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생에 최고의 축복 3장16절
맥스 루케이도 지음 / 두란노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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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성경 일독을 못했다. 그로인한 부끄러움을 떨쳐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성경을 조금씩 읽어 나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내 안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은혜로운 시간을 갖고 있는 요즘이다. 그러나 아직도 꾸준하게 성경을 읽지 못하다 보니 성경 말씀을 외우지 못하는 것은 물론 어디에서 어떤 말씀이 나왔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인 요한복음 <3:16>의 말씀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이 말씀 하나로 책 한권을 쓰셨다. 그러나  그분만큼 은혜로운 시간을 갖었는가 의문을 갖기 이전에 <3:16> 말씀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생각에 쩔쩔매고 있는 나를 발견할 뿐이였다.

 

  요한복음 <3:16>은 어떤 말씀일까 궁금한 마음에 책장을 열었다. 그러나 막상 <3:16> 말씀을 마주하고 보니 당황스러웠다. 많이 들었던 말씀이였고 귀에 익은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눈으로 이 말씀을 좇을 때는 이 안에 얼마나 깊은 뜻이 들어있는지 예측할 수 없었다. 유독 눈길이 가는 구절이 있다면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부분일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이였고, 또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메달리셨으니 독생자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는 <3:16>의 말씀 한구절 한구절을 음미해가며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깊은 뜻을 찾아 가고 있었다.

 

  이 말씀 중에 특히나 저자가 강조해던 부분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아쉬울 것이 없는 분이셨다.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뿐인 독생자를 죄악으로 뒤덮인 인간들을 위해서 보낼 수 있겠는가. 부활을 떠나 인간들을 대신해 죽어야만 한다면 보낼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셨기에 ,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존재 하신다고 하셨다. <산들이 나타나기도 전에, 주께서 산과 땅과 세상을 만드시기도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시 90:2).> 이 말씀만 보더라도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실 분이셨고, 나로 인해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고통을 당하셔야 할 분이 아니였다.

 

  어쩌면 이 말씀은 기독교인들에게 와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아무런 감동 없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저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했다. 세상 속에는 수 많은 사랑이 있지만 하나님을 닮은 사랑일 뿐 하나님의 복제품의 사랑은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무슨 뜻일까.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존재하기 이전 부터 존재했었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든지 간에 "너는 그래도 여전히 내 계획의 한 부분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영원한 사랑을 주신다는 말씀이셨다. 그 사랑을 거부하지 말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거부하고 있을 뿐이니 제발 그 사랑을 거부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아 간다면 하나님 앞에 나의 존재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늘 하찮다 느껴졌던 내가 이런 계획안에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요한복음 <3:16>말씀이 눈으로만 좇는 말씀이 아니라 내 평생의 말씀으로 삼고 나아가야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 가르쳐 주시고 싶어 하신다. 그 사실이 궁금하다면 예수님을 당신의 북극성으로 판단 기준으로 삼으라고 말씀 하신다. 내 자신은 나를 구할 수 없고, 타인 또한 나를 구할 수 없으니 오로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이유,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3:16>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그 동안 만나왔던 신앙서적들처럼 무조건 적인 은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것 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늘 내 곁에 머문다는 것, 또한 지옥과 천국에 대한 이야기도 피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기에 옮긴 것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어떠한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안에 풀어 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왕이면 하나님께서 예비 하신 천국을 소망하며 이 세상을 살아 가고 싶다. 천국에 잔치상에 이름표가 있다면 분명 내 이름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잔치상의 명단에 사랑하는 사람을 넣고 싶지 아니한가. 또한 이 감격스런 하나님의 사랑을 나 혼자만 받아야 겠는가. 요한복음 <3:16>의 말씀에는 이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다. 그 말씀 가운데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한번쯤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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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준 선물 마음이 자라는 나무 5
유모토 카즈미 지음, 이선희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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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근길에 보니 화사하게 피었던 벚꽃이 어젯밤 비에 우수수 떨어져 내린 것을 보았다. 떨어진 꽃잎을 보고 있자니 이제 완연한 봄이 오나보다 하며 마음이 새초롬 해졌다. 떨어진 꽃잎은 아쉽지만 푸른 잎이 돋아나는 벚나무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듯 했다. 여름을 향해 한발짝 더 내딛는 힘찬 발걸음 속에 더 푸르른 잎을 만들어 내고 열매를 맺겠다는 의지가 암묵적으로 느껴지는 광경이였다. 그렇기에 꽃잎이 떨어 졌다고 해서 서운해 하는 마음은 접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여름을 좋아하진 않지만 여름을 향해 가는 푸르른 나무들을 보며 한가지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벚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다가올 여름을 유추해 보았지만, <여름이 준 선물> 이라는 책 얘기를 꺼내기 전에 여름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어서 다소 장황하게 얘기를 꺼내봤다. 내 마음 속에 퍼지는 감동과 따뜻함은 계절에 상관이 없이 간직되겠지만, 뜨거운 열기와 끈적함이 배어나는 여름을 상상하지 않고는 옅어져 버릴 것 같아 조바심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강렬한 태양 만큼이나 내 마음 속에 기습적으로 들어와버린 세 아이와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여름이 배경이 되었을 때 더 깊이 각인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 류, 모리는 같은 반 친구인 하라의 할머니의 장례식을 계기로 죽음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과 두려움에 하나의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다니는 학원 근처의 혼자 사는 할아버지를 감시하는 일이었다. 삶에 의욕이라곤 전혀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는 할아버지를 감시하며 죽는 모습을 지켜 보자는 황당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는 삶에 의욕이 없긴 하지만 돌아가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할아버지의 일과를 지켜보다 보니 할아버지가 걱정이 돼 음식을 갔다 놓기도 하고, 마당에 쌓인 엄청난 쓰레기들을 줍다가 할아버지에게 쫓겨 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일을 계기로 할아버지는 조금씩 집안을 정리해 가기 시작한다. 오히려 아이들이 매일매일 감시하다 보니 할아버지가 그들의 존재를 알아채고 주객이 전도되어 할아버지의 집을 서슴없이 드나들며 자질구레한 집안 일을 돕게 된다. 생기라곤 하나도 없었던 그 집에 세아이들의 북적거림이 활기를 더 해주고 있었다.

