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베이터 - 디베이팅 세계 챔피언 서보현의 하버드 토론 수업
서보현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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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말을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잘 하고 싶다. 저자는 영어도 몰랐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버드 토론 대회 코치까지 되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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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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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에서 돈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돈으로 신뢰라는 주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굉장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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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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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306쪽


몇 년 전 우연히 카페에 들고 간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고 한참 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그 사진은 하얼빈에서 암살을 앞둔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의 마지막 기념사진이었다. 의거 3일 전에 마지막을 예감하듯 이발소에서 머리를 단장하고 의식을 치르듯 찍은 사진이었다. 왜 이렇게 이 사진이 나를 사로잡았을까? 눈물이 맺히고 마음이 울컥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안중근 의사의 나이는 31세, 우덕순은 34세, 유동하는 19세 라는 나이(『하얼빈』에서는 안중근과 우덕순이 동갑으로 나온다)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열린 재판장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한반도를 넘어 동양 평화에 위협을 가중 시키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를 낱낱이 들여다봤다. 거기에 ‘의병으로서 행한 일이기에 전쟁포로로 이 재판장이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국제공법,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되기를 희망한다.’고 자신의 죄를 당당히 밝히는 안중근 의사가 있었다.


그래서 『하얼빈』을 마주했을 때 당당했던 안중근 의사와는 좀 다른 이야기일 거라 예감했다. 『칼의 노래』에서 외로웠던 이순신 장군을 목도 했던 것처럼 안중근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약간은 예상을 할 수 있었다. ‘대의’에서 한 발짝 벗어 났지만 오히려 내면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간 안중근 역시도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처연해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운명을 찾아갔을 뿐, 때론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동양 평화’라는 이유 외에 자신의 직감을 적확하게 설명할 수 없어도 나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향해 자신의 살아 있는 몸을 밀어 또 다른 생명을 해하려는 행위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안중근의 정치성은 이토와 코레아와 세계 공통어 ‘후라’를 그의 한 몸의 리듬으로 연결시키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을 거쳐서 대련에 닿는 철도를 따라서 전개되고 있었다. 217쪽


저자가 안중근의 ‘대의’에 집중했다면 이토를 향해 총을 쏜 순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중근이 이토를 향해 6초간 7발의(소설에서는 한발이 남은 걸로 설정했다) 총성이 울린 장면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지나갔고, 사실만 전달하려는 것처럼 간결했다. 웅장하지도, 그 순간을 정지시켜 장황하게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토의 마지막 순간도 그저 ‘이토는 곧 죽었다. 이토는 하얼빈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 라고만 표현했다. 이토가 도착하는 순간을 요란하게 맞이했던 많은 얽힘과 목적을 뒤로한 채, 이토가 하얼빈에 왜 오는지를 알 필요조차 없다고 느낀 안중근이었다. 이토가 온다고 하기에 하얼빈으로 향했을 뿐, 거기서 그는 깔끔하게 목적을 달성했다. 이토를 저격한 뒤 ‘코레아 후라’라고 외친 것처럼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고 존재했던 것처럼 보였다.


안중근은 한 나라도 어쩌지 못한 거대한 운명을 어떻게 혼자 짊어질 생각을 했을까? 안중근이 이토를 쏜 총알이 당연하게도 우리나라도, 동양 평화도 지켜내지 못했지만 ‘그 사내는 땅에 결박되어 있으면서도 땅 위에 설 자리가 없었다.’라고 남편 안중근에 대해 말했던 김아려처럼 그는 자신의 설 자리를 내어 기꺼이 ‘대의’를 행했다. 그는 가난했고, 포수였지만 무직이었고, 젊었다. ‘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은 천주교인이었으며,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를 세상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간 묵묵했던 길에 반해 이토의 잘못된 길은 오만하게 드러났다.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이다. 이것이 우리의 앎이다. 우리의 앎은 사물을 향해 나아간다.’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것이 제국의 길이다.’라고 오도를 향하는 모습은 안중근과 대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길은 각자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길을 어느 누구도 틀안에 가둬 단정 지을 권리는 없다. 이토의 그런 생각에 책을 읽다 말고 ‘헛소리!’라고 일갈할 뿐이었지만 안중근은 그를 향해 총을 쐈다. 안중근의 총알이 이토의 몸을 뚫지 못했다면 또 다른 이의 시선처럼 어쩌면 우리는 ‘일본에게 완벽하게 종속’ 되었을 수도 있다. 


