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3
이즈미 교카 지음, 임태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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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을 하려고 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이 나이가 되니 그런 눈을 보면서 낭만적인 생각을 하기보단 내일 출근 걱정을 하게 된다. 혹여나 버스가 끊기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얀 눈을 보며 마냥 좋아하고, 혼자 낭만에 빠지겠다고 눈 위를 걷는 것도 불사했는데, 이제는 일상에 지장이 갈까 걱정하는 단계가 되어 버렸다. 이런 날은 그저 따뜻한 이불 속에서 맛난 음식을 먹으며 재미난 책을 보는 게 최고다. 서정적이고 현대적인 소설보다 현실을 잊을 정도의 재미가 깃든 고전이 좋을 것 같다. 일본 환상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이즈미 교카의 작품은 어떨까? '괴이하고 몽환적인 환상 세계'로 이끈다고 하니 어디 한 번 따라가 보자.
 

  책을 읽기 전에는 표지를 보면서 그냥 달이 참 밝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고야산 스님>을 읽고 나니 표지가 으스스한 게 꼭 무언가가 튀어 나올 것 같았다. 1900년 작품인 <고야산 스님>은 저자의 작품 중에서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한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고승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그런 시작부터가 특별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을 예감하게 되었다. 고야산 스님이 행각승일 때 주막에서 만난 한 약장수 때문에 길을 잘못 들게 된다. 길이 잘못 알고 다른 곳으로 간 약장수를 만나러 들어간 숲은 표지처럼 적막하고 괴이했다. 뱀들이 진을 치고 나뭇가지에서 산거머리가 뚝뚝 떨어지는 곳을 겨우 통과한 스님은 외딴 오두막에 닿게 된다.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여인의 독특한 매력에 끌리면서도 외따로이 떨어져 살고 있는 그녀가 가여워 잠시 혼란스러워한다. 그때 그 집을 드나들던 한 영감으로부터 그녀의 정체를 듣게 되는데, 욕정을 품고 접근하는 남자들을 짐승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력을 가진 여자였다. 길을 잘못 들고 깊은 산속에서 뱀과 산거머리를 만나고, 외딴 오두막의 미모의 여인을 만날 때부터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여인의 정체가 밝혀지자 내심 나를 따라다녔던 기이함이 정체를 드러낸 셈이다. 백 년 전의 작품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묘사와 오싹함은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짜릿함이었다.

 

  <초롱불 노래>는 1910년 작품으로 국내에는 처음 번역되었다고 한다. <고야산 스님>이 이야기를 듣는 형식이라면, <초롱불 노래>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구성이 돋보인다. 일본의 전통 예능인 노가쿠를 소재를 삼아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한 노가쿠 배우와 연주가는 여관에서 게이사로부터 자신에게 음악을 가르쳐준 이에 대한 사연을 듣게 된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노가쿠계의 촉망받던 기다하치란 사람이었다. 맹인 안마사를 죽음으로 몰고 가 파문당한 그는 다른 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다른 공간에서 각자였던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노가쿠의 한 대목을 보여주게 된다.

 

  <초롱불 노래>는 조금 독특한 기법으로 소설을 이끌어 가서인지 처음엔 공감각이 형성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제각각의 이야기가 섞여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알지 못하다 이야기가 합쳐지고 그들이 만날 때에야 이 독특한 소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고전 미학을 다뤘다는 점에서 조금 생경함을 느꼈으나 저자만의 기이함으로 작품을 완성시키는 모습에 감탄하게 되었다. 두 편의 작품이 실린 얇은 책이지만 시공간을 잊을 정도로 푹 빠져들게 만든 책이었다. 겨울밤에도 무척 잘 어울렸고, 현대문학의 홍수 속에서 만난 고전의 매력을 새롭게 맛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환상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이즈미 교카'란 저자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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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어준다면
게일 포먼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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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힘겨울 때, 과연 나는 용기를 내서 다시 내 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나 혼자라고 생각하고 삶을 내려놓고 싶을 만큼 절망감이 들 때, 나에게 남아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세상이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한 소녀의 사투가 내게 온전히 전해져 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순식간에 바꿔버렸다. 열일곱 살 소녀 미아는 왜 이런 힘겨운 상황에 놓여야만 했을까. 그리고 왜 그렇게 힘든 결정을 하도록 자신에게 짐이 드리워진 것일까. 미아의 혼란스러움과 슬픔, 추억이 내 안으로 들어와 눈물이 가득 차 버렸다. 
 

