어 이 한 권을 더 얹어 나왔습니다. 조금씩 나눠 읽기 좋아 보였으니까요. 일종의 쉼표처럼.

그렇게 읽기 시작했는데, 세 번째 글에 이런 문장들이 등장하는 거죠.

나는 아픈 것은 내 팔이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팔은 팔대로 스스로 나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내 루틴을 평소처럼 이어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점점 내 팔의 문제가 내 문제가 되었다. 금방 지치고 피로해지고 예민해졌다.

(...)

이런 멍청한 생각을 계속하다가 결국 항복했다. 그리고 절절하게 깨달았다. 아프지 말아야 한다. 거창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아주 사소한 아픔이라도 있는 힘껏 피해야 한다.  -52~53쪽

!!! 요조 씨는 팔깁스를 한 적이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죠. 일상생활의 기본 1부터 100까지 하나같이 불편하지 않은 게 없었을 겁니다. 같은 경험을 했던 것, 그 경험이 몸에 남겼던 몇몇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생면부지(...라는 표현이 맞는건지 이 경우엔 좀 아리송하긴 하지만)의 타인을 순식간에 내 옆의 다정한 친구들과 같은 존재로 끌어당기는 순간은 바로 이럴 때입니다. 그거 저도 알아요. 환장하죠.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지금은, 괜찮으시죠?

 

공감이라는 건 마음만 먹으면 너무 쉽게 만들 수 있는 무형의 교집합 같은 거잖아요.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라포를 형성한다는 웬지 친해지기 어려운 개념도 나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면 여하간 간단히 인간 대 인간 사이의 친밀감을 만들어나가는 관계맺기의 기본을 이야기할 때 누구나 공감은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저 사람과 내가 통할만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게 되니까요.

흐릿한 '누군가'에게서 한 사람의 선명한 인간적인 모습을 읽는다는 건 다시 말해 언제 어느 순간에도 튀어나올 수 있는 공격성(또는 방어성)을 한 단계 낮추게도 해 주는만큼, 공감지수가 높아질수록 상호이해도가 높아지는 것도 당연하고요. 이해도가 높아지면 인내심의 폭도 커집니다. 사람들의 인내력이 전체적으로 상승하면... 뭐가 좋을까요?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스포츠 경기를 볼 때 눈물이 가장 많이 난다. 
... 
선수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그들의 표정에서 그 동안 겪은 시간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환호를 보며 울고 있으면 그들의 시간을 함께 이해한 듯한 느낌이 든다.
눈물이란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대가로 내가 세상에 지불하는 동전인 셈이다. -67쪽

 

김중혁 작가님쯤 되면 공감의 아이콘일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에 대해 너그럽고 타인을 이해하는 스케일이 크다면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요. 남의 일이 곧 내 일처럼 느껴질텐데.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의 이분의 일쯤은 이런 이유가 있고요.

 

 

 

 

 

 

 

 

 

 

 

 

 

 

 

 작가에게도 글쓰기가 주는 기쁨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 공감이라고 한다.

누군가 "당신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또는 "이 책은 바로 나예요"라고 말해 줄 때라는 아니 에르노의 말처럼 말이다. -59쪽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런 까닭이겠죠.

 

 

 

 

 

 

 

 

 

 

 

 

 

 

 

"<와이키키>를 보고 나서 지하철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들, 청소하는 미화원들, 먹이를 찾아서 길거리를 헤매는 비둘기 같은 존재들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됐다"고요. 제가 영화를 통해서 관객에게 받고 싶은 피드백은 아마 이런 종류일 것 같아요. 관객들이 제 영화를 보고서, 나와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연민을 갖거나 이해의 폭을 넓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그게 쉬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애초에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은 그런 거예요. -110쪽

 

 

 

 

 

 

 

 

 

 

 

 

 

 

 

보여주기 민망하다고, 이런 게 무슨 글이냐고, 제대로 풀어낼 자신이 없다고 굳이 내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에게는 그 쉼표의 위치와 마침표의 개수까지 모두가 소중한 기록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아닌 타인의 세계를 상상하는 가장 큰 단서가 된다. 나를 고백함으로써 나의 세계를 드러내고 타인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다. 이해, 공감, 소통, 이러한 모호하지만 사회를 지탱하는 감각들은, 서로의 몸에 새겨진 언어를 공유하는 데서 비로소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나를 쓰고, 타인을 읽어야 할 의무가 있다. -10쪽

 

나와 관계가 없다면 없을 타인들의 일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마음.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까지는 무리더라도 그 마음의 결을 최소한 따라 짚을 수는 있는 마음. 특별한 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무리' 대신 '개인'을 읽으면 좀 더 쉬워져요. 그 일을 해낸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그 이름은 오스카 쉰들러라고 하죠. 물론 그가 어떤 인류애적 비전을 갖고 그렇게 한 건 아니라는 게 아이러니이긴 합니다만.

 

 

 

 

 

 

 

 

 

 

 

 

 

 

쉰들러는 히틀러나 괴벨스처럼 악랄한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유대인에게 무관심했고, 그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손쉽게 수탈해도 되는 익명의 대중으로 보았다. 1940년까지, 그가 전쟁이 끝날 무렵이면 목숨을 걸고 거액의 뇌물을 바치면서까지 자기 공장의 유대인 노동자들을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 되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이 같은 급격한 전환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사이의 어느 시점에 아주 재미있는 일이 쉰들러에게 일어났다. 유대인을 인간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의 회계사인 유대인 이츠하크 스턴에게서 비롯했다. -101쪽

내 바깥의 세계를 집단화해서 바라보는 시각은 의외로 선량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도 흔히 발견돼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말하기는 어려워요. 결국 사회 시스템 안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는 절대 지양해야 할 경향성인데도.

 

아이들과 이야기할 때 이것이 참 힘듭니다. 특히 아이에게 영향력이 큰 주변 어른들 중 어떤 사람이 '더할 나위없이 선량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특정 대상을 쉽게 집단화하는 발언을 하는 성향이 있을수록 어렵습니다. 말한 사람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이것을 교육적으로 바로잡는 데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런 고민을 하는 요즈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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