저자의 의도처럼 왜 안중근은 이토를 향해 총을 쏠 수밖에 없었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그는 총을 쐈지만 깨어있는 지식인이었다. 이 책에는 안중근의 정치성을 거의 드러나지 않아 자칫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의문으로 남을까 염려된다. 하지만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에서 바라본 그는 교육으로 깨어 있었고, 또렷한 근거를 바탕으로 제국주의에 휩쓸리는 동양을 거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미래를 염려하는 행동파로 보였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동양을 보며 안중근 의사는 무슨 생각을 할까? 저자가 ‘영웅’ 안중근을 걷어내고 ‘인간 안중근’에 집중해 ‘가장 치열했던 일주일’을 표현한 것도 어쩌면 내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은 잠시 내려둔 채, 자신의 삶을 잘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결은 많이 다르고 조금은 억지스럽더라도 치열함의 근본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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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4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3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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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24쪽


새벽에 일어나 문득 펼친 책장에서 만난 문장은 울컥하다 못해 눈물이 줄줄 흐르게 만들었다. 눈물이 차오르고 눈앞이 흐려진다는 표현을 실감할 정도로 글씨는 자꾸 흐려지고 눈물은 왈칵 쏟아졌다. 누군가 그랬다. 같은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어른과 그런 어른을 멀뚱히 바라보는 아이는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의 차이라고.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아기 펭귄의 마음에서 나는 무엇을 경험했던 걸까?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보면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자꾸 눈물이 난다. 노든, 치쿠, 윔보, 아기 펭귄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곁에서 내가 그들을 다 지켜본 것 같아서, 나 혼자 ‘긴긴밤’을 보낸 게 아닌 것 같아서 자꾸 마음이 시린다.


나는 절벽 위에서 한참 동안 파란 세상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너무나 거대했지만, 우리는 너무나 작았다. 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우리는 엉망진창이었다. 124쪽


아기 펭귄이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바다를 보면서 다른 동물들의 마음을 이해한 장면을 말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한다.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이 세상은 거대했지만 나는 너무 작았다. 이 세상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엉망진창이었다.’ 라고 들려 하루 종일 눈물바람이다. 아마도 현재의 내 상태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매일 하루살이처럼 하루를 버티지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늘 지배적이다. 계획도 없이 눈에 보이는대로 해치우고, 그렇게 보내다 보면 잠들 시간이 다가온다. 하루를 되돌아보면 정리된 건 하나도 없이 엉망진창이고, 또 그렇게 보낼 내일이 예상되는 게 요즘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엉망진창이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엔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삶인데, 대부분 다 그렇다고, 나만 그런 게 아니니 아름다운 이 세상을 바라보라고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16쪽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115쪽~116쪽


그러면서 굳이 나에게 앞으로 더 ‘훌륭한’ 내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 것 같아 더 뭉클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 자체로 훌륭하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코뿔소 노든을 돌봐주던 코끼리들이 바깥세상을 향해 망설이던 노든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중에 노든이 아기 펭귄에게 똑같이 말해 주었던 것처럼, ‘난’ 이미 훌륭하니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도 된다는 말처럼 들렸다. 훌륭하다는 말이 뭔가 꼭 잘해야 하고, 뛰어나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것처럼, 누군가 나를 믿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노든과 아기 펭귄이 내디뎠던 낯선 세상으로의 발걸음은 두려움만이 지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125쪽