 

  세 아이는 처음에 세웠던 계획은 잊은 채 자신들의 아지트인냥 할아버지 집에서 거의 매일매일 살았다. 처음엔 할아버지가 주는 간식을 먹으며 할아버지의 말벗이 되어 주었지만, 그곳에서 공부도 하며 집안을 가꾸어 가기도 한다. 삭막했던 할아버지 집은 그들의 손길로 깔끔해져 갔고, 널찍한 마당에 코스모스 씨까지 뿌려 놓아 화사함까지 기대하게 되었다. 그들이 매일 할아버지 집에 드나드는 것을 또래의 친구들이 보고 놀리기도 하고 비야냥 거리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것이 사명인냥 열심을 다해 할아버지 집을 드나들며 돕기를 서슴치 않았다. 아이들이 이런저런 일을 시켜도 큰 불평 없이 하는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 또한 마음을 열어 그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기도 하고 소중한 추억을 하나씩 만들어 가기도 한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강변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불꽃놀이를 펼쳐준다. 저물어 가는 여름의 끝 자락에 세 아이들과 할아버지에겐 마음 속에 아롯이 새겨질 새로운 추억거리가 만들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축구부 합숙훈련을 떠난다. 합숙 훈련을 마치고 할아버지 댁으로 달려 간 그들은 숨을 거둔 할아버지를 보게 된다. 자신들이 보고 싶었던 죽음과 죽은 사람의 모습도 보았지만 더 소중한 것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한 층 더 성숙 된 자신들을 만나게 되는 큰 경험을 한 셈이였다. 그렇게 여름방학이 끝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저 세상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죽음의 세계를 편안하게 받아 들이게 된다. 오히려 할아버지를 통해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내게 닥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에 떨기 보다는 현재를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세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민을 가고 중학교에 가게 되면서 흩어져 버리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평생토록 간직 될 것이라는 생각에 영원한 헤어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삶과 죽음 앞에 처음부터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였지만, 나와 다른 남과의 만남이 깊이 각인 될 수 있다는 것은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주기도 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읽어 버린 이 이야기는 하룻밤의 꿈 같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보니 내가 책을 읽은 것인지, 꿈을 꾼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내 마음 속에 따뜻함과 감동으로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후텁지근하고 더운 날씨에 짜증만 나던 여름이 이런 연유로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단지 그들의 이야기가 여름이 배경이 되었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뜨거웠던 여름이 가을을 맞이 하게 되면서 선선함을 전해 주듯이 내 마음 속에도 그러한 강렬함과 잔잔함이 공존했기 때문이리라. 세아이들과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인해 내가 힘겨워하는 여름을 잘 견딜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겨났다. 바로 여름이 내게도 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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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시커 1 - 별을 쫓는 아이
팀 보울러 지음, 김은경 옮김 / 놀(다산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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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 속에 흠뻑 빠진다는 것은 저자가 풀어내는 감정의 기복에 휘둘리는게 아닌가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가 슬픔을 만들어 내면 슬프고, 기쁨을 만들어 내면 기뻐하는 것처럼 독자의 위치에서 구경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감정의 바다 속에 빠지는 것. 그것은 책과 내가 하나가 되는 몰입을 만났을 때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런 몰입이 기꺼이 즐거운 것은 과정의 힘겨움이 있더라도 감동을 만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의 어두웠던 분위기 때문에 과정은 조금 힘이 들었지만 감동을 만났기에 오롯이 마음 속에 새겨졌던 스타시커. 루크가 보았던 별은 어떠한 것일까 궁금증을 안은 채 나 또한 주인공을 따라 그 별을 쫓고 있었다.

