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였던 국가의 국민이기 때문에 조금 더 나의 안테나가 민감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상처의 역사를 뒤로할 수 있다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들은 대체 어떤 ‘교육’을 받은 것인가.



+ 미주 33에서 ’다양성이 행복하고 매력적인 개념으로 간주되면서 불평등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불행은 다양성 때문이 아니라 그런 다양성을 체화한 사람들이 ‘접촉하고 소통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 불행한 다문화주의에서 행복한 다문화주의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소통이 요구된다. 행복은 미래에 투사된다. 우리가 소통을 통해 ’그 문제에 균열을 내면‘ 우리는 다양성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다. - P225

영국식 도덕에서 영국의 행복으로, 그리고 영국식 행복으로의 전환은 ‘최대 다수의 행복‘이라는 격률을 통해 도덕적 성격과 국가적 성격의 융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 준다. 니체는 행복을 극대화하라는 명령이 영국식 도덕의 보편화와 관련된다고 본다. 최대 다수의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행복은 영국성을 증진하는 기술을 제공한다. - P226

제국은 인류 행복의 증진이라는 측면에서 정당화된다. 만약 식민지 지배가 ‘백인의 집‘ 이라 한다면, 이때 이 집은 ‘인류의 행복‘을 증진할 의무로 이해되고, 이 의무는 박애의 언어로 서술된다.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행복을 증가시키겠다는 의지가 되는 것이다. 박애란 타인이 겪는 고통이나 삶의 빈곤을 완화하기 위해 제공되는 것이다. 행복을 증가시키겠다는 의지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줘야 한다는 사명이 된다. 이런 박애적 선물은 희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식민지에서 얻는 것보다 치르는 비용이 더 크다고 생각될 경우 보통 행복의 증대가 식민 지배자의 행복에 대한 상대적 비용으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 P228

식민주의는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원주민에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정당화된다. 그들은 관습 혹은 관례적인 것에서 벗어나 ‘좋은 습관’을 익혀야 한다. 행복이라는 일반적인 목적이 개인이 추구해야 할 특수한 목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창조가 식민지 교육과 훈련의 목적이 된다. 이에 따르면, 행복해지려면 개인들이 관습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2장에서 지적했듯이, 행복하려면 ‘방향 전환‘, 돌려세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타자를 개인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그들이 식민 지배자의 규범, 가치와 실천을 향하도록 함으로써 돌려세우는 것이다. - P234

행복할 자유는 가족과 전통으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행복의 약속을 담지한 국가와의 동일시로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 P249

(<베컴처럼 휘어 차기>에서) 아버지의 트라우마 해소에 함축돼 있는 서사는 이주자들이 자신들의 상실을 설명하기 위해 "인종차별주의를 발명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잊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삶을 지배하는 인종차별주의의 힘을 보존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과제는 ‘그것을 잊는 것‘이 된다. 마치 당신이 그것을 잊으면 그것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 P260

정치의 임무는 개종[전환]이다. 인종차별이 이주자의 기억과 의식 안에만 있는 것이라면, 그들이 그것을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기만 해도,그것이 사라졌다고 선언하기만 해도 인종차별주의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역사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것은, 행복 쪽을, 당신의 행복을 염려하고 그들의 행복을 공유하도록 허용하는 다른 사람들 쪽을 바라보는 것이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가족들 간의 친밀하고 고요한 속삭임조차 화해의 판타지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가 인종차별에 대해 잊을 수 있다는 판타지, 우리가 그런 상처의 역사를 뒤로할 수 있다는 판타지 말이다. - P269

세대 차이와 문화적 차이 - 취향의 차이로 표현되는 -는 갈등 상황에서 더 강력하게 동원될 수 있다. 그런 차이들이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갈등의 순간에, 그 순간의 열기 속에서, 그런 차이가 당신이 어찌 해볼 수 있는 뭔가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 P273

행복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당신이 겉도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제 힘으로는 그 자리에 섞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를 ‘어디든‘ 섞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인정은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 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 개인의 추상적 잠재력으로부터의 소외를 수반한다. - P285

정서 이방인이 되는 것은 이방의 정서들을 경험하는 것 - 공적 분위기와 맞지 않는 것, 어떤 사건에 다른 사람들이 반응하는 그런 방식으로 내가 느끼지 않는 것 - 이다. - P287

행복 의무란 좋은 것을 말할 긍정적 의무인 동시에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의무, 불행의 경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부정적 의무이기도 하다. … 당신을 향한 폭력에 상처 받지 않을 의무, 심지어는 그 폭력을 눈치채서도 안 될 의무, 폭력이 당신을 스쳐 지나간 것처럼 그것을 지나가게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인종차별의 역사를 의식 하고 그것에 대해 입을 열 경우, 인종차별을 의식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서 이방인이 된다. 정서 이방인은 이방의 정서를 가지고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 우리가 해야 하는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이다. - P288

우리는 어떤 역사들은 뒤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역사들은 끈질기게 지속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역사의 지속성과 함께하는 우리의 불행을 끈질기게 말해야 한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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