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숲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권수연 옮김 / 포레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깜빡 잠이 든 것 같은데 캄캄한 정글 같은 곳을 헤맸던 것 같다. 퍼뜩 놀라 잠에서 깨니 머리맡에 이 책이 놓여있다. 이래서 내가 밤에는 장르소설을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책을 손에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나 편안하게 누워서 책을 보고 있는데 책 속의 여주인공 잔 코로바는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일념 하에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파리에서 중남미로 건너가 정글 깊숙이까지 헤매고 있었다. 기이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사건과 그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한 수사판사 잔의 모험이 나까지 깊은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장르소설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렇게 끔찍한 살인사건은 처음이었다. 시신의 훼손도 심했고 무엇보다 식인까지 했다. 거기다 벽화처럼 사건 현장에 이상한 기호 같은 것도 그려놓았다. 비슷한 방식으로 세 명의 여성을 살해한 범인은 흔적도 없었고 살해의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희생자들의 연결고리를 추적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을 정도로 유일무이한 사이코패스거나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게 아닐까란 추측이 들 뿐이었다. 도무지 윤곽이 잡히지 않던 가운데 잔은 불법적으로 정신과의사 앙투안 페로의 진료실을 도청하게 된다. 그곳에서 한 부자(父子)의 진료 상담을 듣고 범인이 요아킴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요아킴이 누구인지, 어떻게 찾을 것인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에서 페로의 진료실을 찾지만 페로도, 요아킴과 그의 아버지도 모두 사라진 뒤였다.


 

  그 과정에서 잔은 그 사건을 맡고 있었던 오랜 판사 친구를 잃었다. 잔은 그 사건이 자신에게 배당되지 않을 것을 알았고 상부에서도 압력이 가해져 일을 잠시 쉬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혼자서 이리저리 애를 써보아도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일 것 같은데 우여곡절 끝에 사건의 공통점을 발견해가고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요아킴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뒤 따라간 페로를 쫓아 파리에서 중남미까지 날아간다. 니카라과, 과테말라, 아르헨티나의 혼령의 숲까지 가는 과정에서 요아킴이 악의 잔재라는 사실이 더 확실해졌고, 그와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고 잔은 확신한다. 그렇기에 그 험난하고 힘든 과정을 모두 이겨내고 결국 요아킴이 태어난 정글의 깊은 숲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서서히 요아킴의 정체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지만 그 과정에서 듣게 되는 중남미의 역사의 어둠이 낯설지가 않았다. 특히 아르헨티아의 독재시절에 고문당하고 감옥에서 아이를 갖고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고문관들이 물건처럼 주고받고 입양하고 아이를 뺏긴 엄마들이 그 아이들을 찾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요아킴만 악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은 요아킴도 그런 군부의 폐해를 겪은 아이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습득되어 버린 폭력의 날것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스릴러 소설을 읽다말고 중남미 역사책을 검색하면서 당시의 역사를 좀 더 상세히 알고 싶었다. 정반대에 있는 나라의 역사였고, 내가 태어난 시기에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는 뭔지 모를 데자뷰가 그런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는지도 모르겠으나 어두운 과거일지라도 국내든 국외든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확고함이 생겼다.


 

  긴 여정 끝에 악의 숲에서 마주하게 된 요아킴과 잔. 요아킴의 존재가 드러날 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저자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범인의 모습을 조금씩 흘려주었는데 의심은 하면서도 지나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요아킴이 누구인지 알았을 때의 그 멍함, 그리고 그의 최후 앞에서의 허무함이 계속 잔상으로 남았다. 그의 모든 비밀을 찾아 쉼 없이 쫓아왔고 결국 알게 되었지만 반대로 그의 본모습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른 것 같기도 했다.


 

  살인사건은 충격적이었고 요아킴의 최후가 조금은 허무했을지라도 정독하며 읽게 된 스릴러였다. 오로지 결말을 향해서 무의미한 전개만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역사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이 소설을 묵직하면서도 흘려버릴 이야기로 만들지 않았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역사라면 늘 고리타분하게만 생각하던 내가 중남미 역사책을 검색하고 있는 모습만 봐도 이 책이 가진 의미는 좀 달랐다고 본다. 이 작품으로 인해 저자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으므로(책장을 뒤져보니 두 작품이나 소장하고 있었다.) 바로 실행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