인생에서 반짝였던 시기는 누구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순간일 때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랫동안 지속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직 그 반짝임이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보통 순간의 반짝였던 기억을 가지고 오랫동안 긴긴밤을 견뎌내는 게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렇게 긴긴밤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받으며 자란 아기 펭귄은 강했다. 코끼리 무리에서 사랑 받으며 세상을 향했던 노든처럼, 자기 새끼도 아닌데 기꺼이 알을 품었던 보쿠와 윔보처럼, 그들이 보여주었던 연대는 아기 펭귄이 긴긴밤을 이겨 낼 힘을 만들어주었다. 노든의 상처와 분노를 가라앉혀 준 것도 사랑이었고, 그 사랑을 아기 펭귄에게 되돌려 준 것도 사랑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누군가에게 계속 사랑을 빚진 자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이렇게 버틸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외면한 사랑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사랑 받으며 자랐다. 그걸 잊어먹었거나 부족하다고 느낄 뿐, 나를 사랑한 사람은 이 세상에 분명히 있고 있어 왔다. 그 사람이 단 한사람이었대도 그걸로 족하다. 그리고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야 할 때다. 지금의 상태가 엉망진창이더라도 훌륭한 코뿔소 노든처럼, 훌륭한 아기 펭귄처럼 진정한 내가 되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아기 펭귄은 스스로 이름을 찾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 삽화에서 펭귄의 무리에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펭귄은 더 이상 아기 펭귄이 아닌 이름을 찾아가고 있다고 여겼다. 노든이 굳이 아기펭귄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도 찾아낼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시작되었다. 나를 비롯해 우리는 이미 이 곳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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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9-08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안녕반짝 2022-09-13 23:4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좋은 책 만나 울컥했네요^^
 
봄의 제전 -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 걸작 논픽션 23
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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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임에도 봄은 왔다. 설렘 가득한 벚꽃 잎은 이미 다 떨어졌지만 연두 빛 나뭇잎은 한껏 봄을 뽐내는 중이다. 사계절 중에 봄은 가장 화려하고 생명력을 터트리는 점에서 축제와 연결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였을까?『봄의 제전』이라는 제목을 단순하게 계절과 연결했고 무희들 뒤로 흑백의 군사들이 드러난 표지를 보고 나서야 이 책의 정체를 전혀 추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거기다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의 부제라니. 전쟁에 대한 편견을 깨야 하는 것인지, 전쟁의 또 다른 이면을 보아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전쟁이라는 게 상대 의지를 강제해서 뭔가 득을 취하려는 건데 미래를 파괴하면서 얻어서 뭐하게? 「멜로가 체질」중에서

 

나에게 전쟁은 드라마 대사와 비슷하다. ‘득’을 위해 누군가의 생명을 끊고 ‘미래를 파괴’하면서까지 얻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전쟁은 오랜 역사를 가졌고, 무려 현재진행형이다. 이 책은 분명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독일이 우리 세기의 뛰어난 모더니즘 국가였다고 주장하고자 한다’며 ‘문화는 사회 현상으로, 모더니즘은 우리 시대의 주요 충동으로 간주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책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이라는 두 표현 사이에 단순한 군사적 어원을 넘어서는 친연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고 밝힌다. 그러므로 1,2차 세계대전의 중심에 있는 ‘뛰어난 모더니즘 국가’ 독일의 진정한 모더니즘을 발견해 내는 것이 독자에게 주어진 임무일지도 모른다.

 

「봄의 제전」은 음악 무용 작품이다. 이는 이교도 러시아를 나타내며, 음악과 무용은 거대하게 밀려드는 봄의 창조력과 신비라는 한 가지 아이디어로 통합된다. 이 작품에는 플롯이 없다. 29쪽

 

