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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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하게 하루를 보내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소식 알림 문자가 오면 갑자기 생기가 돈다. 바로 책을 주문하고 책이 도착할 때까지 뭔가에 들뜬 사람처럼 자질구레한 일을 해도 즐겁기만 하다. 그렇게 책이 도착하고 깊은 밤 스탠드 불빛 아래서 마주하고 있을 때면, 과장을 덧붙여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까지 하다. 이 책이 그랬다. 국내에 출간된 작품을 모두 읽고 다음 책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최근 작품이 아닌 이미 오래전에 출간된 작품이긴 하지만 저자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환상의 빛」단편의 문체가 너무 좋아서 책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하게 전개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이혼하고 남남이 되어 버린 부부가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마주한 뒤 오로지 편지로만 주고받는 이야기. 그들이 편지를 주고받는 것부터가 예삿일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 펼쳐진 이야기는 더 그러했다. 얼굴을 보며 하지 못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었기에 하지 못했던 내면 깊숙한 이야기를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낱낱이 밝혀낼 만큼 시간도 흘렀고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사이이기 때문이다. ‘이제와 굳이 왜?’ 하고 묻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간 살아온 세월에 대한 돌아봄 혹은 정리 같은 게 필요했던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 것이다.


  다른 여자와의 불미스런 일을 계기로 헤어진 부부가 무슨 미련이 남았을까 의문을 가졌지만 그런 남편인 아리마를 많이 사랑했음을 아내 아키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리마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장애아를 키우고 있는 아키에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다른 여자와의 일, 그녀에 대한 감정, 현재의 상황까지 아주 낱낱하게 말한다. 솔직한 게 좋은지 적당히 예를 갖춰 배려를 해주는 게 좋은지 고민될 정도로 둘의 편지는 솔직하다 못해 그간의 쌓인 감정을 폭발시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유쾌하진 않았다. 불륜, 불륜, 불륜. 책을 읽다 말고 이 말을 뱉을 정도로 왜 그렇게 불륜이 많은지, 내면엔 왜 그렇게 감춘 게 많은지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옮긴이는 ‘아키와 아리마의 관계에 대한 환상을 잃어 가고 그들의 지리멸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쉽지만 그게 현실이고 사랑이다.’라고 했듯이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니 그냥 지치는 느낌이었다. 부부가 모든 걸 드러내놓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위기의 순간에 왜 서로에게 기대지 못했는지, 떠밀리듯 다시 결혼하고 똑같은 상처가 반복되어야만 했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인생이란 어쩌면 그렇게 슬픔으로 가득 찬 것일까요? (153쪽)


  아키가 두 번째 이혼을 결심하고 이제 결혼 같은 건 하지 않고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기로 다짐했을 때 오히려 내가 더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아키의 인생은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모차르트 음악에 빠졌던 그때처럼 이젠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에 반해 아리마에 대한 시선은 끝까지 곱지 못했다. 아키와의 이혼 이후에 내리막을 걷던 그를 어수룩할 정도로 받아주고 챙겨주는 동거녀에게 나쁜 남자라는 인상이 남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둘의 편지의 시작은 현재를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과거를 미화할 편지가 아니었음을 짐작했기에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각자의 인생을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며 이젠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은 그들의 모습을 나 역시 무심하게 등지고 있는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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