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동북아역사재단, 2012)
얼마 전 이태준 문학이 "조선의 체호프" 같다는 인상을 나만 받은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소설을 고민을 할 때쯤 대학 졸업장이 없는 명예교사였던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태준 전집을 읽으라고 했다. 남과 북에서 소외되었던 월북작가들이 80년대 말 해금되어 막 책들이 나오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이태준의 단편과 중편의 맛을 그때는 느낄 수 없었다. 우리는 소설작법 시간에 우리의 작품을 발표하기보다는 이태준의 고리타분한 문장을 강독하고 단어를 메모하고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다. 그때는 몰랐다. 왜 선생님이 이태준을 읽으라고, 그냥 힐끔 보지 말고 꼼꼼히 단어까지 짚어가며 읽으라고 했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문장강화』를 다시 읽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학 때 읽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의 소설을 펼쳤을 때, 나는 그의 문장을 필사해버릴 만큼 강하게 그에게 끌렸다. 나만의 사전작업을 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달밤」을 보라고, 「누이」를 보라고, 「오서방」을 다시 보라고, 지금 현대 소설이 이렇게 쓰고 있는 작가가 어디 있냐고, 『해방전후』를 보라고, 해방 전후의 그 혼탁한 풍경을 이렇게 긴박하게 알려주는 소설도 있다고, 그런 시대정신을 이어받은 작가가 지금 어디 있냐고 혼자서 끙끙 앓았다.
시간은 순간을 집어삼키는 파도 같은 것이었나. 시간이 지나 나는 그토록 강렬했던 이태준 문학을 잃었고 저 광대한 겨울의 나라, 여러 나라에 걸쳐 같은 강이 흐르는 지루하다 못해 눈이 시린 대륙의 단편을 보며 이번에는 체호프를 아냐고 떠들었다. 광활한 장편의 나라에서 그가 만나본 사람들을 놓칠 수 없어 600여 편의 단편을 써내야 했던 체호프를 모르는 작가들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장편만 소설이라고 여겨지는 풍토에서 그는 자신이 소설가인지 질문하며 외로웠을 것이다. 그가 작가로서의 전성기에 훌쩍 사할린행을 감행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다른 감각을 채우고 돌아왔다는 것을 몰랐다. 이렇게 책은 시대를 뛰어넘어 도착하기도 하는 것이다. 책의 시대는 매체가 변할 뿐 더 오래 갈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확인받는 순간이 이렇다. 너무 늦게 도착해도 책은 100년 전의 풍경을 펼쳐준다.
지금 그는 사할린 섬으로 떠난다. 1890년 4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야로슬라블까지 기차를 타고 볼가 강을 따라 가다 지류인 카마 강을 거슬러올라 우랄 산맥 서쪽의 페름에 도착한다. 다시 기차로 우랄 산맥을 넘어 튜멘까지 갔는데 여기서부터는 철도가 깔리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마차를 타고 옴스크를 거쳐 톰 강을 배로 건너고 6월 초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 여기서 배를 타고 바이칼 호를 건너고 아무르 강을 따라 7월 초 니콜라예프스크 항구에 도착한다. 여기서 다시 타타르 해협을 따라 데카스트리에서 하루 묵은 후 드디어 7월 11일 사할린 중부 알렉산드로프스크에 도착한다. 여기서 3개월간 체류하며 쓰여진 이야기가 이 책이다.
나는 그가 발 딛고 있는 사할린 곳곳을 따라 여행한다. 그 여행에서 나는 이런 것을 느꼈다. 그의 이야기는 체험이었구나.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보편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그들 각자가 다 하나의 삶을 살아가는 그 모습의 총체가 보편인 거로구나. 그러므로 보편적인 것은 그가 보았고 살았던 삶의 자세, 가장 보잘것없는 것도 삶의 이유가 있다는 개미를 사랑하는 인간애 하나만 있으면 되는 거로구나. 굳이 그것을 강조할 필요도 없고 그것에 역행하는 것이 인간애가 아닐 필요도 없는 것, 그것이 보편이로구나. 하나의 세계가 이렇게 넓고 깊으려면 그 각각의 체험이 그에게 심어준 인간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구나. 사랑도 삶처럼 그들 각자의 것으로서 존재할 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체호프를 보며 새겨넣는다.
나는 글이 노동이 되는 세상이 싫다. 글이 탄환이 되는 것도 싫다. 글은 내가 존재할 수 있는 믿음이다. 내가 있었다는 것을 지금은 모르지만, 글은 알려줄 것이길 바란다. 너무 거창한가? 인간은 얼마나 작고 연약한가. 개미보다 더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 인간인데 그런 인간이 100년도 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위대한 점이고 글쓰는 고통을 상쇄하는 보상이기도 하겠지. 그렇지만 체호프도 몰랐을 것이다. 마흔다섯에 폐결핵으로 사라진 그는 이전 작가들의 작품세계보다는 살아남는 것, 자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쏟아내는 그 자체에 급급했을 수도 있다. 세상의 비밀을 알았다고 해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당연히 나도 끝까지 모를 것이다. 세상의 사람만큼 많은 그 70억 개의 사랑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모르니까 쓰겠지. 한 20년만 더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 책을 보며,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