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0
쥘리앵 그린 지음, 김종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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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회색빛 도시를 떠도는 기분. 그 도시의 잔여물처럼 느껴지던 시기. 내게도 분명 그런 때가 있었다. 아무리 찬란한 햇살이 비추어도 도시는 늘 우울하고 그늘진 장소로 여겨졌었다. 바삐 돌아가는 도시 속의 부적응 자. 그런 모습이 나라고 해도 도시와 나는 맞지 않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도시가 주는 삭막함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의 나는 모든 것이 불안정했기에 도시의 느낌을 그렇게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도시 속에서 비겁한 자신과 조우하게 된다면 어땠을까? 아마 도시도, 자신도 못 견디게 무기력해져서 스스로 존재의 위협을 받았을 것 같다. 

  『잔해』의 필리프가 그랬다. 날씨 좋은 10월의 저녁,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던 센 강변에서 한 쌍의 커플을 보게 된다. 남자의 위협적인 태도와 겁먹은 여자의 모습에 끌려 뒤를 쫓지만 "저기요"라고 말하는 여자를 외면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 사건은 오래도록 필리프를 괴롭힌다. 아내보다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는 처형한테도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건은 필리프를 무상하게 만든다. 그 장소에 다시 가보기도 하고, 그 여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괴로움은 풀리지 않는다. ‘부끄러운 것은, 진짜 부끄러운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비겁하다고 알려지는 것이다.’라며 전전긍긍하다 고뇌하며, 의욕 없는 날들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는 이 사건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얘기를 시시콜콜 들어주는 처형에게도, 한 집에 살지만 전혀 다른 생활을 영위해 가는 아내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겉으로 봤을 때 필리프는 남부러울 것 없었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과 사업으로 부유했고, 잘생긴 외모와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에 의욕적인 것도 아니었고, 아내는 자신들이 결혼이 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또한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있었음에도 다른 도시의 기숙학교에서 지내게 했다. 그가 사랑받고 있는 대상은 처형 엘리안이었다. 집을 돌보지 않는 아내 앙리에트를 대신해 거의 안주인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엘리안은 그가 결혼한 순간부터 11년 동안 같은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 필리프에게 센 강의 한 쌍의 커플의 사건이 오히려 큰 사건으로 다가왔다. 그로인해 실존에 대한 문제가 그의 내면에서 쉼 없이 들끓었다. 무기력함이 그를 지배했고, 허무함이 그의 삶을 바꿔버릴 듯 했다. 엘리안은 그런 사실은 모른 채 필리프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앙리에트는 가난한 애인을 두고 있었다. 앙리에트와 엘리안이 필리프가 사는 아파트로 오기 전까지 그들은 가난했다. 지금은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리는 상황에서 사랑 없는 결혼을 영위해 나가다보니 앙리에트는 가난한 남자에게 끌렸다. 그 남자에게 ‘자신이 그를 만나는 것이 그의 가난 때문이라고 설명할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위해 언니를 설득해 필리프에게 돈을 빌리기도 한다. 필리프와는 거의 대화가 없어 돈을 요구할 수 없었고, 오히려 언니의 부탁을 더 잘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앙리에트는 ‘인간 존재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서 본 삶에 대한 격렬한 애정을 내부에서 키워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필리프가 격렬한 애정의 대상이 아님을 인정하며 살고 있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필리프, 엘리안, 앙리에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격렬한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 평범함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필리프와 앙리에트가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해가고, 엘리안이 앙리에트의 자리를 메우듯 필리프를 사랑하는 것, 그 사실을 앙리에에게 말하고, 앙리에트는 외도를 하면서 그 사람을 위해 언니를 통해 남편의 돈을 빌리는 것 등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소설의 시작에서 “저기요”라고 말하는 여인을 도와주지 못한 자책감이 필리프를 괴롭혔듯이 이 작품에서는 사건의 흐름보다는 그들의 존재위치, 끊임없이 변해가는 내면의 깊숙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도 무심해 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건의 결과가 드러나기보다 과정이 담긴 소설임을 깨달았기에 그들이 도시에 떠도는 ‘잔해’같은 존재임을 인식하며 만나는 것이 더 편했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각자의 영역을 살아가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면 깊숙이 잠재해있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욕망들을 드러낸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려 엘리안은 잠시 집을 나가기도 하고, 그런 엘리안을 필리프가 찾아가기도 하며, 앙리에트는 정부의 부탁을 거절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필리프가 그렇듯 이들 모두 무기력한 존재의 상징을 드러내듯 그들이 하고자 하는 행동들은 어떠한 변화도 꿰어내지 못한다. 심지어 필리프와 앙리에트의 아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왔음에도 전혀 그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 것 하며, 질투 아닌 질투 때문에 조카를 좋아하지 않는 엘리안 등 많지도 않는 가족이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나 싶었다.