 

  14살 루크는 위기에 빠져 있었다. 동네의 불량한 친구들에게 리틀 부인의 물건을 훔쳐 오라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보복이 두려워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앎에도 발을 빼지 못하던 루크는 엄마와 주변 친구들에게 신뢰를 잃어가고 세상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2년 전, 사랑하는 아빠를 잃은 후로 루크에게는 모든 것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기대고 싶었지만 엄마가 만난 조각가 로저씨를 인정하기 싫어 루크의 마음은 더 비틀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빠가 돌아가시 전에는 루크에게는 피아노가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잇었다. 피아니스트였던 아빠처럼 피아노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있어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피아노를 잘 쳤었다. 그러나 아빠가 돌아가신 후 피아노에 대한 흥미를 잃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스킨 패거들의 요구는 동네에서 가장 독특한 리틀부인의 집에 들어가서 부인이 소중해하는 상자를 들고 오라는 것이였다. 어쩔 수 없이 리틀부인의 집에 들어간 루크는 소녀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 소녀의 울음소리는 시도 때도 없이 루크에게만 들렸고, 그 소리 뿐만이 아닌 남들이 듣지 못하는 태고의 움직임이 루크에게 들린다. 하지만 소녀가 누구인지, 스킨 패거들의 요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리틀부인의 부탁까지 들은 상황에서 루크는 최대의 혼란을 맞이하고 있었다. 거기다 피아노를 가르쳐 주는 하딩 선생님의 연주회 독주까지 맡았고 엄마의 연애까지 신경쓰였으므로 루크에게는 세상의 짐이 온통 자기에게 쏠려진 기분이다.

 

  그러던 중 리틀 부인의 부탁으로 울음소리의 주인공인 나탈리에게 피아노를 쳐주면서 나탈리와 리틀부인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동안 피해왔던 스킨패거들에게 보복을 당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서 로저씨의 도움을 받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그제서야 마음을 열어가는 루크는 서서히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 놓는다. 아빠의 빈자리를 인정하는 것, 자신의 운명인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엄마와의 화해, 리틀 부인의 마음을 열어 주는 것까지 조금씩 성장해 가는 루크 자신과의 부딪힘을 이겨내는 순간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루크의 마음 속을 어지럽게 떠다니다 보니 소설의 끝 부분에서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한동한 멍했었다. 책에서 나왔던 피아노곡을 들으면서 루크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려 했지만 먹먹함만 밀려 올 뿐이었다. 음악과 영혼이 어우러지는 감동의 도가니 속에서 나의 마음을 잠시 놓아 버렸기 때문이리라. 루크는 자신이 들었던 모든 소리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빠가 물려준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열정이라는 것을 알아갔다. 그리고 그 음악을 통해서 아빠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아빠가 들려 주었던 음악을 통해 수 많은 영혼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다. 또한 음악을 통해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 세계에 갇혀 있던 리틀 부인의 마음을 연 일을 통해 루크는 음악의 힘을 느꼈다. 그리고 사랑의 힘에 대해서도 큰 경험을 한 셈이다.