이 책의 제목은 1차 세계대전 발발 1년 전인 1913년 5월에 초연된「봄의 제전」에서 따왔다. ‘자유를 얻기 위해 분투하다가 궁극의 파괴력을 얻게 된, 원심적이고 역설적인 우리 세계 최고의 상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허무주의적 광란의 아이러니가 담긴 죽음의 춤’이라는 말에서 제목의 의도를 단박에 파악했다. 전쟁은 ‘플롯’이 없고 지금의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모르면서도 모든 것을 던진 ‘광란’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파격적이고 도발적인「봄의 제전」의 첫 공연에서 관객의 평이 갈리고 전혀 다른 비평이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논란거리는 충분했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논란의 중심에 서서 ‘현대 예술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이 파격적인 공연을 제작하며 러시아 예술의 길목을 열어 준 댜길레프는 ‘예술을 구원과 재생의 수단으로 인식’했으며, ‘서구 문명의 경쟁적이고 자기 부정적인 윤리에 지배되는 우선적 가치들로부터의 해방’의 자유를 추구했다. ‘희생양은 애도되는 것이 아니라 영예롭게 기려졌다.’는「봄의 제전」은 ‘도덕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의미로 전쟁과 닮아 있다.

 

20세기에 들어선 뒤, 독일은 다른 나라와 민족에 대한 공격적 태도로 일관하며 자국의 맹방이나 중립국, 적대국가의 불안이나 소망, 이해관계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151쪽

 

이미「봄의 제전」에서 플롯이 없는 플롯을 가져온 저자는 이 모든 걸 철저히 자료에 의해 증명하듯 분석한다. 공연의 순서를 따라가듯 전쟁의 허무함과 때론 또렷한 목적의식을 만들어내면서까지 ‘유럽 내전, 유럽 정신 내부의 보이지 않는 적에 맞서는 전쟁’ 이야기를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해 풀어낸다. 익히 알고 있는 정치인들도 등장하지만 전쟁에 직접 뛰어든 일반 병사들의 편지, 전쟁 중에도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파티에서의 대화, 그 당시의 문학작품과 음악, 심지어 패션의 변화에서도 전쟁의 이미지를 채워나간다. ‘전쟁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아이러니를 이렇게 광범위하게 다루는 것을 지켜보면서, 말하지 않아도 이 책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그 사람들의 인생 하나하나에 들어가 전쟁을 각각의 시선으로 지켜보고 녹여내고 있었다. 1914년 프랑스와 영국, 독일에서 전쟁에 나간 사람들은 주로 봉사와 의무 관념으로 충만한 중간계급이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지위가 높든 일반 병사든 그들의 시선에서 본 전쟁은 입체적으로 그려지기보다 평면적인 느낌을 받았다.

 

1914년의 전쟁은 4년 동안 이어지면서 다양하게 변해간다. 병사들은 ‘봉사와 의무 관념’으로 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초기에는 전쟁의 참상과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설사 의미가 명확하더라도 계속되는 전쟁 앞에서 정신을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처럼 여겨졌을 것 같다. 그래서 서부전선에서는 적군과 섞여 친목활동을 하고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는데 사회는 유감스럽지만 전쟁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쟁은 영토 문제가 아니라 가치를 둘러싼 것’이라며 독일의 이기주의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전쟁의 성격이 변해감에 따라 적은 갈수록 추상적 관념이’ 되어간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전쟁의 모더니즘은 태어나고 있었다. 베르됭에서 포스겐 공격을 하면서 병사들은 방독면을 쓰게 된다. 지금이야 방독면을 쓴 모습 자체가 낯설지 않지만 ‘가스는 전쟁을 초현실의 영역, 환상의 영역으로 가져다 놓’는 역할을 하게 된다. ‘방독면을 쓰는 순간 병사들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표식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전쟁의 영역에서 이것만큼 아방가르드한 것이 있을까? 병사들이 끔직한 참호전에 지쳐 병들어 가고 있을 때, 전쟁의 목적도 알려주지 않으며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거대한 벽을 만들어 가는 것처럼 슬프고 비극적인 혁신은 없을 것이다.

