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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5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최근에 읽은 러시아 문학이 없어서 부끄럽다. 또한 아직도 접하지 못한 러시아 작가들이 너무나 많아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자신 없어진다. 톨스토이는 나와 성향이 안 맞아서 대표작만 겨우 읽을 정도였다 치더라도 늘 이반 투르게네프가 마음에 걸렸었다. 제대로 읽은 작품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 세계에는 무지했는데, 이번에는 꼭 만나리라 다짐하고 『아버지와 아들』을 펼쳐들었다.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을 소장하고 있음에도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아, 좀 더 글씨가 크고 최근에 번역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읽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품들은 출판사별로 비교하며 읽는지라 소장하고 있는 책은 다음에 읽어도 될 듯 싶었다.
초반엔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한 편도 읽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약간 주눅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왜 이제야 이런 책을 만났을까 하는 탄식이 자연스레 터져 나올 정도로 그야말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내 성향에 꼭 들어맞는 소설이었고, 오랜만에 러시아 문학을 제대로 만난 것 같아 독서를 하는 내내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읽어냈다는 후련함보다 너무나 마음에 드는 소설을 읽었다는 만족감이 내면을 지배했다. 다시 러시아 문학에 열정을 불태우고 싶을 정도로 무척 반갑고 고마운 소설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두 세대의 갈등을 보여주고자 제목을 『아버지와 아들』로 지은 것처럼 작품 속에는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가 등장한다. 그러나 옮긴이도 말했듯이 소설속의 논쟁과 갈등은 현재의 실질적인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공을 초월한 세대 간의 보편적 갈등, 동시대의 삶에 대한 객관적이고 상세한 묘사, 중부 러시아의 자연에 대한 서정적 묘사, 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성격묘사'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내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좋아한 것도 이런 세세한 묘사와 장황스러운 대화체, 끝 간 데 없는 수다스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담고 있는 러시아인의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곤 했는데, 이반 투르게네프도 그러한 매력을 작품을 통해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다양한 인물들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 하며, 당시의 사회문제들을 필두로 흐름을 이끌어 가는 것, 거기에 사랑과 가족의 이야기까지 보태 19세기 러시아로 편입한 듯한 착각이 일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작품 속의 아들 세대는 아르카디와 그의 대학 친구 바자로프였고, 아버지 세대는 아르카디의 아버지 니콜라이와 큰아버지 파벨이었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를 따라 그의 고향에 잠시 머물면서 갈등을 일으키는데 특히나 파벨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니힐리스트라고 소개할 정도로 모든 것에 비판적이고 어떤 것이든 인정하지 않는 바자로프는 사사건건 파벨과 충돌했다. 바자로프가 보기에 파벨은 낡아빠진 귀족주의자 행세를 하는 자였고, 파벨이 보기에 바자로프는 버릇없고 뻔뻔하고 예의도 모르는 자였다. 둘의 문제가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라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어느 사회건 겪는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는 섣부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와 신세대가 나란히 동시대를 살아가지 않으면 내부의 붕괴는 뻔 한 법이고, 충돌을 방치하게 되면 화합과는 멀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중심선상에 팽팽하게 맞선 바자로프와 파벨이 있었으니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한 채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바자로프가 좀 더 공손하고, 자신의 생각을 우회적으로 말하거나 논리정연하게 말했더라면. 파벨은 귀족의 본보기를 내면까지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일기도 했다. 그들이 결국 결투까지 하게 되는 것을 목도하고, 끝끝내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현재의 수많은 대립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속의 논쟁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중심이라고 말할 순 없다. 아르카디와 바자로프, 니콜라이, 파벨이 겪는 사랑도 있었고, 가족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던 바자로프는 매력적인 과부 오딘초바에게 사랑을 느끼고, 지금껏 자신이 추구했던 사상과 어긋나는 마음에 혼란스러워한다. 오딘초바도 바자로프에게 호감을 갖긴 하지만 모든 것을 그에게 걸기엔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아르카디 또한 오딘초바에게 첫 눈에 반하고, 오딘초바와 바자로프의 서로를 향한 마음을 알고 나자 바자로프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아르카디가 바자로프와 오랜 우정을 깊이 나누었다고 할 순 없지만, 최근에 친해진 그들은 오딘초바가 아니었다면 나름대로 잘 지냈을 친구였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의 집에서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지만,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의 극성인 부모를 만나 좋은 인상을 남긴다. 바자로프를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부모님을 보면서 부러움도 느끼고, 바자로프가 부모에게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젊은 혈기인 그들, 구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시골생활과 따분한 집은 갑갑할 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당장 도시를 향했을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키워가며, 방황하고, 혼란스러워하고, 논쟁하고, 안락함을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아르카디는 결국 오딘초바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고, 오해와 충돌로 인한 거리감으로 멀어진 바자로프와 결별하게 된다. 어느 곳에도 머물 수 없게 된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에게, 그리고 오딘초바에게 이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는 그를 열렬히 반기는 부모가 있었지만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로 인한 즐거움을 오래 선사하지 못한 채, 장티푸스로 죽은 시신 해부에 참여했다가 감염되어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가 그렇게 추구했던 니힐리즘을 이 모든 사건들도 인해 빠져나왔건만 예고되지 않은 죽음 앞에서 그의 사상은 철저하게 들어맞고 말았다. 죽음 직전에 오딘초바에게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었노라 고백은 했지만 그만 빼고 모두 나름대로 행복한 것 같아 쓸쓸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얄미울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논쟁하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자신만의 미래를 개척해 가던 청년이 스러져 버린 것은 '러시아의 1860년대는 아직 바자로프의 때가 아니라는 투르게네프의 객관적인 현실인식'과 철저히 마주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은 반역의 심장이 그 무덤 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무덤 위에 자란 꽃들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평온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며 책의 말미를 장식하는 저자의 말처럼 사랑의 무기력이 헛됨이 아님을,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듯 정치적, 가족, 사랑, 심리적인 면까지 두루 가춘 『아버지와 아들』은 독자에게 다양한 즐거움과 메시지를 선사한다. 때로는 철학적인 사색 앞에 감탄하기도 하고, 능글맞은 비유에 미소를 짓기도 했다. 오랜만에 달게 읽은 소설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단박에 반하고 말았다. 100년이 훨씬 지난 소설을 읽고 이렇게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지닌 의의는 크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인간군상 속에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저자의 역량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