 

  자신의 마음을 늘 비껴가려 했던 루크. 자신의 귀에 들리는 소리 뿐만 아니라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지 않았기에 또한 소중한 사람들의 사람이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을 알아가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제는 루크가 보았던 별을 쫓기만 하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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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2만리 1 -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2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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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책을 읽다가 다른 책에 대한 언급이 나오면, 관심가는 책은 메모해 두었다가 직접 구입해서 읽어본다. 그것을 나는 책 파도타기라고 부르는데, 그것을 통해 좋은 책을 참 많이 만났다. 물론 구입해 놓고 손도 대지 못한 책도 있고, 메모만 해 놓고 만나지 못한 책도 많다. 그러나 나의 책 파도타기에 가속도를 붙여 주는 것은 여러 책에서 많은 언급이 나왔던 책들이다. <해저 2만리> 또한 여러 책에서 자주 언급 되었기에 정말 읽고 싶었고, 너무 궁금해서 읽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아 부랴부랴 구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해저 속으로의 탐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19세기 중엽, 세계의 바다에는 괴물이 나타난다는 목격자들과 함께 배들이 침몰하는 일로 혼란스러움을 맞이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괴물이라고도 하고, 고래라고도 하지만 박물학자 아로낙스 박사는 자세히 조사를 하기 위해 군함을 타고 태평양으로 떠난다. 그러다 일본 근해에서 그 대상을 만났지만 자신이 타고 있던 군함은 침몰하고, 아로낙스 박사와 그의 하인 콩세유, 작살잡이 네드 랜드와 함께 네모 선장이 이끄는 노틸러스 호에 구출 된다. 그러나 구출이라기 보다는 감금상태로 노틸러스 호에서의 생활을 시작 할 수 밖에 없었다. 네모 선장은 육지와는 등진 사람으로 아로낙스 박사 일행과 함께 세계 바다 곳곳을 항해하지만, 그들을 절대로 풀어줄 수 없다고 말한다. 해양학자인 아로낙스 박사는 연구의 목적으로라도 노틸러스 호에서 여행하는 것을 즐거워 했지만 그도 영영 잠수함에 갇혀서 생을 마감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갈수록 진해진다.

 

