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일상의 여백 - 마라톤, 고양이 그리고 여행과 책 읽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를 낳고 난 뒤 스스로 잠에서 깨어 눈 떠 본 적이 거의 없다. 늘 아이의 울음에 먼저 잠이 깨거나 남편이 출근하는 소리, 아니면 윗집에서 쿵쿵 대는 소리에 잠이 깨곤 한다. 내 스스로 일어나게 되면 무엇을 할지 계획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없으니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뜨면 언제 또 밤을 맞이해서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을지 한숨을 쉬기도 한다. 원래 규칙적인 생활을 잘 하는 타입도 아니지만 며칠만이라도 온전히 내 멋대로 시간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 이면에는 여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요하는 욕망도 내제되어 있지만 내 일상을 되돌아보고 블로그에라도 기록해보고 싶은 욕망. 하루키의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다. 당시에 난 고등학생이었고 책은 좋아했지만 저자가 미국에 체류하면서 쓴 에세이를 흥미롭게 바라볼 만큼 문학의 폭이 넓지 못했다. 거의 20년이 지난 뒤에 읽었으니 시간적 배경이 현재와 맞지 않아 낯선 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일상을 꼭꼭 채워나가고 글로 남긴 흔적을 좇는 일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미국 케임브리지에서 머물면서 그곳에서의 에피소드, 자신이 좋아하는 마라톤을 하고 재즈 음악을 듣고, 소소한 일상의 일들이 세세하게 드러난 책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시대적 배경이 맞지 않음에도 옛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신기할 정도로 문화적 배경의 다름에서 오는 낯선 즐거움이 있었다.


  타국에 가서 모든 것에 적응해야 살아야 한다면 나 같은 소심쟁이에게는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늘 그렇듯 그런 생활을 어려워하기는커녕 즐겼고 그 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수준 높은 재즈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수영도 실컷 할 수 있고 마라톤 대회에도 참여하고 동네 고양이를 돌보기도 하는 그런 일상. 이런저런 자잘한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 모든 걸 즐기는데 걸림돌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저자는 낯선 곳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더 즐겼고 자신을 더 잘 드러냈지만 나라면 오히려 내 안에 숨겨진 또 다른 나를 더 발견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했다.


  나를 아는 이가 없고 그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면 그간 내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놓여질 때 그런 나를 만난 적이 몇 번 있기에 글을 통해 간접경험을 하는 것 같았다. 두렵고 자신 없지만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나씩 해보는 것. 언어가 된다면 그 나라의 유명한 작가의 책의 원서를 찾아 읽을 것이고, 도서관에도 놀러가고 산책도 실컷 하고, 허락한다면 공연도 많이 볼 것 같다. 예전에는 록과 힙합 공연만 추구했지만 지금은 온갖 음악을 다 듣고 있으니 그 지역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찾아서 볼 것 같다. 실현 가능성이 현재는 없기에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책 속의 배경이 외국이라는 것 때문에 그런 상상을 해보았지만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은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도 언제든 가능하다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 셈이었다. 내게 익숙한 동선을 조금만 틀어보아도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인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쩔 때는 내게 주어진 일상에 무한히 감사하다가도 빠져나올 수 없는 늪처럼 지겹고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일상을 생각하기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걸 실천하는 건 오로지 내 몫이다. 겨울의 끝자락이라고도, 봄의 시작이라기도 애매한 요즘이지만 날씨를 핑계 삼아 집에만 머물렀던 나를 좀 털어내고 집에서 좀 먼 곳까지 아이와 함께 산책해보는 것을 먼저 계획해본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일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그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인지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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