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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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여류 작가의 첫 산문집.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이 책을 구입하는데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책 소개도 보지 않은 채 주문해놓고 막상 읽으려고 하니 뭔가 많이 낯설었다. 그녀의 소설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문체와 섬세한 묘사까지 기대하진 않았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만큼이나 그녀의 내면이 문학적으로 그려질 거라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글을 읽을수록 겉돌았고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한 호흡에 읽어버릴 거라는 염려와는 달리 오랫동안 조금씩 읽어 나갔다. 집중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했다. 이 글은 그간 저자가 발표해왔던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썼고, 아무리 염려하고 신경 써서 썼다고 해도 영어 문장에서 보았던 그런 문장을 이탈리아어에서 기대하긴 힘들었다.

처음엔 실망했다. 나는 익숙한 저자의 글을 만나고 싶은데 이탈리아로 거처를 옮기면서까지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글을 써야 했는지, 나의 기대를 벗어나자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그렇게 며칠을 허비해가며 내키는 만큼 책을 읽어 나가다 중반부에 다다르자 인내하면서 이 책을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초반과 달리 중반부에 이르면서 묘사와 문장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고 서서히 저자가 가지고 있는 고뇌와 사고들이 이탈리아어로 자연스럽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마치 언어의 진화를 보는 듯 초급, 중급, 고급의 단계처럼 저자의 글이 변해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그런 단계를 거쳐 이탈리아어로 쓰인 저자의 글에 익숙해져갔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탈리아어가 운명처럼 다가왔다는 저자. 이 언어를 배우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이탈리어가 자신에게 다가왔기에 미국에서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그리고 가족과 함께 로마로 이주까지 한다. 저자의 모국어는 벵골어다. 하지만 저자는 미국에서 자랐고, 그렇게 벵골어와 영어 사이에서 진정한 모국어가 무엇인지(이탈리아어처럼 운명적인 느낌 없이) 확신이 없는 채, 두 언어 사이에서의 혼란만으로도 충분할듯한데 이탈리아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선택하고 배우고 글쓰기를 시도한다.

이미 유명한 작가라는 명성을, 앞으로 차곡차곡 글쓰기를 통해 쌓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왜 그런 모험을 감행했을까? ‘명확하게 이해가 될 때의 황홀감, 나 자신에 대한 보다 깊은 자각 때문(94쪽)’이었고, 미국인으로 인정받고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했지만 결국엔 영어에 대한 불완전함, 패배감 때문이며 작가로서의 장비를 떼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자는 이탈리아어로의 글쓰기를 통해 작가로서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작가 이전의 자신과 마주하는 시도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저자의 결단력과 노력 행동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과정에서의 노력과 벵골어, 영어, 이탈리어 그 어느 언어에서도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언어를 통한 자아 찾기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나는 혼자라는 걸 느끼기 위해 글을 쓴다. (146쪽)’ 고 말할 정도로 자신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 글쓰기에 대한 관계와 열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한다. 이 모든 게 이탈리아어로 쓰였다는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 저자의 문장에서 느꼈던 이질감이 책을 덮고 나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영어로 쓰인 소설을 완전히 배제한 채 이 책을 대하면 또 다른 저자를 만난 것 같은 새로움이 들어온다. 그 짜릿함을 저자는 언어를 배우면서 경험했기에 이탈리아어로 글쓰기를 감행한 게 아닐까란 추측도 해보았다.

현실에 안주하는 게 싫으면서도 내가 만들어 놓은, 혹은 머무르고 있는 이 울타리가 변형되고 무너질까봐 종종거리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다. 저자의 모험 앞에 이런 내 모습을 비춰보니 왜 이렇게 움츠리고만 있는지 걱정이 된다. 저자와 같은 모험이 나에겐 맞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쳐 놓은 이 울타리 안에서 좀 더 나은 나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실천하지 않을 뿐, 언젠가 때가 되면 후다닥 해 버릴 거라는 모호한 자신감만 내제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때가 과연 언제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이대로 세월만 흘러버리는 건 아닌가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할 때도 있지만 책을 통한 이런 자각과 내 자신의 돌아봄 자체만으로도 지금은 만족이다. 철저한 자기 합리화와 자기만족이라는 이름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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