  그러나 큰 변화는 아니더라도 필리프가 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 ‘멋있기는 하지만 무리결한 존재야.’라며 필리프를 바라보는 엘리안, 정부에게 돈을 주고 돌아오던 길에 위험한 일을 당할 뻔 했던 앙리에트, 드디어 센 강에서의 자신의 비겁함을 엘리안에게 말하는 필리프. 이런 것들이 큰 흐름을 바꿔놓지는 않았을지라도 도시를 떠도는 잔여물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반가웠다. 자신의 내면속으로만 파고들지 않고, 가족이라는 타인에게 조금씩 다가가려 하는 시도가 소설의 중심 화두였던 실존에 대해 조금은 긍정적인 시선을 주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미미할지라도 시간이 흐르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들이 존재 의식을 더 키워나가길 바랐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의『잔해』는 녹록치 않은 소설이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내면의 격정을 만나게 되는 작품이었다. 존재 여부가 불투명할 때,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쓸쓸하고 고통스러울 때 이 작품을 만난다면 더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오히려 고통의 근원으로 더 다다갈 수 있는 법. 타인이 나를 위로하려 한다는 생각이 아닌, 스스로 만나는 내면이라 생각하고 이 소설을 대한다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과 함께 더불어 소설의 본질에 더 다다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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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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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할 수 없는 판탈레온 대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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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세바스찬과 검둥이 마술사
대니얼 월리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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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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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5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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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최근에 읽은 러시아 문학이 없어서 부끄럽다. 또한 아직도 접하지 못한 러시아 작가들이 너무나 많아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자신 없어진다. 톨스토이는 나와 성향이 안 맞아서 대표작만 겨우 읽을 정도였다 치더라도 늘 이반 투르게네프가 마음에 걸렸었다. 제대로 읽은 작품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 세계에는 무지했는데, 이번에는 꼭 만나리라 다짐하고 『아버지와 아들』을 펼쳐들었다.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을 소장하고 있음에도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아, 좀 더 글씨가 크고 최근에 번역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읽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품들은 출판사별로 비교하며 읽는지라 소장하고 있는 책은 다음에 읽어도 될 듯 싶었다.
 

  초반엔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한 편도 읽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약간 주눅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왜 이제야 이런 책을 만났을까 하는 탄식이 자연스레 터져 나올 정도로 그야말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내 성향에 꼭 들어맞는 소설이었고, 오랜만에 러시아 문학을 제대로 만난 것 같아 독서를 하는 내내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읽어냈다는 후련함보다 너무나 마음에 드는 소설을 읽었다는 만족감이 내면을 지배했다. 다시 러시아 문학에 열정을 불태우고 싶을 정도로 무척 반갑고 고마운 소설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두 세대의 갈등을 보여주고자 제목을 『아버지와 아들』로 지은 것처럼 작품 속에는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가 등장한다. 그러나 옮긴이도 말했듯이 소설속의 논쟁과 갈등은 현재의 실질적인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공을 초월한 세대 간의 보편적 갈등, 동시대의 삶에 대한 객관적이고 상세한 묘사, 중부 러시아의 자연에 대한 서정적 묘사, 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성격묘사'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내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좋아한 것도 이런 세세한 묘사와 장황스러운 대화체, 끝 간 데 없는 수다스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담고 있는 러시아인의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곤 했는데, 이반 투르게네프도 그러한 매력을 작품을 통해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다양한 인물들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 하며, 당시의 사회문제들을 필두로 흐름을 이끌어 가는 것, 거기에 사랑과 가족의 이야기까지 보태 19세기 러시아로 편입한 듯한 착각이 일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작품 속의 아들 세대는 아르카디와 그의 대학 친구 바자로프였고, 아버지 세대는 아르카디의 아버지 니콜라이와 큰아버지 파벨이었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를 따라 그의 고향에 잠시 머물면서 갈등을 일으키는데 특히나 파벨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니힐리스트라고 소개할 정도로 모든 것에 비판적이고 어떤 것이든 인정하지 않는 바자로프는 사사건건 파벨과 충돌했다. 바자로프가 보기에 파벨은 낡아빠진 귀족주의자 행세를 하는 자였고, 파벨이 보기에 바자로프는 버릇없고 뻔뻔하고 예의도 모르는 자였다. 