  그렇더라도 노틸러스 호를 타고 바다속을 여행하는 일은 흥미로울 수 밖에 없었다. 기상천외한 잠수함부터 그 잠수함이 유지되는 비결, 바다속의 풍부한 자원, 알려지지 않는 미지의 세계의 비밀을 모두 알아간다는 것은 아로낙스 박사 일행이나 나나, 현재의 위치를 잊고서라도 마음을 뺏기기에 급급했다. 특히나 노틸러스 호가 바닷속을 유유히 항해하는 것 부터 식량, 자원을 모두 바다에서 얻어서 생활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런 부분에서 쥘 베른을 과학자라고 인정하고 싶었고, 이 책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과학책에 가깝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게 되었다. 쥘 베른의 지식을 내가 양껏 흡수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풀어내는 바다속의 이야기와 과학적 지식은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거기다 해양 보고서라고 해도 될 만큼의 수 없이 펼쳐지는 새로운 생물과 해저 모험은 낯설면서도 신비감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아로낙스 박사 일행은 노틸러스 호를 타고 여러 달 동안 세계 바다 속 여행을 한다. 그 여행동안 믿지 못할 일도 많이 겪었고, 노틸러스 호에 대한 세상의 궁금증은 증폭되어 가고, 네드 랜드는 탈출 하고 싶어 안달한다. 더군다나 네모 선장이 누구인지, 그가 왜 육지를 등지고 거대한 잠수함을 이끌며 바다속을 항해 하는지에 대해서는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노틸러스 호를 관찰해보면 그는 다시는 육지로 건너 올 생각이 없다는 듯 철저히 노틸러스 호를 설계했다. 개인 서재, 식량, 압력에도 끄떡하지 않는 잠수함의 구조는 신비로운 세계를 탐험하기에 적격할지라도 선장의 마음 속에는 복수심이 깔려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항해는 모험과 난폭함, 권위와 독단적인 성격을 띄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로낙스 박사 일행이 노틸러스 호를 탈출 하면서 보아온 처절한 싸움으로 네모 선장의 그 이후의 행적을 예측하고 싶지 않다. '너는 바다 속 깊은 곳을 거닐어 본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에 대답할 권리가 있는 것은 오직 네모 선장과 자신 뿐이라는 아로낙스 박사의 말처럼 그의 결말을 따르고 싶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바다 깊이 여행을 했기에 놀라움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하지만 현재의 나의 삶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 네모 선장에 대한 피상적인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삶에 어떠한 일이 있었든지 간에 그가 육지생활을 다시 꿈꾸게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은 나의 현재를 최선을 다해 사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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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와 미니모이 4 - 두 세계의 전쟁
뤽 베송 지음, 이희정 옮김 / 웅진주니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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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초, 1,2권을 읽고 재미 있어서 다음 책을 눈빠지게 기다렸는데 막상 구입해 놓고는 오랫동안 꺼내보지 못했었다. 읽다 만 책은 미완성의 이야기로 남아 있기에 늘 조바심이 났었는데, 그 조바심을 이번 기회에 없앨 수 있어서 조금은 후련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 년정도 공백기를 두다 보니 앞의 이야기가 많은 부분 기억나지 않았던게 사실이다. 그래서 리뷰를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책을 떠들러 보기도 했지만, 3권을 읽으면서 그냥 부딪혀 보는게 좋을 거라 생각하고 편하게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 권에서 기대했던 다음 이야기는 3권에서 간절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더가 미니모이 왕국과 할아버지를 구하고, 셀레니아와 결혼을 했다는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3권에서는 과거의 이야기보다는 현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아더는 미니모이 왕국을 구하고 셀레니아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인간세상에서 나름대로 바쁘게 지냈다. 할아버지 댁에서 방학을 보내며 보고 마타살라이 족을 통해 전사가 되는 훈련도 했고, 아이다운 장난기를 지닌 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미니모이 왕국을 구했다고는 하지만 말타자르가 존재 했기에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더 앞으로 메세지가 전해진다. 쌀알에 구해줘란 글씨를 통해 미니모이 왕국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왕국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아더는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보고 마타살라이 족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미니모이 왕국으로 들어 가지만 왕국은 조용했다. 그러나 아더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셀레니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말타자르와 함께 나타난 셀레니아는 말타자르의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고, 아더를 협박하기 위해 말타자르가 보낸 메세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더 대신 말타자르가 인간 세계로 가버린다.

 

  미니모이 왕국에서도, 인간세계에서도 말타자르의 행방은 큰 혼란을 야기시키고 만다. 말타자르는 인간세계와 미니모이 세계를 둘다 지배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에 인간세계에서의 만행은 불을 보듯 뻔했다. 거기다 아더의 할아버지를 협박해 자신의 부하들을 큰 덩치로 만들어 버렸으니 아더가 인간세계로 돌아오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2mm의 아더는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인간세계로 건너온다. 모험 끝에 여왕벌의 도움을 받아 원래 크기로 돌아온 아더는 말타자르가 인간세계를 혼란스럽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말타자르는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갔고 그로 인해서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다시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3,4권을 홀린 듯 읽어 나가면서 놀라웠던 것은 저자의 역량이었다. 워낙 유명한 감독이지만 그간의 명성이 톡톡히 발휘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책이라고 단순하게 그려나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독특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모험과 유머를 적절히 섞어 펼쳐내는 세계는 푹 빠져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아더와 셀레니아의 관계, 말타자르의 최후를 어떻게 마무리 할지 무척 궁금했었다. 나의 상상력으로는 최선의 방법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내가 예측했던 결말은 순수함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때가 덕지덕지 묻은 추함이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더와 셀레니아는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고, 말타자르는 죽을 수 밖에 없을 거라고 나의 생각을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저자는 아이들의 시선에서 결론을 내려주었다.

 

  아더와 셀레니아는 10달에 한번 만날 수 있고, 말타자르는 아더의 할아버지네 유리병에 갇혀 있는 것으로 책은 끝이 났다. 이런 결론 앞에서 나의 속물적인 생각은 흔적을 감추었지만, 아이들의 시선에서 풍부한 상상력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 좋았다. 좀 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책을 읽어야 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마치 내가 모험을 한 것 같은 뻐근함을 느끼며 뿌듯함으로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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