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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인문학 - 21명의 예술가와 함께 떠나는 유럽 여행
문갑식 지음, 이서현 사진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6년 1월
평점 :
봄은 봄인가보다. 햇살이 거실까지 들이치자 베란다에 나가 날씨를 살피다 유모차를 끌고 산책까지 가는 걸보면 말이다. 겨우내 게으름이 온 몸과 마음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나에게 화창한 날씨는 종종 그렇게 밖으로 나를 인도한다. 아이의 컨디션에 산책길이 정해져 있는 한정된 외출일지라도 그렇게 바깥의 공기를 마시고 자연을 느끼고 평온함을 느끼는 것에 감사한다. 내 발걸음으로 직접 머나먼 곳을 밟을 수 없더라도 책을 통해서 느낀 경험을 떠올리며 집 근처로 나선 산책은 그렇게 활력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제목과 내용에 끌려 한 번 읽어볼까 하고 꺼낸 책을 밤늦게까지 단숨에 읽어 버렸다. ‘21명의 예술가와 떠나는 유럽 여행이라는’ 부제답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많은 예술가들과 함께 유럽 곳곳을 누빈 것 같았다. 나에게 유럽은 고흐의 흔적을 좇아서 아를에, 카프카의 산책길을 따라서 프라하에, 조르바의 자유분방함을 느끼려 그리스에 가고 싶은 정도가 고작이다. 이렇게 협소한 유럽에 대한 나의 갈망을 더 풍부하게 심어준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너무 유명하지만 정작 작품이 배경이 되고 저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런 곳을 제대로 살펴볼 생각을 못하며 살았던 작가들.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워즈워스, 셜록 홈즈, 찰스 디스킨 등 마치 그들이 내 이웃이었던 것처럼 흔적을 찾아 누비는 시간이 참으로 즐거웠다.
유럽 중에서도 특히 영국의 작가들이 많이 언급되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 유독 영국 작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암울, 우울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소설을 즐겨 읽지 않으므로 그런 작품을 기피해왔던 것도 사실인데 변덕스런 날씨가, 시대의 암울함이 작품에 녹아들어 명작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개인적인 취향으로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음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래서 일일이 그들의 발걸음을 뒤좇아준 저자의 시선이 고마웠고 이야기를 들려주듯 편안하게 흘러가는 글이 마음을 느긋하게 해주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보다 수학자로 더 유명한 캐럴, 책의 날이 셰익스피어 사망일이라는 사실(올해는 셰익스피어 사망 400주년이라고 한다.)과 창조자라기보다 유능한 각색자라고 불린다는 것. 홈스의 라이벌로 뤼팽이 탄생했다는 사실 등등 언젠가 마주쳤을 사실들을 그간 간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인지 더 흥미진진하게 그 모든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양한 삶만큼이나 다양한 조건과 상황 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그들을 보고 있으면, 우연과 필연이 닿아 그들이 남긴 작품을 읽었거나 읽을 예정인 나와의 인연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무언가를 남긴다는 게, 특히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남긴 작품을 두고두고 읽힌다는 게 대단하고 감사한 일임을 그들의 흔적을 보며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왜 지금의 행복을 잡지 못하는가? 우리가 미래에 올지도 모를 행복을 준비하느라 눈앞의 행복을 얼마나 많이 망쳐버렸는가. 제인 오스틴 (31쪽)
어쩌면 나또한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만 믿고 현재를 참거나 즐기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적어도 이 책에서 만난 예술가들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져 살기보다 마음이 하는 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에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들이 남긴 흔적을 보며 현재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오랜만에 책장에 묵혀둔 고전을 꺼내보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