둘의 문제가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라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어느 사회건 겪는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는 섣부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와 신세대가 나란히 동시대를 살아가지 않으면 내부의 붕괴는 뻔 한 법이고, 충돌을 방치하게 되면 화합과는 멀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중심선상에 팽팽하게 맞선 바자로프와 파벨이 있었으니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한 채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바자로프가 좀 더 공손하고, 자신의 생각을 우회적으로 말하거나 논리정연하게 말했더라면. 파벨은 귀족의 본보기를 내면까지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일기도 했다. 그들이 결국 결투까지 하게 되는 것을 목도하고, 끝끝내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현재의 수많은 대립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속의 논쟁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중심이라고 말할 순 없다. 아르카디와 바자로프, 니콜라이, 파벨이 겪는 사랑도 있었고, 가족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던 바자로프는 매력적인 과부 오딘초바에게 사랑을 느끼고, 지금껏 자신이 추구했던 사상과 어긋나는 마음에 혼란스러워한다. 오딘초바도 바자로프에게 호감을 갖긴 하지만 모든 것을 그에게 걸기엔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아르카디 또한 오딘초바에게 첫 눈에 반하고, 오딘초바와 바자로프의 서로를 향한 마음을 알고 나자 바자로프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아르카디가 바자로프와 오랜 우정을 깊이 나누었다고 할 순 없지만, 최근에 친해진 그들은 오딘초바가 아니었다면 나름대로 잘 지냈을 친구였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의 집에서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지만,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의 극성인 부모를 만나 좋은 인상을 남긴다. 바자로프를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부모님을 보면서 부러움도 느끼고, 바자로프가 부모에게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젊은 혈기인 그들, 구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시골생활과 따분한 집은 갑갑할 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당장 도시를 향했을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키워가며, 방황하고, 혼란스러워하고, 논쟁하고, 안락함을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아르카디는 결국 오딘초바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고, 오해와 충돌로 인한 거리감으로 멀어진 바자로프와 결별하게 된다. 어느 곳에도 머물 수 없게 된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에게, 그리고 오딘초바에게 이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는 그를 열렬히 반기는 부모가 있었지만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로 인한 즐거움을 오래 선사하지 못한 채, 장티푸스로 죽은 시신 해부에 참여했다가 감염되어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가 그렇게 추구했던 니힐리즘을 이 모든 사건들도 인해 빠져나왔건만 예고되지 않은 죽음 앞에서 그의 사상은 철저하게 들어맞고 말았다. 죽음 직전에 오딘초바에게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었노라 고백은 했지만 그만 빼고 모두 나름대로 행복한 것 같아 쓸쓸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얄미울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논쟁하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자신만의 미래를 개척해 가던 청년이 스러져 버린 것은 '러시아의 1860년대는 아직 바자로프의 때가 아니라는 투르게네프의 객관적인 현실인식'과 철저히 마주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은 반역의 심장이 그 무덤 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무덤 위에 자란 꽃들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평온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며 책의 말미를 장식하는 저자의 말처럼 사랑의 무기력이 헛됨이 아님을,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듯 정치적, 가족, 사랑, 심리적인 면까지 두루 가춘  『아버지와 아들』은 독자에게 다양한 즐거움과 메시지를 선사한다. 때로는 철학적인 사색 앞에 감탄하기도 하고, 능글맞은 비유에 미소를 짓기도 했다. 오랜만에 달게 읽은 소설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단박에 반하고 말았다. 100년이 훨씬 지난 소설을 읽고 이렇게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지닌 의의는 크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인간군상 속에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저자의 역량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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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5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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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최근에 읽은 러시아 문학이 없어서 부끄럽다. 또한 아직도 접하지 못한 러시아 작가들이 너무나 많아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자신 없어진다. 톨스토이는 나와 성향이 안 맞아서 대표작만 겨우 읽을 정도였다 치더라도 늘 이반 투르게네프가 마음에 걸렸었다. 제대로 읽은 작품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 세계에는 무지했는데, 이번에는 꼭 만나리라 다짐하고 『아버지와 아들』을 펼쳐들었다.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을 소장하고 있음에도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아, 좀 더 글씨가 크고 최근에 번역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읽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품들은 출판사별로 비교하며 읽는지라 소장하고 있는 책은 다음에 읽어도 될 듯 싶었다.
