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신경림 감수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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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일그러져 있다/그래서 모두가 서로를 찾는다 // 우주는 조금씩 팽창하고 있다/그래서 모두가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


  시인이 20대 초반에 쓴 시다. 외람된 생각일지 몰라도 천상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를 젊은 날에 썼다면 평생 언어를 품고 살아야 할 운명이라고 말이다. 시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지겹도록 말하면서도 저자를 통해 시에 좀 더 다가간 것이 사실이다. 궁금하니 저자의 작품을 찾아보며 읽고 있는데 시와 산문집을 엮은 이 책도 역시나 좋았다.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시라는 세계로 나를 끌어당기는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를 만났다.

그러나 네로/ 곧 다시 여름이 온다/ 새롭고 한없이 넓은 여름이 온다/ 그리고/ 나는 역시 걸어갈 것이다

<네로 - 사랑받은 작은 개에게>


  종종 별거 아닌 고민에 빠지곤 한다. ‘여름과 겨울 중에 굳이 선택하라면?’ 같은 시답잖지만 단박에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들이다. 지금껏 끙끙댔지만 여전히 나의 대답은 시원찮았다. 청명하다는 이유로 겨울을 마지못해 꼽곤 했는데 올 여름을 보내고 나서 여름이 더 좋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여름이 지나버리면 한 해가 훅 가버린다는 사실이 서글퍼서였다. 서글픔에 끝에는 겨울이란 계절이 있었고 날씨가 추우면 몸도 마음도 움츠러드는 게 싫었다. 그러다 이 시를 만났다. ‘곧 다시 여름이 온다, 그리고 나는 역시 걸어갈 것이다’란 시구를 읽으면서 왜 여름의 서글픔만 생각했는지, 다음 여름의 새로움은 생각하지 못했는지 허망할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져 버렸다.

우리는 아침을 릴레이한다/ 경도經度에서 경도로/ 교대로 지구를 지키는 것이다/ 잠들기 전 잠시 귀를 기울여보면/ 멀리서 우는 자명종 소리/ 그것은 당신이 보낸 아침을/ 누군가 단단히 받았다는 증거다 <아침 릴레이>

  이런 시는 어떤가. 어김없이 찾아오는 피곤한 아침을 누군가 받았다고 생각하면 뭔가 안심이 된다. 그러면서 잠시나마 이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이렇듯 저자의 시에서는 시로 인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광활하게 뻗어나갈 수 있음을 느낀다. 나처럼 내면도, 겉으로 드러나는 시야가 좁은 사람은 이 광활함이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진다. 어딘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쓰는 시라는 데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면서 이토록 잔잔한 평화로운 마음이 든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2페이지 둘째 줄부터 시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먼저 고유명사가 물에 잠기고/ 형용사가 썩고/ 조사가 흐슬부슬 떨어지고/ 접속사에는 곰팡이가 많이 피었다 (중략) 활자이기를 포기한 시는 목소리로 퍼지고/ 시단은 드디어 국어사전 속으로 은퇴했다 <2페이지 둘째 줄부터>


언어와 동고동락하는 시인의 재치가 느껴진다. 그리고 국어사전 속으로 시단이 은퇴해 버린다면 세상은 훨씬 더 삭막해질 거라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시를 아찔하게 사랑하는 것도, 즐겨 읽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우리 언어로 쓰인 시를 읽는 것도 힘이 들 때가 많다. 그래서 번역의 문제로 해외 시를 좋아하거나 일부러 찾아 읽는 일은 극히 드물다. 다니카와 슌타로라는 시인으로 그의 시를 읽고, 시에 대해 관심을 갖는 마음이 그래서 더없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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