  한가한 토요일 오전의 카페. 약간은 나른하지만 오랜만의 여유가 물큰 풍기는 분위기 속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눈물을 훔치면서도 민망함과 자연스러움이 교차한 가운데  책 읽기를 멈출 수 없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아껴 읽으면서 내게 전해오는 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결코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카페에서 찔끔거리는 게 싫어 집으로 돌아와 책을 마저 읽으면서 그야말로 펑펑 울었다. 내가 미아가 된 듯, 그런 상황에 놓여 힘겨운 선택을 한 듯, 온 몸과 마음으로 미아를 받아내고 있었다.

 

  미아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얼마 전까지 생기발랄했던 자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가족들과 함께 드라이브를 즐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남은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사고가 났을 때 이미 숨을 거둔 부모님을 확인했다. 남동생 테디의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심하게 다친, 저 육신으로 돌아간다면 많은 고통이 따를 것 같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미아에게 당면한 현실이었다.

 

  미아는 혼란스럽다. 왜 이렇게 끔찍한 일이 벌어져야 했는지, 부모님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테디의 생사만이라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 다시 육신으로 돌아갈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테디가 살아있다고 해도 이미 엉망으로 엉켜버린 이 현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아는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끊임없는 고민을 한다. 그리고 테디마저 자신의 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육신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나 역시도 미아에게 돌아가라고 차마 말 할 수 없었다. 육신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첼리스트로의 삶도 평범한 소녀로서의 삶도 더 이상 희망은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종종 착각하게 된다. 좁은 시각으로 바라볼 때, 자신이 지닌 가치를 제대로 볼 줄 모른다. 그래서 희망이 없다고 절망하고, 낙심하여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 했다. 드라이브를 하러 나왔다가 가족들이 모두 떠나버린 사실을 알게 되고, 중상을 입고,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없는데 이 세상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슬프지만 그런 미아를 이해하려고, 다독여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미아가 자신이 혼자라고 느낄 때,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소중한 사람들이 미아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 세상에 남든 떠나든 그것은 미아의 선택이라고 말해주면서 그래도 남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분들. 순식간에 자식과 며느리 손자까지 잃고, 중상을 입은 손녀를 보며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할 만도 한데, 그분들은 미아에게 남아 달라고 한다. 그리고 킴. 미아에게 더 없이 소중한 친구다. 킴도 많이 놀랐을 테지만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해가며 절대 떠나면 안 된다고 미아를 다독인다. 여전히 의식이 없이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미아는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이미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잊고 있던 소중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아달라고 한다. 그런데 가장 먼저 미아에게 그런 말을 해 주었어야 할 애덤은 어디 있는 것일까.

 

  킴의 연락으로 미아의 소식을 접한 애덤은 미아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미아는 애덤의 눈물을 보기만 해도 죽을 것 같다며 마음 아파한다. 락 음악을 하는 애덤, 첼로를 켜는 미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둘은 요요마 음악회를 계기로 사귀게 된다. 미아가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엄마, 아빠, 테디, 킴과의 추억도 많이 떠올렸지만 애덤과의 추억도 많이 떠올렸었다. 그런 애덤이 제일 늦게 병원에 도착했을 때 괜히 내가 더 서운했는데, 애덤은 미아를 만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가족 이외에는 만날 수 없다는 규칙을 깨기 위해 락스타까지 동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미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힘겹게 마주한 미아에게 살아달라고, 남아달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너무 가슴 아파 울어버렸다. 미아가 남아준다면 널 잃는 건 감당할 수 있다는 애덤의 간절함 앞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육신이라고 해도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이 깃든 애절함이었다.

