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름은 없는 거죠?"
여자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고개를저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돈이잖아. 돈에도 이름이 있나?"
나도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돈에는 이름이 없다. 만약 돈에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돈이 아니다. 돈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 캄캄한 밤 같은 그 무명성과 , 숨이 삼켜질 만큼 놀랍고 압도적인 호환성에 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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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오카다 씨, 아무쪼록 조심하세요. 스스로의 상태를 안다는 것은 그렇게 손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자기 얼굴을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요. 거울에 비춰서, 그 반영을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거울에 비친 상이 옳다고 경험적으로 믿고 있을 뿐입니다." - P196

"중오는 길게 늘어진 어두운 그림자 같은 것이죠. 그 그림자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대부분의 경우 본인도 모르는 법이에요. 그것은 양날의 칼입니다.
상대를 찌르는 동시에 자신도 찌르죠. 상대를 깊이 찌르는 사람은 자신도 깊이 찌릅니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나 버리려고 한다고 쉽게 버려지는 것도 아니죠. 오타나 씨도 조심하세요. 정말 위험한 거예요. 한번 마음에 뿌리 내린 증오를 떨쳐 내는것은 아주 어려움 일입니다 " - P248

"만약 오카다 씨가 지금 이름을 잃으면 저는 오카다 씨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태엽 감는 새." 하고 나는 말했다.
 적어도 내게는 새로운 이름 하나는 있다.
"태엽 감는 새 씨."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공중에 띄우고 잠시 바라보았다.
 "멋진 이름이네요. 그런데 어떤 새죠?"

"태엽 감는 새는 실제로 있는 새야. 어떻게 생겼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소리밖에 못 들었어.
 태엽 감는 새는 이 근처 나뭇가지에 앉아서 세계의 태엽을 조금씩 감아. 끼익끼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태엽을 감지. 태엽 감는 새가 태엽을 감지 않으면, 세계가 움직이지 않아. 그런데 아무도 그걸 몰라. 세상 사람들은 모두 훨씬 더 복잡하고 멋들어지고 거대한 장치가 세계를 빈틈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사실은 태엽 감는 새가 온갖 장소에 가서, 가는 곳곳마다 조금씩 태엽을 감기 때문에 세계가 움직이는 거야. 태엽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에 달린 것처럼, 간단한 태엽이야. 그 태엽을 감기만 하면 되지. 하지만그 태엽은 태엽 감는 새 눈에만 보여"
(중략)...
"아쉽지만, 난 어디로 가야 태엽이 있는지 몰라. 그 태엽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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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름달과 일식, 마구간에서 죽어 가는 말들에 대하여>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한다는 건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러니까, 누군가를 알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이고 진지하게 노력하면, 그 결과 우리는 상대의 본질에 어느 정도까지 다가가 있을까.  우리는 우리가 잘 안다고 여기는 상대에 대해서,
정말 중요한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 P45

<높은 탑과 깊은 우물, 또는 노몬한을 멀리 떠나서>
p.91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노력만큼 인간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것도 없다.

p93
"법률이란 건, 요컨대 말이야, 지상의 만사를 관장하는 거야. 음은 음이며, 양은 양인 세계 말이야. 나는 나이며 그는 그인 세계지. ‘나는 나, 그는 그, 가을날의 해 질 녘. 그런데 자네는 거기에 속해 있지 않아. 자네가 속해 있는 세계는 그 위거나 아래야."

"그 위거나 아래,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겁니까?" 나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그렇게 질문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건 아니지." 하고 혼다 씨는 말했다.
그리고 잠시 컥컥 기침을 하고는 휴지에 가래를 탁 뱉었다. 그는 자신이 뱉어 낸 가래를 한참 바라보고는, 휴지를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은 나쁘다. 그런 유가 아니야. 흐름을 거역하지 말고, 위로 가야 할 때는 위로 가고, 아래로 가야 할 때는 아래로 가야지. 위로 가야 할때는 가장 높은 탑을 찾아서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되고, 아래로 가야 할 때는 가장 깊은 우물을 찾아 그 바닥으로 내려가면 돼. 흐름이 없을 때는,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고, 흐름을거역하면 모든 게 말라 버려, 모든 게 말라 버리면 이 세상은 암흑이지. ‘나는 그, 그는 나, 봄날의 초저녁‘ 나를 버릴 때, 나는 있어."

..(중략)

"흐름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건 괴로운 일이야. 그러나 기다려야 할 때는 반드시 기다려야 해. 죽었다 생각하고 있으면 돼."
....
"그러니까 저는 한동안 죽은 것처럼 있는 편이 좋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하고 그는 말했다.
"죽어야 삶도 있으니, 노몬한."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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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한정된 시간밖에 부여받지 못했지요. 그런 와중에 전문 분야에 특화되면 될수록 시야는 좁아집니다. 시야가 좁아지면 세상의 상식과 동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나를 버티고 있던 상식이 어쩌면 세간의 비상식일지도 모른다고는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겠지요." - P212

"이번엔 범죄자로 취급할 생각이야?"
"그 예비군이지. 잘 들어. 인간은 성실하게 살아도 눈앞에 장벽이 가로막을 때가 있어.
깨부수거나 뛰어넘거나 해서 그 너머로 가려고 하지. 
하지만 장벽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놈은 다른 길을 찾아. 대부분은 편한 길이지. 하지만 말이야, 그 편한 길이란 힘없는 자의 전용 도로야.
그렇게 편한 쪽, 편한 길을 계속 선택하면 제대로 싸울 힘을 잃게 돼. 그리고 편하기 때문이란 이유로 거짓을 배우게 되고,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는 법을 배우지."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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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수사 결과가 본부로 올라왔고,
이누카이는 보고서를 훑어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일반시민‘이라는 것이 어딘가 추하다고 생각했다. 

익명성 뒤에 숨은 악의를 여기에서도 또렷이 보았기 때문이다. 온라인의 게시물이나 트위터는 간편하고 즉각적이다. 익명으로 가볍게 올린 글에 즉각적으로 반응이 온다. 특정 대상을 욕하고 도망치는 데 이만큼 알맞은 도구는 없다. 무엇을 어떻게 쓰든지 전부 자유고, 책임을 묻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마치 공중화장실의 낙서처럼 열등감을 뒤집어 놓은 악의로 가득하다.  - P122

조건 없이 모여드는 선의만큼 처치 곤란한 것은 없다. 잇속을 바라고 도움을 준 사람에겐 빚을 갚으면 그만이지만, 선의의 제삼자는 타산적이지 않아 기대를 배신당하면 감정적으로 변한다. 호의는 간단히 악의로 반전되고, 어제까지 추대하던 우상을 걷어차 버리며 희열을 느낀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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