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덮고 나니 깊은 밤이었다. 저자의 단편집을 읽고 싶었는데 주문한 책이 도착하지 않아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이 책을 꺼내들었다. 이 책이라도 읽지 않고서는 뭔가 허전한 마음을 가눌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런 이유와 시간 때문인지 마치 내가 하룻밤을 꼴딱 지세우고 잠깐 잠이 든 사이에 꾼 꿈같은 기분도 든다. 몽롱하기도 하고 밤이 보여주는 어두운 이면과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사이에서 한껏 유영한 것 같기 때문이다.


  유영이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알고 싶지 않은, 혹은 들여다보기 거북한 세계를 본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두툼한 책을 읽고 있던 마리에게 다카하시가 말을 건네므로 이 이야기가 시작된 건 차치하더라도, 매춘에 관련된 부분은 어둠의 이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내면에 간직한 비밀을 최소화 하면서 어둠을 이겨내고 끈질기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정당하지 못한 일과 얽혀있을 땐 어서 아침이 오길 바랐다. 아침이 밤의 이야기를 흔적 없이 지워주길 바랐고 이왕이면 그런 밤이 이야기가 지속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럼에도 마리와 다카하시의 만남은 흥미로웠다. 오래 전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그들은 우연히 마주쳤고 밤부터 새벽까지 장소를 달리하면서 여러 번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장소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치 그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만난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겨우 하룻밤인데도 연속성의 다양함에 밤의 또 다른 면을 본 것 같았다. 서서히 마음의 경계를 풀어가는 마리의 변화가 눈에 띠였고 놀기 좋아하는 그저 그런 젊은인 것 같았던 다카하시의 단단함이 의외였다. 그래서 마리를 기다리겠다는 다카하시도, 그런 그에게 많은 걸 털어놓고 다가가는 마리의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우리가 서 있는 지면은 말이지, 단단해 보이지만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밑이 쑥 꺼지고 그래. 한번 꺼지면 그걸로 끝장이야. 두 번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해. 저 아래 어둑어둑한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 (189쪽)


  어쩜 우리는 위태하게 지면을 딛고 겨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 될 정도로 밤이 가져다주는 예민함과 두려움을 소설 곳곳에서 보았다. 마리와 늘 비교되는 언니 에리의 이야기가 그랬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름다운 에리는 텔레비전 화면 너머로 건너가기도 하고 그런 이야기의 묘사가 답답했다. 마치 영화를 보듯이 시선을 따라가는 앵글 때문이 아니었나 싶은데 의미를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진부했고 무언가 툭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불안감을 동반했다. 무척 다른 자매기에 그 둘의 이야기가 활발하게 전개될 거란 예상을 뒤엎듯이 마리는 밤을 서성이고 있었고, 에리는 잠에 빠져 있었다.


  마리를 통해 자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도무지 둘의 관계를 좁힐 수 없을 것 같고 에리가 다시는 이 세계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마리가 경험한 그 밤을 통해 실은 에리와 가까워지고 싶었음을, 항상 그녀 곁에 에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실현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중략)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202쪽)


  이 모든 이야기가 기억의 연료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하면 너무 허무하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공평한 연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구별되는 기억이 있고, 그 기억에 따라 변화할 수도 정체할 수도 삶의 바탕이 될 수도 있다고 믿기에 밤을 배경으로 펼쳐졌던 이 모든 이야기가 축적되길 바랐다. 세상과의 엉킴이든 사람과의 만남이든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밤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통해 낮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낮과 밤의 개별성 때문에 동일함을 바랄 순 없지만 부디 쓸쓸함으로 내면을 채우지 않길 바랐다. 그 누가 되었든 진심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