 

  미아가 육신으로 돌아간다면 옛날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중상을 입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미아는 이 생에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았음에도 자신의 육신으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 힘이 든다. 그러나 미아에겐 이 세상에 남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또한 떠나도 그것이 미아의 선택이라면 존중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눈물이 났다. 마치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마음이 무거웠다. 나처럼 혼란스러워 하는 미아에게 음악이 들린다. 애덤이 미아에게 음악을 들려준다. 요요마 음악이다. 그들이 함께 연주회를 갔고, 줄리아드 오디션을 볼 때 연주했던 요요마. 미아는 그 음악에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과정을 충분히 겪었기 때문인지 책을 덮고 나서도 내게 남아있는 여운을 어찌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내 곁에 소중한 사람들이 존재해 준다는 것이 감사하게 다가왔고, 당신이 있어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픈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릴 것 같은 불안함. 그런 소중함을 미아가 가르쳐 주었다. 분명 이 책을 읽는다면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조심스레 건네주고 싶을 것이다. 그 마음이 상대에게 가 닿는다면 그것보다 기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미아와 같이 순간순간 커다란 결정을 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이 안쓰럽게 다가왔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슬픔과 후회가 가득할 것만 같다. 그렇기에 매순간을 감사하게 사는 것 밖에 없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행복해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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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와 클라라
필립 라브로 지음, 박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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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 되면 다른 계절에 비해 유난히 더 쓸쓸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현실에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로맨틱한 연애를 꿈꾸기도 한다. 나이 서른에 아직도 그런 꿈을 꾸냐며 면막을 주는 지인들이 있지만 나의 내면에는 여전히 그런 로망이 남아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잘 건드려 주었던 소설은 『프란츠와 클라라』였다. 쓸쓸한 이 겨울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와 준다면, 소설속의 인물처럼 그것이 어린 소년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와의 소통이 그리워지는 계절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사한 봄 날,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맡고 있는 클라라는 혼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음악당 근처의 호숫가로 향한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후, 사람들을 피해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면 그녀의 지정석인 벤치에 앉아 간단한 점심을 먹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했던 자리에 한 소년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소년의 등장이 반갑지 않았지만 그녀를 지켜보았다며 조금은 당돌하게 말을 건네 오는 애 어른 같은 소년 프란츠. 근처의 학교에 다니는 프란츠는 그렇게 점심시간마다 그녀의 벤치로 찾아온다.

 

  분명 그런 프란츠가 달갑지 않았지만 클라라는 조금씩 프란츠를 궁금해 하게 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때로는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진지함, 자신만만한 모습 뒤에는 12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스무 살인 클라라도 왜 이 소년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때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마음의 상처가 가득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클라라에게는 아버지의 죽음, 실연이 있었고, 프란츠에게는 어두운 가족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공통점이 있었기에 나이차를 느끼지 못하고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때론 얘기치 않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 마음을 털어 놓을 때가 있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건드려주고,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숨겨왔던 마음을 펼쳐 놓게 된다. 클라라도 아마 처음엔 어려 보였던 프란츠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 어른 같은 프란츠의 진정함에 마음을 열게 되었지만 프란츠가 사랑 고백을 해 오자 그를 밀어낸다. 아무리 마음을 잘 다독여주었다고 해도 이제 막 소년으로 접어든 프란츠를 밀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리고 클라라는 지역 오케스트라에서 솔리스트 길을 밟기 위해 런던으로 떠난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녀는 보스턴에서 솔리스트로서 성공해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연 도중 객석에서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을 느끼는데, 아니나 다를까 분장실로 찾아온 건실한 청년은 프란츠였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찾아와준 프란츠를 보면서 빤한 스토리일지언정 괜히 내가 더 가슴이 뛰었다. 이제 나이차로 프란츠를 밀어내는 일도 없을 것이고, 12살의 모습이 아닌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난 프란츠도 당당했다. 그들의 재회가 내심 기뻤고, 행복한 결말로 어서 달려 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프란츠가 클라라의 마음을 향해 던졌던 말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지금을 위한 말들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애 어른 같은 프란츠가 좀 더 다른 상황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랐고, 그런 바람은 십년 후에 이뤄졌다. 그리고 그들을 방해할 걸림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십년 후에 재회할 수 있었던 것에는 마치 영혼이 통하듯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서로를 치유할 수 있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겨진 결말은 한참을 책장을 붙들게 만드는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그들의 재회를 바라보면서 내가 10년 전에 만났던 어린 소년이 지금 나타나준다면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아픔. 그래도 그들이 함께 한 시간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잘 견뎌주길 바랐다.

