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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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쌓인 어마어마한 책을 보면서 한숨을 짓다가도 언젠가 때가 되면 읽겠지 하는 마음이 늘 있다. 그리고 그 때에 맞춰서 내 손에 착착 쥐어지는 책을 만날 때면 책을 쌓아둔 죄책감이 우쭐함으로 바뀐다. 거 보라고, 분명 때에 맞춰서 손에 잡힐 줄 알았다고. 그 시기가 언제인지 모르니 일단 쌓고 보는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우쭐함이어서 탈이지만 말이다. 워낙 다작한 작가라 신간보다 개정판이 더 많이 나오고 있는 하루키의 이 책을 책장에 쌓아 두지 않았더라면, 뭐에 홀린 것처럼 하루키의 단편집을 읽어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시작은 하루키와 함께 많은 작업을 했던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가 추천한「오후의 마지막 잔디」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단편이라 했고 그에 관련된 그림까지 그렸기에 너무 궁금해서 읽어보았는데 딱 하루키답다는 느낌이 배어나왔다. 잔디 깎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의 이야기가 담백하면서도 그 안에서 일어난 애정 행각에 관한 이야기는 역시나 조금은 껄끄러웠다.(늘상 하는 이야기지만 하루키의 소설에서 성(性)에 관한 부분은 항상 불편하다. 감춰야 능사가 아니고 무조건 감춰 달라는 게 아닌, 좀 더 이성(理性)에 부합된 행위로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럼에도 잔디 깎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부심을 느끼며 만족감을 드러낼 정도로 일처리를 깔끔하게 하는 주인공이 인상 깊게 남았다. 그런 일처리를 알아봐주는 사람, 그리고 그런 잔디를 보면서 죽은 남편을 떠올리는 여인. 싱그러운 봄이 오고 푸르른 잔디밭을 볼 때마다 분명 최선을 다해 잔디를 깎았던 이 청년이 떠오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기억과 비슷하다. (141쪽)


  어떤 사물이나 풍경 혹은 냄새를 통해서 기억이 떠오른다고 하면, 그런 매개물로 인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기억이란 저장소에서 단박에 드러나는 것인지 쉽게 설명하지 못할 때가 있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계기가 되어 툭하고 튀어나올 때 스스로 놀란적이 있다. 내가 갖고 잊는 기억의 완전하지 않음을, 그 안에 축적된 삶의 궤적이 나름 정직했음에 말이다. 하루키의 초기 단편집인 이 책을 읽으면서 책 속의 인물들은 어떠한 사물을 보면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중국행 슬로보트」에서는 모의고사 시험장으로 중국인 초등학교에 홀로 배정되고, 거기서 처음으로 중국인을 만나고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중국인을 만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홀로 중국인 초등학교에서 시험을 보지 않았더라면 언제 처음으로 중국인을 만나고, 그 인물들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중국행 슬로보트를 기다리며 중국을 그리워 할 것이라고, 하지만 중국은 멀다고 말하고 있다.


  태풍이나 집중호우가 닥칠 때마다 동물원에 찾아가는 친구를 떠올리고, 그 친구에게 늘 빌려 입었던 장례식용 양복, 그리고 정말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희박한 상황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떠올리는「뉴욕 탄광의 비극」은 극적이기까지 하다. 백화점 고객 불만센터에서 일하는 남성이 레코드를 잘못 구입한 여성의 접수된 편지를 보고 독백하듯 녹음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캥거루 통신」은 독특하면서도 저자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개인의 고독과 자신만의 세계를 거리낌 없이 쓱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비가 오는 비수기의 리조트의 창가에 앉아 있다면(그럴 가능성이 내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땅 속에 묻은 강아지를 다시 파내야 했던 여인의 이야기가 떠오를 것 같다. 창가를 두드리는 비처럼, 끈덕지게 혹은 조금은 으스스하고 신비롭게 말이다.


 마지막 단편인「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는 저자의『양을 쫓는 모험』이 생각나기도 했다. 양 사나이가 나오고 양박사가 나왔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아무도 자신을 찾길 바라지 않는 마음에 좀 무서운 거리에 탐정 사무실을 차려놓고 삼시 세끼를 피자만 먹는 주인공이 특이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나는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을 들으며 경험했던 기억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핸드폰에 저장된 음악이 몇 년 째 고스란히 들어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잠깐 주어진 개인적인 시간들이니 그런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저자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런 기억에 대한 불확실함과 흥미로움이 나의 내면을 좀 뒤집어놓고 일을 벌여놓은 것 같아서 조금 다양한 나를 만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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