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위한 칼 비테 교육법 - 이지성이 들려주는 칼 비테의 인문학 자녀교육법
이지성 지음 / 차이정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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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성 작가가 19세기 독일에서 살았던 칼 비테 ( 1748 ~ 1831 , 혹자는 1767 ~ 1845 라고 한다고 함 )와 그의 아들 칼 비테 주니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 칼 비테 주니어 : 어린 나이에 6개 국어, 10대 중반에 박사, 대학 교수 )

1748~1831년이면 조선 영.정조 시대라고 하며, 다산 정약용과도 시간적으로 겹쳐지는 곳이 있는 듯하다. ( 영.정조 시대  1724년 ~ 1800년 /  다산 정약용 1762 ~ 1836 )


책의 곳곳에 소설, 고전 책 목록 등을 언급하고 있으며, 부모 인사이트를 통한 '부모의 자기 성찰 -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아이와의 관계 개선' 방법 등에 대해서도 말한다.  저자 본인의 이야기도 하고 있으며 ( 나눔, 아내 ),  칼 비테와 칼 주니어의 일화, 핀란드의 교육방법, 인문학적 행복과 스토아 학파, 현재 의식과 잠재 의식, 책을 통한 놀이 방법, 토론과 산책, 분별력 교육 등을 말하고 있다. ( 분별력 교육과 형상학 교육이 특히 인상깊었다. )



또한 규칙대로만 하는 로봇을 만드는 프로이센 교육제도, 그 제도를 카피한 미국의 교육제도 ( 중하류층을 위한 공립학교 ) 를 말한다.  해당 교육제도 부분은 이지성의 다른 책에서도 본 적이 있다.  미국의 교육제도는 2분법으로 차별되게 구성되었다고 한다. 상류층 교육은 '깊이있는 인문학 교육, 문화'인 반면, 중하류층 교육은 '프로이센 교육제도'를 그대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인문학적 토론이나 성찰이 없는 엘리트 교육의 위험성'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인성교육, 도덕교육'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 

 


칼 비테는 목사였는데, 그 당시 ( 19세기, 독일)의 목사라는 직업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고 한다. 헤르만 헤세(1877 ~ 1962)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19세기의 목사는 종교인이면서 대학교수 이상의 지식층에 해당하며, 그리스어 + 라틴어 + 히브리어를 할 수 있었다고 하니, 대단할 따름이다. 


아마도 목사인 칼 비테 역시 3~4개 이상의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책의 후반부에 칼 주니어 ( 1800 ~ 1883 )에게 교육한 내용이 나오는데, 맨 처음 읽어준 책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라고 한다. 더군다나 해당 책을 국어인 '독일어'로 읽어준 것이 아니라, 원문인 '라틴어'로 읽어주었다고 하니, 대단할 따름이다. ( 42일된 아기 칼 주니어는 아버지 칼 비테가 해당 책을 읽어주자 바로 잠이 들었다고 한다. 해당 대목을 읽고는 웃음이 설핏 나오기도 했다. )  




칼 비테는 52세가 되어서야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으로서도 상당히 늦은 결혼이다. ( 당시 평균수명을 감안한다면 ) 19세기 독일의 상황으로서는 엄청난 할아버지가 결혼한 셈이다.
( 나이 부분에서 조금 오류가 있는 듯 싶기도 하다. 이 책에 의하면 칼 비테가 1748년생, 칼 비테 주니어가 1800년생이므로  두 부자의 나이 차는 52세가 난다.  그런데 칼 비테가 부인과 결혼하여 첫 아이 출산 - 사망을 경험했고, 둘째 아들이 바로 칼 주니어이므로, 52세 이전에 결혼을 했으리라 추측된다. 52세는 칼 주니어가 태어났을 때의 나이일 것이다.  여하튼, 칼 비테가 최소한 40대 후반~50 즈음에 결혼한 듯 싶다. )  


칼 비테의 아내 사랑 일화도 멋지다.  아버지 칼 비테가 아내에게 꽃을 가져다 주는 모습을 본 칼 주니어가 어머니에게 꽃을 선물했다고 한다. '보고 본대로 배워서 행한' 것이다.




