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초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허둥대며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수술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귀로만 전해듣고, 중환실에서 의식을 차려서 입원실로 다시 옮겼다는 소식을 받으며 안도하다가 아는 분이 십대 자녀들을 남기고 급사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또 황망해했습니다. 그 와중에 제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너덜너덜해지더군요. 제사는 늘 말이 많은 이슈지만 다 젖혀놓고 순수하게 노동량으로만 따졌을 때, 가톨릭 집안이라(저는 아닙니다만) 매우 간소한 편이라 과히 힘들지 않은 수준임에도 이번만큼은 힘들었어요.

진짜, 파충류의 뇌만 살아있는 상태였달까요. 뇌의 모든 접수처와 사무실에 불이 꺼지고 '생존권 보장!'을 내걸고 얘네들이 단체 농성에 들어간 와중에 기계적으로라도 일은 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상황이란 게 진짜 힘들었어요. 커피 한 잔 놓고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는 이 시간이 마치 기적같을 정도로. 시간이 흐르면 오게 마련인 기적도 기적이라면야...

 

열흘 전쯤 『다가오는 말들』을 다 읽었어요.

저는 은유 작가님을 참 좋아합니다. 작가로서 그 분이 쓰시는 글들도 좋아하지만 인간적인 면모에 훨씬 호감을 느껴요. 관계의 거리를 세심하게 살피는 눈이 늘 살아 있어요. 자신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흔치 않은) 노력이 있는 글이어서 무릎꿇은 마음으로 읽게 됩니다. 더 중요한 건 남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다가서기 위한 발판으로 딛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남을 아래에 두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자신을 유연하게 바꿔 나가는 게 이 작가님의 존경스러운 부분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나이를 먹을수록 껍질을 입기는 쉬워도 벗기는 어려우니까요. 근데 그 어려운 걸 하더라구요. 이 분이.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짝 도톰하게 들뜬 표지의 책을 더듬어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갈피마다 내게 어떤 영감을 주었던 책들의 이름과 작가를 쓴 카드가 촘촘히 꽂혀 있어서 부풀어오른 책. 그 카드를 하나씩 빼내어 제목을 소리내어 읽어보고 유난히 귀에 달라붙는 이름이 적힌 카드를 다시 모서리 맞추어 모아 따로 보관해두는 그런 장면이 순식간에 눈 앞에 떠오릅니다.

 

수레는 늘 엎드려서 네 발로 무지랑 눈을 맞추었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되기"인가. 자신의 고정된 위치를 버리고 다른 존재로 넘어가기. 한 사람의 놀이 능력은 곧 교감 능력이자 변신 능력이고 사랑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37쪽

 

내 몸을 통과한 폭력의 기억에 대한 가치 폄훼를 바로잡아야 했다. 당신의 발언은 내가 폭력의 당사자여도 문제, 아니어도 문제다. 용기 내어 자기 아픔을 터놓고 그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감응한 사람들에 대한 결례이자 업신여김이다. 폭력의 피해를 개인의 박복과 불운으로 취급하는 것, 수치심을 심어주어 침묵을 강요하고 사적인 문제로 돌리는 관습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양산하고 방치하는지가 오늘의 강의 주제라고 정리해주었다. -51쪽

 

복종은 습관이다. 성찰없는 순종이 몸에 배면 자기의 좋음과 싫음의 감각은 퇴화한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를 지키기 어렵다. 시급한 건 '자기 돌봄'이다. 수능 고득점의 초석을 다지는 독서와 논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는 법을 들여다볼 기회와 자기 억압을 털어놓을 계기가 필요하다. 그게 나에게는 책과 글쓰기였는데 내 아이에게는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 -289쪽

 

역시 책은 참 좋습니다. 서툴러도 책에 대해 말하기도 좋아요. 좋은 것을 좋다고밖에 말할 수 밖에 없을 때의 이 답답증이란.

 

속에 생각과 말이 쌓이면 어느 순간 정신적 소화불량에 걸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내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 쓰게 돼요. 잘 써지지 않는 말들을 그러모아 레고하듯 이리 끼우고 저리 끼우면서 정체불명의 형상이긴 해도 뭔가 나름 균형을 잡고 버티고 선 것을 만든 대여섯 살 어린아이처럼 물개박수치며 이만 퇴장하려구요. 그리고... 치과엘 가야 해요. 진짜 가기 싫으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