 

   성장소설 같기도 하고, 사랑소설 같기도 한 이 소설은 음악과 함께 어우러져, 프란츠와 클라라가 빚어내는 독특하지만 평범한 삶의 단면을 보여준 것 같다. 그랬기에 나의 철없는 로망을 충족시켜주었다는 것보다 이러한 사랑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당장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사랑을 하고 싶다는 마음, 사랑할 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그 생각을 얻어낸 것만도 감사해하며, 마지막 장의 여운을 남긴 채 조용히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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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3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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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장르의 특성상 한 편 정도는 꼭 읽게 되는 것 같다. 추리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나에게 그 한 편의 무척 중요하게 다가오는데,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좀 특별했다. 추리소설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탄탄한 스토리를 만난 탓이다. 저자는 국내에서 이미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라는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특별히 관심에 둔 작가는 아니었다. '밀실 트릭 3부작'이란 타이틀에 끌려 읽게 되었고, 3부작 모두가 색다른 매력을 뿜어내고 있어 재미와 높은 완성도를 만끽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생존자, 1명> <관館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일본에서는 문고본으로 발행 된 세 편의 단편을 공통된 테마로 인해 한 권으로 묶었다고 한다. '눈보라 치는 날의 산장, 먼 바다의 외딴섬, 서양식 관' 이 배경이 되는 작품들이다. 배경만 보더라도 '밀실 트릭 3부작'이란 카피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밀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배경과 해결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개인적으로 3부작 가운데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생존자, 1명>이었다.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를 먼저 읽고 만나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즈음 빈틈없는 스토리로 트릭의 세계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를 읽고 나서 고개를 갸웃거렸던 이유는 생각지 못한 반전 때문이었다. 보통 탐정이라고 하면 정의를 향해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인데, 이 단편에 등장하는 탐정은 스타일 좋고 명석함을 드러내지만 명탐정은 어디까지나 공상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그야말로 생계형 탐정이었다. 어느 날 기업의 행사에 초대받아 간 산장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그동안의 경험과 지혜로 그와 그의 조수는 나름 사건을 잘 해결해 나갔는데, '눈보라 치는 날의 산장'이라는 트릭에 걸려 정작 그가 맞이하는 운명과 그 뒤의 이야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 독자를 한 눈 팔게 만든 뒤 예상지 못한 빈틈을 노리고 들어와 반전을 안겨주었다. 이렇게 소설이 끝나도 되나 싶었고, 이런 반전이 있다는 것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다 <생존자 1명>의 단편을 이어서 읽게 되었는데,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이야기에 쏙 빠져들었다. 신흥종교집단의 명령으로 지하철 폭파 테러를 일으키고 무인도로 도피한 네 남녀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교단에서 해외로 도피시켜 주겠다는 말만 믿고 무인도에서 시간을 견뎌보려 하지만, 교단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서서히 식량도 떨어져간다. 그런 그들에게 동료의 죽음이 다가오고 서서히 그런 공포는 고조되어 간다. 처절함 속에서 끝까지 범인을 추적해 가지만, 최후의 생존자 1명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신선한 반전이면서도 그들에게 처해진 운명이 씁쓸했다.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는 두 편의 단편에 비해 무척 서정적인 느낌이 났다. 대학 시절 탐정소설 연구회 동료에게 네 명의 중년 신사는 초대장을 받는다. 으리으리한 관館으로 초대받은 그들은 적이 놀라지만, 초대한 당사자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추리극을 연기해 보자며 자신이 지은 집을 그 공간으로 이용하게 된다. 서정적이라고 느꼈던 부분은 진짜가 아닌 추리극을 연기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장면에서 설명이 많이 뒤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자칫 서술 트릭을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지금 무슨 게임을 하고 있나 의아해 할 수도 있다. 비교적 잔잔하게 그려지긴 했으나 역시 충격적인 반전이 있었고, 밀실트릭의 묘미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세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우타노 쇼고라는 작가를 인식하게 되었음은 물론, 밀실 트릭의 묘미를 만끽하게 되었다. 처음엔 반전에 익숙하지 않아 당황했으나 저자가 펼쳐놓은 추리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다. 추리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게 추리소설에 관심 갖게 해주었고, 그래서인지 추리 소설 마니아들에게는 익숙할지 몰라도 내게는 밀실 트릭이라는 자체가 무척 신선했다. 개인적으로 다양한 책 읽기의 필요성과 경험을 쌓을 수 있어 새로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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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 미친 여자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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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기사를 보니 한 아이돌 가수가 치파오를 입은 모습이 공개되어 눈길을 끌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자연스레 쑤퉁의 『다리 위 미친 여자』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전통 의상인 치파오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여자가 치파오 때문에 싸우는 사건을 지켜보았으니 어찌 인식되지 않았겠는가. 아이돌 가수가 입은 섹시한 치파오는 아닐지라도, 그 치파오를 뺏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것만은 책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미친 여자는 하얀 벨벳 치파오를 입고 다리 위에서 딸을 기다렸다. 그러나 ‘꽃을 기다리는데 나비가 먼저 온다’(21쪽)는 말처럼 기다리는 딸은 오지 않고 보건소 의사가 다가와 그녀가 입고 있던 치파오에 반한다. 결국 의사의 꼬임에 넘어가 미친 여자는 양복점에 가서 자신의 치파오의 본을 뜨게 된다. 하지만 치파오에 집착한 두 여자 사이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인해 미친 여자의 운명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뻗어나간다. 치파오를 입은 미친 여자, 그리고 그 치파오를 갖고 싶어 하는 의사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름다움을 사로잡고 싶어 탐닉할 수 없는 욕망을 소유하려 했던 그녀들. 판이하게 다른 그녀들의 운명을 보면서 씁쓸할 욕망의 이면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는 총 14편의 단편이 등장한다. 『다리 위 미친 여자』는 국내에 소개되는 쑤퉁의 첫 단편집으로, 장편소설의 작가로 인식되어 있는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동안 써왔던 단편들을 저자가 직접 골라 엮은 만큼 자신의 단편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4편의 단편들은 모두 색다른 분위기와 재미, 근현대로 바뀌는 중국의 혼란과 시민들의 정서 등을 드러내며 단편 하나하나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맴도는 단편들이 있다. 『토요일』은 기차에서 만난 라오치와 샤오멍의 특별한 우정에 대해 말하는 듯하다, 토요일마다 찾아오는 라오치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흘러간다. 눈치 없는 라오치는 샤오멍 부부의 주말을 계속 방해했고, 결국 그들은 모르는 척 하는 사이로까지 변하게 된다. 샤오멍의 아내가 라오치가 면도하는 소리를 싫어했던 부분부터 어긋나면서 저자는 이 단편을 통해 일상의 흐름,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술자리』는 성공한 학자 바오칭이 명절을 지내러 고향에 갔다가 학창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깡패와의 곤욕스런 술자리를 갖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히거나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수만은 없는데, 바오칭은 이 술자리로 인해 그런 이미지를 더 굳히고 만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불쾌한 끈적끈적함이 기억에 자리한 단편인 만큼 씁쓸함이 짙었다.

