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자이 미즈마루 -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안자이 미즈마루 지음, 권남희 옮김 / 씨네21북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구입을 망설였던 것은 하루키와 함께 작업한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사실밖에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의 일러스트가 뇌리에 기억될 정도로 인상 깊었다는 느낌보다는 뭔가 하루키 답다는 자연스러움이 강해 특별히 구분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하루키와 작업한 것 이전과 이후에도 그만의 작품이 있는데 나는 오로지 하루키와 연관된 것만 보려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도 들었다. 오랜 고민 끝에 이 책을 만나보니 이런 고민도 이해가 됐고 이제라도 보게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물론이고 하루키의 단편집 읽기에 불을 지펴준 책이기도 했다.


 

‘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이란 문구가 모순적이면서도 가장 적확하다고 생각되었다. 그의 그림은 분명 대충 그린 것 같다. 하지만 성의가 없는 대충의 그림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마음을 다해 그린 그림으로 보는 이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 있다. 색이 입혀지지 않은 그림은 산만한 스케치 같기도 하고 낙서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들여다보게 되고 금방 낯이 익어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 색이 더해진 그림을 보면 굉장히 화려해서 시선이 분산되는 느낌도 있다. 설명은 할 수 없어도 일본적인 느낌이 확 나고 독창성을 요구하는 그림들에서는 그만의 색깔이 확연히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그의 그림들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겼던 건 아니지만 내면의 세계가 굉장히 독특하고 환상적인 느낌까지 들었다. 관찰하고 그린 그림에서도 내면을 통해 한번 걸러지고 난 뒤 자신만의 색깔로 탈바꿈한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다. 책에서 언급된 것처럼 ‘1인칭으로 그린 경쾌함’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서 기이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안자이 미즈마루라는 일러스트레이터의 평생의 결과물을 모아 놓았다. 개인적으로 그렸던 그림부터 하루키와 작업했던 삽화 및 표지들, 연재물, 엽서, 잡지 표지는 물론이고 한때 그와 작업했던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색을 입히지 않은 그의 그림을 본 느낌의 세세한 과정이라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그의 모든 걸 모아놓았다. 한 사람의 평생의 결과물을 고스란히 실어 놓은 책이었고 사후 출판 된 게 아쉬울 정도로 의미 있는 책이었다. 그런만큼 하루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으므로 둘의 호흡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일러스트레이션과 텍스트의 가장 행복한 콜라보레이션이었죠. (255쪽)


 

  둘의 콜라보레이션을 그때마다 확인한 것이 아닌 뒤늦게 지켜본 터라 그들만의 화학변화가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는 없어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루키 책 속의 삽화가’라는 인식이 강했고 하루키와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흥미가 없을 거라는 무례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무례함을 깨주는 계기가 되었고 한 사람의 삶을 그가 남긴 작품으로 보는 과정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이상하게 읽고 나면 글이 쓰고 싶어지는 소설가의 책이 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도 좋은 그림이 그리고 싶어진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 그리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306쪽)


 

  저 기분을 나 또한 인정하게 되었다. 정통 회화가 아닌 일러스트를 잘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내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의 매력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열심히 살았던 저자의 삶이 내 안의 감춰졌던 소망을 이끌어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충분한 자극과 귀감이 되고 있고 전혀 상관없을 것 같던 이국의 독자인 나에게도 이런 영향을 끼친 작가. 그가 남긴 작품들은 이 세상에 미담으로 남겨 놓은 채 편히 쉬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