 

  초반엔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한 편도 읽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약간 주눅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왜 이제야 이런 책을 만났을까 하는 탄식이 자연스레 터져 나올 정도로 그야말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내 성향에 꼭 들어맞는 소설이었고, 오랜만에 러시아 문학을 제대로 만난 것 같아 독서를 하는 내내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읽어냈다는 후련함보다 너무나 마음에 드는 소설을 읽었다는 만족감이 내면을 지배했다. 다시 러시아 문학에 열정을 불태우고 싶을 정도로 무척 반갑고 고마운 소설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두 세대의 갈등을 보여주고자 제목을 『아버지와 아들』로 지은 것처럼 작품 속에는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가 등장한다. 그러나 옮긴이도 말했듯이 소설속의 논쟁과 갈등은 현재의 실질적인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공을 초월한 세대 간의 보편적 갈등, 동시대의 삶에 대한 객관적이고 상세한 묘사, 중부 러시아의 자연에 대한 서정적 묘사, 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성격묘사'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내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좋아한 것도 이런 세세한 묘사와 장황스러운 대화체, 끝 간 데 없는 수다스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담고 있는 러시아인의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곤 했는데, 이반 투르게네프도 그러한 매력을 작품을 통해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다양한 인물들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 하며, 당시의 사회문제들을 필두로 흐름을 이끌어 가는 것, 거기에 사랑과 가족의 이야기까지 보태 19세기 러시아로 편입한 듯한 착각이 일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작품 속의 아들 세대는 아르카디와 그의 대학 친구 바자로프였고, 아버지 세대는 아르카디의 아버지 니콜라이와 큰아버지 파벨이었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를 따라 그의 고향에 잠시 머물면서 갈등을 일으키는데 특히나 파벨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니힐리스트라고 소개할 정도로 모든 것에 비판적이고 어떤 것이든 인정하지 않는 바자로프는 사사건건 파벨과 충돌했다. 바자로프가 보기에 파벨은 낡아빠진 귀족주의자 행세를 하는 자였고, 파벨이 보기에 바자로프는 버릇없고 뻔뻔하고 예의도 모르는 자였다. 둘의 문제가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라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어느 사회건 겪는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는 섣부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와 신세대가 나란히 동시대를 살아가지 않으면 내부의 붕괴는 뻔 한 법이고, 충돌을 방치하게 되면 화합과는 멀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중심선상에 팽팽하게 맞선 바자로프와 파벨이 있었으니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한 채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바자로프가 좀 더 공손하고, 자신의 생각을 우회적으로 말하거나 논리정연하게 말했더라면. 파벨은 귀족의 본보기를 내면까지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일기도 했다. 그들이 결국 결투까지 하게 되는 것을 목도하고, 끝끝내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현재의 수많은 대립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속의 논쟁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중심이라고 말할 순 없다. 아르카디와 바자로프, 니콜라이, 파벨이 겪는 사랑도 있었고, 가족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던 바자로프는 매력적인 과부 오딘초바에게 사랑을 느끼고, 지금껏 자신이 추구했던 사상과 어긋나는 마음에 혼란스러워한다. 오딘초바도 바자로프에게 호감을 갖긴 하지만 모든 것을 그에게 걸기엔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아르카디 또한 오딘초바에게 첫 눈에 반하고, 오딘초바와 바자로프의 서로를 향한 마음을 알고 나자 바자로프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아르카디가 바자로프와 오랜 우정을 깊이 나누었다고 할 순 없지만, 최근에 친해진 그들은 오딘초바가 아니었다면 나름대로 잘 지냈을 친구였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의 집에서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지만,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의 극성인 부모를 만나 좋은 인상을 남긴다. 바자로프를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부모님을 보면서 부러움도 느끼고, 바자로프가 부모에게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젊은 혈기인 그들, 구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시골생활과 따분한 집은 갑갑할 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당장 도시를 향했을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키워가며, 방황하고, 혼란스러워하고, 논쟁하고, 안락함을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아르카디는 결국 오딘초바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고, 오해와 충돌로 인한 거리감으로 멀어진 바자로프와 결별하게 된다. 어느 곳에도 머물 수 없게 된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에게, 그리고 오딘초바에게 이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는 그를 열렬히 반기는 부모가 있었지만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로 인한 즐거움을 오래 선사하지 못한 채, 장티푸스로 죽은 시신 해부에 참여했다가 감염되어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가 그렇게 추구했던 니힐리즘을 이 모든 사건들도 인해 빠져나왔건만 예고되지 않은 죽음 앞에서 그의 사상은 철저하게 들어맞고 말았다. 죽음 직전에 오딘초바에게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었노라 고백은 했지만 그만 빼고 모두 나름대로 행복한 것 같아 쓸쓸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얄미울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논쟁하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자신만의 미래를 개척해 가던 청년이 스러져 버린 것은 '러시아의 1860년대는 아직 바자로프의 때가 아니라는 투르게네프의 객관적인 현실인식'과 철저히 마주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은 반역의 심장이 그 무덤 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무덤 위에 자란 꽃들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평온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며 책의 말미를 장식하는 저자의 말처럼 사랑의 무기력이 헛됨이 아님을,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듯 정치적, 가족, 사랑, 심리적인 면까지 두루 가춘  『아버지와 아들』은 독자에게 다양한 즐거움과 메시지를 선사한다. 때로는 철학적인 사색 앞에 감탄하기도 하고, 능글맞은 비유에 미소를 짓기도 했다. 오랜만에 달게 읽은 소설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단박에 반하고 말았다. 100년이 훨씬 지난 소설을 읽고 이렇게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지닌 의의는 크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인간군상 속에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저자의 역량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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