 


  고향에 대한 단편은 이 외에도 『대기 압력』 『집으로 가는 5월』과 연관시킬 수 있다. 『대기 압력』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샤오멍이 너무 변해버린 모습에 당황하고 있을 때, 중학교 시절 물리 선생님의 언변에 속아 허름한 숙소에 묵게 되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물리 선생님은 삐끼였고, 끝내 샤오멍은 알은체를 하지 않았지만 결코 좋은 추억을 만들지는 못하고 쓸쓸히 고향을 떠난다. 『집으로 가는 5월』은 폐허가 된 고향을 찾아가는 한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향을 추억하려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짜증이 잔뜩 난 아들 사이에  '오단 서랍장' 이 매개물로 드러나지만, 결국 그 서랍장도 그들이 마주한 고향처럼 버려지고 만다.

 


  이렇듯 쑤퉁의 단편을 읽고 있노라면 한바탕 꿈을 꾸고 난 것 같은, 옛날이야기를 깊은 밤에 들은 생경함이 묻어난다. 어릴 적 추억, 고향, 흘러간 세월들과 바래지는 이야기들이 맞물려 드러나서인지 공허함이 단편이 끝날 때마다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이 우울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쑤퉁의 단편을 읽는다는 즐거움, 도시화로 인해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히려 맛깔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옮긴이는 '단편소설은 기발한 사건이나 기막힌 반전을 필요로 한다. 짧은 글 안에 인생을 담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을 꿰뚫는 통찰력과 작가의 인생관을 한눈에 보여줄 의미심장하지만 찰나적인 사건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편소설은 한편의 시에 더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옮긴이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칫 장편소설 작가로 인식하고 단편의 존재를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던 쑤퉁의 단편소설을 이렇게 만날 수 있어 너무 반가웠다. 정말 오랜만에 단편의 매력에 푹 빠져 달게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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