 

독일의 전적인 전쟁 핵심은 낡은 구조의 전복이라고 말한다. 이런 역사학계의 시선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외부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상상 속에서 찾으려는 독일의 경향에 주요하게 일조’ 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또 역사는 분석보다는 직관의 문제라고 주장하는데, 독일의 직관은 알다시피 ‘관념, 영감, 수단으로서’ 전쟁이 찬미되고 만다. 전쟁을 통해 해방감을 느꼈던 것일까?「봄의 제전」속 희생 장면의 대규모 재연이라고 말한 것처럼 전쟁의 희생자들은 ‘영예롭게 기려지고’ 있을 뿐이었다. 전쟁의 실존적 의미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희생자들은 죽음을 강요당하고, 오히려 영예로운 죽음이 살아 있는 현재보다 더 의미 있다는 뉘앙스를 서슴없이 드러낸다.「봄의 제전」이 음악 무용 작품인 것처럼 ‘전쟁의 광경과 소리를 예술과 연결하는’ 시도도 있었다. 전쟁터의 소리와 병사들의 몸짓은 ‘도발을 목적으로 삼는 예술, 이벤트이자 경험이 되는 예술’로 작용되고 있었다.

 

인간은 구속에서 풀려나왔다. (…) 자유는 개인적인 문제,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감의 문제가 됐다. 448쪽

 

수많은 희생과 파괴, 그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결국 전쟁은 ‘무의식의 영역, 더 정확히는 의식으로 억압된 것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전쟁이 끝난 뒤 1927년 ‘몰락의 고통을 겪는 세계와 새롭게 부상하는 세계 둘 다를 만족시켰’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린드버그의 등장에 열광했다. 전쟁을 경험한 이들과 전쟁을 잊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이들을 새로운 흥분으로 연결해준 것의 등장이었다. 거기다『서부전선 이상없다』의 레마르크의 소설로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급작스레 불러일으키면서 ‘전쟁은 집단적 해석이라기보다는 개인적 경험의 문제’로 ‘역사가 아니라 예술의 문제’로 변한다. 즉 ‘예술이 역사보다 더 중요해’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게 전쟁을 ‘곤경의 근원’으로 인식했음에도 ‘정치적 도덕적으로 비독일적’이라는 이유로 히틀러는 레마르크의 책을 불태우고,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 나치의 등장은 ‘모더니즘적인 충동인 또 다른 혼성체, 즉 비합리주의와 기술주의가 만난 혼성체의 산물’이 되었다.

 

나는 삶이 잔인한 투쟁이고 종의 보존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514쪽

 

히틀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관점을 1914년에서 1918년까지 전쟁터에서 경험한 것으로부터 형성되었다고 했다. 잘못된 신념이 전쟁을 이벤트로 만들고, 개인적 경험에 비춰 제멋대로 해석해버린 오류가 또 다시 비극을 가져왔다. 안타깝게도 많은 독일인들이 1939년의 전쟁을 1914~1918년 투쟁의 피치 못할 연속이라고 확신했다는 사실이 ‘전멸’을 의미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차라리 히틀러의 초점이 민족을 향했더라면 한 끝 차이라도 괜찮은 결과를 만들었을까? ‘신념은 민족을 향했지만 초점은 개인에 맞춰졌다’는 삐뚤어진 생각은 그리스도를 죽인 이는 유대인이며 그러므로 유대인은 적그리스도가 틀림없다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죄의식과 자기 결점을 유대인에게 투사했고, 그는 사회적이든 개인적인 측면에서든 실패작인 사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오만방자하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이 그저 비겁할 뿐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처럼 1945년 어느 독일 유행가의 제목이「끝없는 봄이다」라는 사실 또한 먹먹하다.

 

새로움은 비난과 갈등, 혹평을 무릅쓰고 시도해야 길이 열린다. 평가는 엇갈릴지라도 그 모든 혼란과 논란, 부산스러움을 즐기는 것도 감당해야할 몫이다. 공연「봄의 제전」“예술은 자유였다”를 온 몸을 던져 드러냈고 새 시대를 열었다. 그렇다면 전쟁도 예술의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자유를 갈망한 전쟁을 예술로 통용할 수 있을 것인가? 전쟁에 희생된 시대는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 예술의 크나큰 껍데기로 인해 자의든 타의든 개인의 희생은 그 어느 것으로도 복구 될 수 없다. 수많은 이들의 자기희생적인 ‘미래 파괴’라는 점에서 무의미한 ‘제전’도 ‘끝없는 봄’도 멈춰야 한다. 새로움은 전쟁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서 창조되어야 하는 게 가장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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