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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 미친 여자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인터넷 기사를 보니 한 아이돌 가수가 치파오를 입은 모습이 공개되어 눈길을 끌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자연스레 쑤퉁의 『다리 위 미친 여자』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전통 의상인 치파오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여자가 치파오 때문에 싸우는 사건을 지켜보았으니 어찌 인식되지 않았겠는가. 아이돌 가수가 입은 섹시한 치파오는 아닐지라도, 그 치파오를 뺏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것만은 책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미친 여자는 하얀 벨벳 치파오를 입고 다리 위에서 딸을 기다렸다. 그러나 ‘꽃을 기다리는데 나비가 먼저 온다’(21쪽)는 말처럼 기다리는 딸은 오지 않고 보건소 의사가 다가와 그녀가 입고 있던 치파오에 반한다. 결국 의사의 꼬임에 넘어가 미친 여자는 양복점에 가서 자신의 치파오의 본을 뜨게 된다. 하지만 치파오에 집착한 두 여자 사이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인해 미친 여자의 운명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뻗어나간다. 치파오를 입은 미친 여자, 그리고 그 치파오를 갖고 싶어 하는 의사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름다움을 사로잡고 싶어 탐닉할 수 없는 욕망을 소유하려 했던 그녀들. 판이하게 다른 그녀들의 운명을 보면서 씁쓸할 욕망의 이면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는 총 14편의 단편이 등장한다. 『다리 위 미친 여자』는 국내에 소개되는 쑤퉁의 첫 단편집으로, 장편소설의 작가로 인식되어 있는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동안 써왔던 단편들을 저자가 직접 골라 엮은 만큼 자신의 단편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4편의 단편들은 모두 색다른 분위기와 재미, 근현대로 바뀌는 중국의 혼란과 시민들의 정서 등을 드러내며 단편 하나하나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맴도는 단편들이 있다. 『토요일』은 기차에서 만난 라오치와 샤오멍의 특별한 우정에 대해 말하는 듯하다, 토요일마다 찾아오는 라오치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흘러간다. 눈치 없는 라오치는 샤오멍 부부의 주말을 계속 방해했고, 결국 그들은 모르는 척 하는 사이로까지 변하게 된다. 샤오멍의 아내가 라오치가 면도하는 소리를 싫어했던 부분부터 어긋나면서 저자는 이 단편을 통해 일상의 흐름,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술자리』는 성공한 학자 바오칭이 명절을 지내러 고향에 갔다가 학창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깡패와의 곤욕스런 술자리를 갖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히거나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수만은 없는데, 바오칭은 이 술자리로 인해 그런 이미지를 더 굳히고 만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불쾌한 끈적끈적함이 기억에 자리한 단편인 만큼 씁쓸함이 짙었다.
고향에 대한 단편은 이 외에도 『대기 압력』 『집으로 가는 5월』과 연관시킬 수 있다. 『대기 압력』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샤오멍이 너무 변해버린 모습에 당황하고 있을 때, 중학교 시절 물리 선생님의 언변에 속아 허름한 숙소에 묵게 되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물리 선생님은 삐끼였고, 끝내 샤오멍은 알은체를 하지 않았지만 결코 좋은 추억을 만들지는 못하고 쓸쓸히 고향을 떠난다. 『집으로 가는 5월』은 폐허가 된 고향을 찾아가는 한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향을 추억하려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짜증이 잔뜩 난 아들 사이에 '오단 서랍장' 이 매개물로 드러나지만, 결국 그 서랍장도 그들이 마주한 고향처럼 버려지고 만다.
이렇듯 쑤퉁의 단편을 읽고 있노라면 한바탕 꿈을 꾸고 난 것 같은, 옛날이야기를 깊은 밤에 들은 생경함이 묻어난다. 어릴 적 추억, 고향, 흘러간 세월들과 바래지는 이야기들이 맞물려 드러나서인지 공허함이 단편이 끝날 때마다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이 우울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쑤퉁의 단편을 읽는다는 즐거움, 도시화로 인해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히려 맛깔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옮긴이는 '단편소설은 기발한 사건이나 기막힌 반전을 필요로 한다. 짧은 글 안에 인생을 담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을 꿰뚫는 통찰력과 작가의 인생관을 한눈에 보여줄 의미심장하지만 찰나적인 사건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편소설은 한편의 시에 더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옮긴이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칫 장편소설 작가로 인식하고 단편의 존재를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던 쑤퉁의 단편소설을 이렇게 만날 수 있어 너무 반가웠다. 정말 오랜만에 단편의 매력에 푹 빠져 달게 읽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