저자 이지성은 책의 서문에 3가지 주의사항을 말하고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 이 3가지를 잘 염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ㅡ 1. 칼 비테가 살았던 시대는 어땠는가
ㅡ 2. 그 시대 배경안에서 칼 비테가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했는가
ㅡ 3.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책에는 칼 비테와 다산 정약용의 공통점, 칼 비테와 교육가인 페스탈로치의 교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 역사책 등을 읽을 때 결말을 앞두고 책을 내려놓고, 직접 이야기를 써보기  등 )
이들의 공통점이자,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지식 교육 이전에 "인성 교육", "도덕 교육"을 우선시 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저자는 본인이 학교에서 "인성 교육, 도덕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나 역시도 그런 것 같다. 학교 교과목으로서의 '도덕'이라는 과목을 배웠을 뿐이지, '인성 교육'이라는 것을 받은 기억은 딱히 없다.
'인성 교육'을 받지 않은 부모가 아이에게 해당 교육을 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부모 스스로가 먼저 '독서, 나 스스로 성찰'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자녀에게 인문학 교육을 하려면,  부모가 먼저 인문학을 접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제대로 된) 유럽의 귀족들과 (제대로 된) 조선 사대부 집안에는  독서 '교육'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냥 독서 자체가 그 집안의 '문화'였다는 것이다. 집안의 문화이므로 저절로 보게 되고 습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국제결혼의 긍정적인 면이 바로 이중언어 '문화'일 것이다.   이중언어 '교육'이 아니라 생활에 삶에 있는 문화이므로 그 자녀는 자연스럽게 2개의 언어를 접하게 되고,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저자가 말하는 독서 '문화', 인문학 '문화'라는 말도 그러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먼저 행하면 ( 말이 아니라 행동 ), 자녀가 보고 배우는 것이다. 이는 공맹사상 ( 공자, 맹자 )에도 나타나며, 우리의 속담에서도 드러난다. (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등 )
부모가 먼저 인문학적 생각을 하고 사고를 하고 행동을 한다면, 아이가 부모를 보고 배우며 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칼 비테는 본인 스스로가 기독교적인 사상과 문화에 속한 인물이다. ( 직업이 목사 ) 그러한 기독교적인 기초안에서 인문학적 문화를 이루었고, 자신의 아들 칼 주니어에게 그런 교육법을 실행한다.

칼 비테가 아들 칼 주니어에게 행한 것을 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ㅡ 하루 2~3시간만 공부.
ㅡ 20분 공부하면, 40분 나가서 놀기
ㅡ 나눔 실천하기 ( 칼 비테가 모범을 보였더니, 칼 주니어도 따라했다. 책의 후반부에 칼 주니어의 일화가 나온다. )
ㅡ 아이는 행복해야 한다. ( 칼 비테의 행복은 어떤 행복인가?  )
ㅡ 독서보다 놀이를 더 중요시
ㅡ 아이의 관찰력과 상상력 키워주기




페스탈로치ㅡ는 이름과 이론만 들었지, 그의 대단함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것 같다. 특히, 형상학에 관한 부분은 무척이나 신기하다.



책을 읽으면서, 곳곳에 기독교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저자 이지성이 독실한 기독교인인가'ㅡ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지만, 물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정신적인 행복에 보다 더 큰 가치를 두고 마음의  평정심을 가지라는 부분,  행복하고 긍정적인 상상을 하라는 부분 ( 망상과는 다르다 ), 부모가 먼저 솔선수범을 보이라는 부분,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관점 ( 인간에 대한 이해 , 예술가의 완벽을 추구하는 '태도' ), 칼 주니어의 3번 독서법, 서양의 여러 고전 문학, 토론과 여행의 가치와 활용법, 분별력 교육과 형상학 교육 등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사진과 함께한 서평은 블로그 참고   : http://xena03.blog.me/22107742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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